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서 기다려라 (마가 13:24-37)

조심하고 깨어 있어라. 때가 언제인지를 너희가 모르기 때문이다.

몇년전에 대한성공회 교회진단을 하였는데 결과는 충격적이었습니다. 10년안에 교회가 문을 닫는다.라는 결과가 나왔습니다. 이것에 대한 논란이 시작되고 지금도 그것에 대한 불안함이 일부에 남아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 가운데 그래 교회가 문을 닫으면 주님의 나라가 오시는거야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교회는 주님이 오시는 날까지만 있으면 되는 거야 교회는 영원할 필요가 없어 라는 생각이 듭니다.

몇일전 한국의 인천에 작은교회와 소망교회가 건물을 같이 나누어 쓰는 이야기를 보고 얼마나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이렇게 주님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리고 주님이 오시면 자리를 내어 드려야 합니다.  여러분도 주님을 위해 비우십시오. 그래야  주님의 나라가 여러분에게 오셔서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대림절(advent)에 대한 설명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기다림”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기다리고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은총을 기다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성서에서 나타나는 믿음의 사람은 기다리는 사람입니다.(열 처녀의 비유: 기름을 준비하고 신랑을 기다리는 처녀들) 그 때가 언제인지 알지 못하지만 하나님의 임재하심과 구원의 때와 손길을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구약의 주제도 하나님의 구원의 때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이스라엘은 한없는 기다림의 시간을 고난 가운데서 지내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그들은 기다림으로 결국 하나님으로부터 결과 얻어 은혜를 누리는 자들이 됩니다.

창세기 49:18에서 야곱이 “야훼여 나는 당신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노아의 홍수에서 방주에서 나가길, 다윗이 하나님의 도움의 손길,욥이 하나님의 회복의 때를)

영성의 깊이나 믿음의 깊이는 기다림을 잘하는데 있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나의 시간에 맞추고 나의 계획에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과 계획에 맞추는 것 이것이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저는 기다리는 것을 잘 못했습니다. 스스로 완벽주의자였습니다. 누구와 시간 약속을 해서 10분이 넘으면 화를 못참습니다. 정확한 시간에 모든 일을 해야만 마음이 편안했습니다. 모든 것이 나의 기준에 맞추어야 합니다. 이런것이 사람을 신경질적으로 만들어버립니다.  그렇게 살면 스스로 얼마나 피곤하겠어요. 그런데 사목을 해 보니까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요. 그러니 내가 지는 수 밖에는 없지요.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렇게 하니까 이해와 관계가 좀 더 넓어지고 여유로와지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먼저 내 스스로가 편안해 졌습니다. 이것이 기다림으로 얻어진 축복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 요구 할 수 없습니다. 다만 구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기에 우리는 기다려서 받는 것입니다. 어떤 때는 기다려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고 그 기다림이 너무 오래되어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의 모습을 보고도 기다려 주시는 것에 비하면 우리의 기다림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천년을 하루같이 보시며 참고 심판의 날을 참고 기다리신다고 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이 지극하신 마음을 닮아 은혜로운 기다림의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다려야 합니까?

1, 하나님의 도움을 기다려야 합니다.

시편25:5“당신만이 나를 구해주실 하나님이시오. 나 당신의 진리 따라 나를 인도하시고 가르치소서. 날마다 당신의 도움만을 기다립니다.

신앙의 기본은 주님의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따르고 내 뜻을 따르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나를 부인하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것이 신앙의 기초입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것은 곧 진리를 따르는 것입니다. 여러분 진리가 무엇입니까? 117편“하시는 일은 정의와 진, 그 모든 법은 진실, 그것이니 영원히 흔들리지 않도록 진실하고 올바르게 제정되었다.” 여러분 하나님의 진리를 구하십시오. ”내가 너희에게 진리를 주리니, 그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하리라“ 하나님의 도우심은 우리에게 진리를 주셔서 세상의 불의와 거짓과 혼란으로부터 구별하여 하나님편에 세워 주시는 것입니다. 시편25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절하게 구합니다. 다윗이 누구입니까? 왕입니다. 그는 똑똑하고 지혜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모든 권력과 능력을 가진 자입니다. 그런데 그가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이라고 고백하고 모든 일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스스로 온전할 수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사람 노릇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주님께 손들고 나온 사람들이 아닙니까? 겸손히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도움심을 항상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해야 합니까?

2, 8:24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기다림에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언제 올지 모르는 주님의 은혜를 기다리는 자들에게는 인내가 요구됩니다. 지금도 교회는 다시오실 주님을 2,000년을 기다리고 있지 않습니까?

