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근본 이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책임과 의무를 부여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이란 단어에 오히려 무감해져 버린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말투, 겸손한 태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 선행 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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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단호하게 믿음의 형제들에게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현재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기독교인 갖춰야할 덕목으로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은 분명히 구별됩니다.요일3:10)

 

여기서 보면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 속하지 아니한 악마의 자녀라고 정도로 아주 중요한 문제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너무나 단순화시키고 문자적으로 이해를 해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증거로 인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 곤란한 일입니다.

단순 무식하게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이 있으니까 사랑하자라고 해서는 안되고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흔히들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해서 악마의 자녀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있는 사랑의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오직 하느님께 속한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자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활동들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수준에서 사랑을 말하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한 사람이나 양로원이나 홈리스들에게 구제를 하면서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과연 사랑하는 것이 되는가?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 속한 것이 인정되는가?

일본이 지진의 피해를 입었기에 그들을 돕기 위해서 구제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되는가?  이웃이 서로 웃으면서 친하게 지내고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있느냐는 말이다.

과연 성경이 이러한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다면 성서 말씀의 명령들은 단순히 신자가 실천해야 덕목과 그리스도인의 윤리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은 모든 종교가 경전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인생의 도덕과 윤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의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다고 해서 내용을 우리가 있거나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 알려주셔야만 제대로 수가 있는 것이다.

이웃을 몸과 사랑하라 말씀도 역시 이웃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선포해야만  알아들을 있는 말인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3-14)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말씀도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이해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고 실천하는 식의 사랑이라면 기부를 하거나 봉사를 하고,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서로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고 해서, 싸우고 다퉜다고 해서 과연 그것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말하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으로 있을까?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서로 사랑하라 말은 그런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는 것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

 

바우로 사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서로 만나는 것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성품이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고 내 안에 악마가 있다면 악마가 드러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것을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만 내어 놓는다. 그러나 사실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요일4:8)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사랑을 믿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는다면 굳이 사랑해 달라는 요구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사랑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나 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겪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다.  비록 고통과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사랑 안에서 되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의 당연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당연히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을 갖을 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역시 서로가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적인 친분관계와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데 필요한 사랑입니다.

그래야 내가 다니는 교회가 달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기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그런 사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자신이 타인을 위해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모두 부인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서로 사랑하라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 축에도 끼어들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내가 전하는 예수님을 이웃이 좋아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타인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역시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가 어떻게 사랑할 있겠는가?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전하고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친절함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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