나그네를 선대하라( 18:1-15)

 “하느님은 하느님이십니다. 너무나 당연한 말씀인데무슨 의미일까요? 하느님은 인간이 할 수 없는 일도 능히 하신다는 뜻도 있지만,하느님에 대해서는 인간이 어떻다고 정의하거나 규정할 수 없는 분이란 것입니다오늘 본문에서는 세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어떤 사람은 이 셋은 삼위일체 하느님을 의미한다고 생각하고또 어떤 사람은 셋은 천사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이 세 사람의 손님이 찾아왔을 때극진히 대접하여 하느님을 체험한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우리는 아브라함의 손님 대접 이야기를 들으면서한 가지 의문이 가는 점이 있습니다그가 과연 세 사람이 하나님이 보낸 천사였음을 알고 섬겼을까 아니면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대접이었을까?

오늘 본문만 보아서는 아브라함이 세 사람이 하느님이 보낸 특별한 분임을 알고 섬긴 것같이 보이기도 합니다왜냐하면 그들 앞에서 아브라함이 몸을 땅에 굽혀 인사하면서자신을 소인이라고 불렀기 때문입니다어쨌든 그는 나그네들을 극진히 섬겼습니다.

2-3절을 보세요.  그러나 여러분이 표현만 가지고 아브라함이 처음부터 그 세 사람을 하나님의 보내신 천사들로 알아보았다고 할수 없습니다그 당시에는 손님에 대한 존경의 표시로손님을 주로 부르고자신을 종으로 칭하였기 때문입니다오늘날도 식당에서 손님에게 “Sir”라고 부릅니다. 아브라함은 모르는 가운데 천사를 대접한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모르는 가운데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도 있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심으로써섬김의 본을 보이셨다면아브라함은 나그네들을 극진히 대접함으로써섬김의 본을 보인 사람입니다나그네를 잘 대접하는 것은 고대 사회에서 친절과 섬김의 대표적인 예가 되었습니다그 당시에는 교통 수단이 발달하지 않았기에 일반 가정에서 나그네들을 환대하지 않는다면 사회적인 문제가 되었습니다나그네를 환대하는 것을 통해 그 사회의 문화나 개인의 인격의 품위가 평가되었던 것입니다. 

어느 사회의 성숙도를 평가하는 기준 중에 하나가 외국인또는 나그네들에게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는가? 라고 생각합니다나그네들에게 친절하고사회적 약자들에게 자비를 베푸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가 분명합니다그러나 텃세를 부리고나그네나 외국인들에게 차별을 가하는 것은 아직 성숙하지 못한 것입니다. (미국이 선진국이지만 모든 차별이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아직도 유색 이민자들이 사회의 지도층이 되는 데는 어려움이 있습니다한국은 더 멀었습니다다문화 가정이 생기면서 그들이 차별받는 것이 사회적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같은 이민자끼리도 겉만보고 무시하는 경향도 많습니다.

하느님의 율법 중에 고아나 과부종과 나그네와 가난한 사람들 즉 사회의 약자들을 위한 말씀이 참으로 많습니다십계명 중에 하나인 안식일을 거룩히 지켜야 하는 것도 예배를 위한 뜻도 있지만사회의 약자들을 보호하기 위한 뜻이 있습니다안식일이 없다면 계속 일만 해야 하는 종들을 하느님이 생각하신 것입니다그래서 안식일에는 사람뿐 아니라 동물까지도 쉬게 해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습니다.(5:12-15)

이 하느님의 율법은 시대에 따라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하나님의 마음과 눈은 항상 사회의 연약한 사람들고아과부나그네와 같은 연약한 사람들에게 향하고 있음을 우리는 기억해야 하겠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아브라함의 섬김의 몇 가지 특징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아브라함과 사라 부부는 한 마음이 되어 섬겼습니다.

6절을 보세요. 

