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이 그리운 사회


가을이 좋은것은 하늘이 깊고 넓은 계절이기 때문이다.어려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살았는데, 어른이 될수록  땅만 보고 하늘을 보지 않는다.  하늘이 좋은 것은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피조물들이  제각기  모습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이 평화로운 것이다. 하늘처럼 모든 것을 품고 사는 것이  관용이다. 요즘 세상이 너무 각박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마음에 드는 것만 인정하려고 한다. 인종문제나 계층간의 갈등을 보아도 그렇고, 믿는것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을 한다. 교회에  여성사제가  새로 취임하였다. 혹자는 여자가 무슨 사제가 되느냐? 말한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불관용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사회에 다반사로 나타난다. 심지어 자신도 약자이고 소수민이면서,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 미국사회가  백인들만 주류로 인정하려고 하는 때문에 혼란스러운것 아닌가?  세상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주인이고 공동책임을 가지고 산다. 뉴질랜드의 식민지 역사는 특별하다. 뉴질랜드의 마오리 원주민은 영국왕실과  1840년에 와이탕기 조약을 맺음으로 토지는 마오리족이 소유하고 통치는 영국과 함께 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세계사에 유일하게 영국과 원주민이 조약을 통해서 나라를 건국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뉴질랜드는 백인 이주민과 마오리 원주민 사이에 조화로운 평화가 이루어졌다.  마오리문화와 전통은 뉴질랜드에서  상당히 존중받고 있고, 뉴질랜드인은 대부분 마오리 말을 할줄 안다. 관용의 정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평화를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민자들로  세워진 미국에 필요한 것도 이러한  관용의 정신이다. 미국을 백인들만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기득권은 인정하지만,  그것으로 소수민과 약자들을 핍박해서는 안된다. 사실 흑인들에게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백인은 유러피안 아메리칸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미국에서 몇세대를   아시안도 당연히 아메리칸으로  동등하게 불려지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명칭하나에도 관용의 정신이 부족한것을 알수 있다. 미국에서 불체자의 자녀 88만명이  쫏겨날 운명에 처해졌다. 가운데 한인도 만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비인간적이며 잔인한 일이다. 희망을 안고 자녀들은 부모를 따라 땅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국인으로 성장하여 몇십년을 살았다. 기득권자들만을 위한 법으로 이민자녀들의 인권과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하늘이 노할 일이다. 동물에 대한 생존권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이 인간에 대한 배려가 이렇게 없으면서, 세상 인권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가?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남의 일이라  방관하지 말자, 소수민과 이민자들의 권리를 찾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메릴랜드 성공회 교구에서는 919 오후 530분에 볼티모어 대성당에서 DACA 지키기 위한 기도와 집회를 갖는다. 우리들의 문제이다.   참여도 하여 우리도 사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소수민들의 아픔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우리 한인사회가 관용의 정신을 세우는데 일조하는 공동체가 되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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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를 통해 새롭게

고해성사(告解聖事) 신자가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은총을  구하는  구교회 전통의 성사이다. 성탄절이나 부활절기에 고해성사를 통해서 회개의 시간을 갖는다. 인간인 사제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고백을 하고  다시 같은 죄를 짓기는 어렵다. 요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보면서 고해성사가 생각났다. 우리 사회는 진정성있는 고해성사를 적이 없다. 그동안 국민에게 죄를 ()하고 용서받아야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무고한 민중이 희생당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일들이 우리 현대사에 그대로 드러나 있지않은가? 온갖 부정,부패가 드러나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회피하고 결국에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 말을 한다. 죄와 불의를 보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쳐야 대형교회가 불법세습으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변명하는 꼴을 보면서 그들은 분명 하느님을 이용하는 거짓말쟁이가 분명하다. 참으로 하늘이 노할 일이다.