만약에 아브라함이 손님을 대접하고 싶어도안주인 사라가 얼굴을 찌푸리며 안 된다고 했다면 아브라함은 손님을 대접하고 싶어도 못했을 것입니다여기서 아브라함 부부가 동일한 마음으로 나그네를 대접하였다는 것이 귀한 교훈을 주는 것입니다주님의 일을 할 때에부부가 한 마음이 되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원리입니다둘 중에 한 쪽이 마음을 닫고섬기는 것을 꺼려하면, 주의 일하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둘 중에 한쪽이 선행을 격려하지 않고 막는다면 실천하기가 쉽지 않을 것입니다.

선한 일주의 일을 하는 데에는 부부가 한 마음이 되어서로의 선행을 격려해야 하겠습니다아브라함과 사라처럼 손님을 대접하는 일에이웃을 섬기는 일에 한 마음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둘째로아브라함은 지극한 정성으로 섬겼습니다이스라엘 지역에서 한 낮에 가장 뜨거울 때에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그런데 본문 창18:1절에 보면손님들이 찾아온 시간은 아침이나 선선한 저녁때가 아니라 ‘한 낮’이었습니다우리가 읽은 성경엔 “날이 뜨거울 때에”라고 되어 있는데영어로는“in the heat of the day” 라고 되어 있습니다아마도 95도 정도되었을 것입니다그래서 중동에서는 낮잠을 자거나 그늘에 앉아 쉬어야 할 시간입니다그런 시간에 손님이 찾아왔을 때환대하기란 어렵습니다냉수 한 그릇만 대접해도 잘 하는 것입니다한 여름 손님은 강도보다 무섭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아브라함은 손님들을 대접할 때대충 대접한 것이 아닙니다부지런히 최선을 다해 대접했습니다손님들에게 발 씻을 물을 드리고그늘에 앉아 쉬라고 했습니다아주 바삐 움직였습니다.급히 사라에게 가서 빵을 구우라고 부탁하고가축 떼가 있는 곳으로 달려가서 송아지를 한 마리 끌어다가 잡아서 하인에게 주어 요리하게 하였습니다8절에 그날 메뉴가 언급되고 있는데이 것들은 대충 차린 음식이 아니었습니다아주 잘 차린 음식이었습니다아브라함의 정성이 담긴 섬김은 오늘날의 우리들에게 이웃을 섬길 때 어떤 자세가 요구되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자세가 없이는 참된 섬김을 할 수 없는 것입니다남을 섬기려고 하는 사람은 경제적인 손해시간적인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것입니다손해보지 않으려 한다면송아지를 어떻게 잡습니까닭도 잡지 않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예수님처럼 진정한 섬김의 삶을 사는 것이 축복을 얻게 합니다.   

셋째로아브라함은 사람 섬기는 일을 하느님 섬기듯이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골로새서에서 “무슨 일을 하든지 마음을 다하여 주께 하듯 하고 사람에게 하듯 하지 말라고했습니다.

여러분눈에 보이는 형제 자매들을 사랑으로 돌보는 것과 눈에 보이지 않는 주님을 섬기는 것이 다르지 않습니다진정한 섬김은 사람을 섬길 때에주님 섬기듯이 하는 것입니다무슨 일을 하든 주님께 하듯 하는 것입니다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행함이 있는 믿음의 본을 보였습니다사람을 대접하였는데 부지 중에 천사와 하느님을 대접한 것이 된 것입니다.주님께서도  너희가 대접받고 싶은대로 남에게 해주어라.”이것을 명심하면 모든 사람들로 부터 칭찬을 받습니다. 

섬김은 비록 육체적으로 힘들고시간과 돈의 손해를 가져올 지 모르지만결과적으로 축복의 길입니다아브라함이 나그네를 섬겼을 때에 어떤 축복이 주어졌습니까?  인간이 할 수 없는 일하느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마음과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에게 나타났던 세 사람은 하느님과 천사들의 현현이었습니다그들은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믿을 수 없는 놀라운 복음을 전해 주었습니다“내년 이맘때 내가 반드시 네게 돌아오리니 네 아내 사래에게 아들이 있으리라.” 사라는 이 말을 장막 문에서 듣고 웃었습니다아브라함이 99세요 사라는 여성의 생리가 끊어졌으니인간적으로 그들이 아이를 낳는다는 것을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그러므로 사라가 그 말을 듣고 어이가 없어 웃었습니다믿기지 않는 얘기를 들었기에 그냥 웃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간절한 소망이었지요.

그런데  하느님은 사라에게 그 헛웃음이 참된 웃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아들을 주셨고그 이름을 ‘웃음-이삭’이라고 짓게 했습니다.

사람에게는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이 분명합니다그래서 하느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할 때도 많습니다그러나 하느님은 하느님이십니다하느님께는 능하지 못한 일이 없습니다하느님께서 하시고자 하면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뜻이고하느님의 약속만 있으면 반드시 하나님이 이루십니다그것이 그것이 영적인 문제이든 경제적인 문제이든 하느님의 뜻이 있고약속만 있다면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어 주시는 것입니다하느님께서 못하실 일은 없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가 늙은 나이에 아들을 얻는 것은 믿을수 없는 일입니다사라가 장막에서 내년 이맘때에 아들이 있으리라는 말씀을 듣고 웃은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그런데 신실하신 하나님은 사라의 그 헛웃음을 진정한 기쁨의 웃음으로 바뀌게 하셨습니다.

가수 션과 텔런트 정혜영씨 부부에 대해 들어보셨는지요그는 Compassion이란 단체를 통해 난민이나 굶는 아이들을 일대일로 돕는 사역을 하는데그가 버는 돈의 거의 전부를 아이들을 돕는데 사용하고 있다고 합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웃들에게 친절을 베풀고손님 대접하기를 힘쓰고사회의 연약한 자들을 주님 섬기듯이 섬기며 살아야 하겠습니다그러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하느님을 체험한 것처럼이 시대에도 얼마든지 하느님이 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며 살 게 될 것입니다. .

오늘날은 감사하게도 가까이 있는 이웃뿐 아니라 먼 나라의 고통 받는 이들에게까지도 얼마든지 긍휼을 베풀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문제는 마음입니다순종입니다.

이 시대의 아브라함과 사라로서할 수 있는 대로 모든 사람과 화평하게 지내고섬김을 통해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며 사시길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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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서 기다려라 (마가 13:24-37)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몇년전에 대한성공회 교회진단을 하였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10년안에 교회가 문을 닫는다.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고 지금도 그것에 대한 불안함이 일부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그래 교회가 문을 닫으면 주님의 나라가 오시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만 있으면 되는 거야 교회는 영원할 필요가 없어 라는 생각이 듭니다.

몇일전 한국의 인천에 작은교회와 소망교회가 건물을 같이 나누어 쓰는 이야기를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면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위해 비우십시오. 그래야  주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오셔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대림절(advent)에 대한 설명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기다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열 처녀의 비유: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구원의 때와 손길을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주제도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한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고난 가운데서 지내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다림으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결과 얻어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됩니다.

창세기 49:18에서 야곱이 “야훼여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방주에서 나가길,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욥이 하나님의 회복의 때를)

영성의 깊이나 믿음의 깊이는 기다림을 잘하는데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시간에 맞추고 나의 계획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에 맞추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기다리는 것을 잘 못했습니다. 스스로 완벽주의자였습니다. 누구와 시간 약속을 해서 10분이 넘으면 화를 못참습니다. 정확한 시간에 모든 일을 해야만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것이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살면 스스로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그런데 사목을 해 보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지는 수 밖에는 없지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하니까 이해와 관계가 좀 더 넓어지고 여유로와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먼저 내 스스로가 편안해 졌습니다. 이것이 기다림으로 얻어진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요구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기다려서 받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기다려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그 기다림이 너무 오래되어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모습을 보고도 기다려 주시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년을 하루같이 보시며 참고 심판의 날을 참고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지극하신 마음을 닮아 은혜로운 기다림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

1,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25:5“당신만이 나를 구해주실 하나님이시오. 나 당신의 진리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신앙의 기본은 주님의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따르고 내 뜻을 따르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곧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117편“하시는 일은 정의와 진, 그 모든 법은 진실, 그것이니 영원히 흔들리지 않도록 진실하고 올바르게 제정되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를 구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주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세상의 불의와 거짓과 혼란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편에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25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구합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왕입니다. 그는 똑똑하고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과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고 고백하고 모든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온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손들고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겸손히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도움심을 항상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까?