자기의 인생을 하느님 앞에서  되돌아 볼때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그래서 사람은 서로의 한계와 잘못을 알기에 긍휼의 마음으로 가능하면 용서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백과 용서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다. 진실한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선언이 동반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초대교회에서는 공동고백을 했다. 공동체 회중이 모인 곳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중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과정을 통해 신실한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건강한 사회, 공동체, 가정은 서로의 진정성 있는 고백과 용서로 시작된다. 누구나 살다보면 잘못하고 죄짓는 일들이 생긴다. 이것을 보고 누군가는 나서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성사(聖事)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십자가의 의미도 그와 같은 것이다. 세상의 죄를  하느님께 대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다.

역사나 인생이나 매듭은 풀어야 한다. 매듭을 풀지않으면 죄악은 끝나지 않는다. 매듭이 풀려야 소통의 문이 열리고 과거의 수렁으로 부터 헤어 나올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이다.

행복한 부부는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고백하고 용서하며 사는 부부이다. 자녀나 이웃이 잘못을 해도 그들이 용서를 구하면 지난 것에 대해 다시 묻지 않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지혜이다. 진정으로 고백하면 용서할줄 아는 사람이 좋은 인격자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는 의를 보면 반드시 행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의롭게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스승인 공자도 염려할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을 세우고 닦는 일이 쉽지 않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반성하고 정화하는 좋은 길이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덮고, 세상을 속이며 사는  사람들이 복된 인간상은 아닌것이다. 고해성사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의 허물을 스스로 벗기는 진솔한 행위이다. 우리 민족이 살고 통일의 역사가 일어나고, 분열의 역사를 끝내려면 민족적인 고해성사가 필요하다. 모두가 고해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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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주는 사람

21세기는 감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다.기계적인 사람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좀더 창의적이고 세상에 감동을 줄수있는 일을 만들어 수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상은 무언가로 부터 감동받고 싶어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많이 건조해졌다. 감동받을 보다는 감정이 상할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상식이 난무하고, 기대치는 낮아지고, 사람은 제대로된 대접을 못받고 있다. 지금 미국의 상황도 가관이다. 나라의 대통령 언론과 국민들을 상대로 장터에서 싸우듯이 언쟁과 싸움을 연일 벌이고 있다. 국민은 싫다는데 억지로 밀어 부치고 거짓말과 폭언을 공공연히 한다. 이렇게 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있을까? 리더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특히 국가의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에게 희망의 멧세지를 전하는 감동의 전도사여야 한다. 그래서 한마디도 신중하게 생각하며 해야 한다. 국민을 존중하고 섬기는 것이 대통령이 갖추어야 당연한 덕목인데, 많은 국민들이 느끼는 홀대와 핍박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누구도 인간을 억압하거나 지배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어야할 것은 상처와 분노가 아니라 감동이어야 한다. 감동의 시작은 내가 받고 싶은 만큼 남에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부부 사이에도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상대에게 최선을 한다면  행복한 가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 것이다. 사실 예수와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세상에 감동을 주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천국같이 것이 분명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상처받은 것이 너무 많다.그래서 믿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감동의 시기는 전혀 없었던 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는 감동의 시간들이 분명히 있다. 다만 그것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고 있을 뿐이다. 옛말에도 감사는 물에 새기고 원망은 돌에 새긴다고 하지 않던가? 이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오히려 원망을 물에 새겨서 흘려버리고 감사를 돌에 새겨서 볼수 있다면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나는 일년에 한번은 가족여행을 한다. 이때 만큼은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먼저 아내에게 모든 선택권을 준다. 준비에서 부터 모든 것을 가족들이 원하는대로 한다. 그리고 그동안 소흘했던 가족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함께 여행하는 동안 가족이 기억 될만한 감동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이것으로 우리 가족은 일년 동안의 행복에너지를 충전한다. 돈으로 하는 여행이 아니라 가족애를 가지고 하는 여행이기에 그만큼 효과가 크다.  감동의 삶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헌신과 배려와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동이 될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한번의 인생을 공평하게 선물로 받았다. 귀한 삶을 통해서 어떤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할 것인지는 주인공인 우리들이 만들어 가야 것이다. 감동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것을 행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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