2, 8:24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지금도 교회는 다시오실 주님을 2,000년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참고 기다림의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 가족을 구원하고,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내 교회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모든 일에 우리는 참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국통계청에 의하면 2006년도 자살자가 10,688 하루에 평균 2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항상 세계 1위입니다. 서울대 교수가 분석을 했는데 세상변화 속에서 참지 못하고 절망함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성질이 급해서 죽는 것입니다. (밴댕이라는 생선이 있습니다. 물에서 건지면 죽습니다.) 이렇게 사람도  참고 기다리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고 죽게 됩니다. 희망의 결과를 참고 기다려야합니다.(열심당원 가롯유다의 자살 그는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즉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오는데 그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참고 기다릴 것이라.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계획이나 시간 안에서 이루지지 않습니다. 특히 교회의 일과 신앙적인 부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믿음으로 참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맡길 때 이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3,이사야 25:9절을 읽음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이 임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죽어서 천당을 가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서 그 분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경영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현실적인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축복된 인생을 살고, 누리고,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한마디로 구원을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도우심”입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안되요 전문가가 도와주면 참 쉽게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의 문제를 도와 주는 것이 참 유용하고 삶에서 도움이 됩니다. )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구원을 얻은 자는 하나님게서 직접 도와 주십니다. 비즈니스를 도와 주시고, 건강을 도와주시고, 가정을 도와주시고, 구체적인 일들을 도와주십니다.

11장에서 믿음의 선조들이 얼마나 기다림 속에 하나님과 함께 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성서적인 기다림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의 문제를 놓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참고 , 기다려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우리들, 우리 공동체, 우리 민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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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근본 이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책임과 의무를 부여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이란 단어에 오히려 무감해져 버린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말투, 겸손한 태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 선행 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됩니다.

.

성경에서는 단호하게 믿음의 형제들에게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현재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기독교인 갖춰야할 덕목으로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은 분명히 구별됩니다.요일3:10)

 

여기서 보면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 속하지 아니한 악마의 자녀라고 정도로 아주 중요한 문제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너무나 단순화시키고 문자적으로 이해를 해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증거로 인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 곤란한 일입니다.

단순 무식하게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이 있으니까 사랑하자라고 해서는 안되고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흔히들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해서 악마의 자녀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있는 사랑의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오직 하느님께 속한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자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활동들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수준에서 사랑을 말하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한 사람이나 양로원이나 홈리스들에게 구제를 하면서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과연 사랑하는 것이 되는가?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 속한 것이 인정되는가?

일본이 지진의 피해를 입었기에 그들을 돕기 위해서 구제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되는가?  이웃이 서로 웃으면서 친하게 지내고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있느냐는 말이다.

과연 성경이 이러한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다면 성서 말씀의 명령들은 단순히 신자가 실천해야 덕목과 그리스도인의 윤리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은 모든 종교가 경전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인생의 도덕과 윤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의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다고 해서 내용을 우리가 있거나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 알려주셔야만 제대로 수가 있는 것이다.

이웃을 몸과 사랑하라 말씀도 역시 이웃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선포해야만  알아들을 있는 말인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3-14)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말씀도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이해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고 실천하는 식의 사랑이라면 기부를 하거나 봉사를 하고,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서로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고 해서, 싸우고 다퉜다고 해서 과연 그것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말하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으로 있을까?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서로 사랑하라 말은 그런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는 것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

 

바우로 사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서로 만나는 것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성품이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고 내 안에 악마가 있다면 악마가 드러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것을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만 내어 놓는다. 그러나 사실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요일4:8)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사랑을 믿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는다면 굳이 사랑해 달라는 요구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사랑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나 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겪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다.  비록 고통과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사랑 안에서 되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의 당연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당연히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을 갖을 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역시 서로가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적인 친분관계와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데 필요한 사랑입니다.

그래야 내가 다니는 교회가 달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기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그런 사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자신이 타인을 위해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모두 부인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서로 사랑하라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 축에도 끼어들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내가 전하는 예수님을 이웃이 좋아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타인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역시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가 어떻게 사랑할 있겠는가?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전하고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친절함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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