신앙생활은 참고 기다림의 훈련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을 얻으려면 참고 기다려야 합니다. 내 가족을 구원하고, 내 문제를 해결하고, 내 교회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세우는 모든 일에 우리는 참음이 필요합니다. 이것은 믿음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도록 맡겨드리는 일입니다. 그때가 언제인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그날이 반드시 온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한국통계청에 의하면 2006년도 자살자가 10,688 하루에 평균 29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합니다. 항상 세계 1위입니다. 서울대 교수가 분석을 했는데 세상변화 속에서 참지 못하고 절망함으로 죽는 사람들이 많다고 합니다. 성질이 급해서 죽는 것입니다. (밴댕이라는 생선이 있습니다. 물에서 건지면 죽습니다.) 이렇게 사람도  참고 기다리지 못하면 쉽게 포기하고 죽게 됩니다. 희망의 결과를 참고 기다려야합니다.(열심당원 가롯유다의 자살 그는 주님의 부활을 보지 못하고 즉었다.)

성경은 말합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에게서 오는데 그 희망은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참고 기다릴 것이라. 현실적으로 우리에게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이 문제는 우리의 계획이나 시간 안에서 이루지지 않습니다. 특히 교회의 일과 신앙적인 부분들은 더욱 그러합니다. 믿음으로 참고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교회 일을 하면서 많은 부분을 하나님께 순종하고 맡길 때 이루어지는 경험을 합니다.)

이렇게 참고 기다리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3,이사야 25:9절을 읽음

하나님의 구원의 축복이 임합니다. 여러분 구원은 죽어서 천당을 가는 것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손에 들어가서 그 분에 의해서 움직여지고 경영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자들은 현실적인 생활에서 구체적으로 축복된 인생을 살고, 누리고, 증거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한마디로 구원을 표현한다면 “하나님께서 도우심”입니다.

(컴퓨터를 사용하는데 안되요 전문가가 도와주면 참 쉽게 문제를 해결합니다. 이렇게 사람이 사람의 문제를 도와 주는 것이 참 유용하고 삶에서 도움이 됩니다. )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도우시면 어떤 일이 일어나겠습니까? 상상해 보십시오. 구원을 얻은 자는 하나님게서 직접 도와 주십니다. 비즈니스를 도와 주시고, 건강을 도와주시고, 가정을 도와주시고, 구체적인 일들을 도와주십니다.

11장에서 믿음의 선조들이 얼마나 기다림 속에 하나님과 함께 했는지를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믿는자의 모습입니다.

여러분 이제 대림절을 맞이하면서 성서적인 기다림을 배우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삶의 문제를 놓고 주님의 약속의 말씀을 붙잡고, 참고 , 기다려서 마침내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는 우리들, 우리 공동체, 우리 민족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랑의 계명  (0) 2019.05.19
나그네를 선대하라  (0) 2019.02.26
사랑의 종교  (0) 2019.02.26
그리스도의 화해  (0) 2019.02.26
그리스도인의 존재  (0) 2019.02.26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근본 이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책임과 의무를 부여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이란 단어에 오히려 무감해져 버린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말투, 겸손한 태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 선행 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됩니다.

.

성경에서는 단호하게 믿음의 형제들에게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현재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기독교인 갖춰야할 덕목으로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은 분명히 구별됩니다.요일3:10)

 

여기서 보면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 속하지 아니한 악마의 자녀라고 정도로 아주 중요한 문제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너무나 단순화시키고 문자적으로 이해를 해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증거로 인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 곤란한 일입니다.

단순 무식하게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이 있으니까 사랑하자라고 해서는 안되고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흔히들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해서 악마의 자녀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있는 사랑의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오직 하느님께 속한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자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활동들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수준에서 사랑을 말하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한 사람이나 양로원이나 홈리스들에게 구제를 하면서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과연 사랑하는 것이 되는가?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 속한 것이 인정되는가?

일본이 지진의 피해를 입었기에 그들을 돕기 위해서 구제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되는가?  이웃이 서로 웃으면서 친하게 지내고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있느냐는 말이다.

과연 성경이 이러한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다면 성서 말씀의 명령들은 단순히 신자가 실천해야 덕목과 그리스도인의 윤리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은 모든 종교가 경전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인생의 도덕과 윤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의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다고 해서 내용을 우리가 있거나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 알려주셔야만 제대로 수가 있는 것이다.

이웃을 몸과 사랑하라 말씀도 역시 이웃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선포해야만  알아들을 있는 말인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3-14)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말씀도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이해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고 실천하는 식의 사랑이라면 기부를 하거나 봉사를 하고,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서로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고 해서, 싸우고 다퉜다고 해서 과연 그것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말하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으로 있을까?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서로 사랑하라 말은 그런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는 것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

 

바우로 사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서로 만나는 것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성품이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고 내 안에 악마가 있다면 악마가 드러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것을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만 내어 놓는다. 그러나 사실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요일4:8)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사랑을 믿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는다면 굳이 사랑해 달라는 요구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사랑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나 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겪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다.  비록 고통과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사랑 안에서 되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의 당연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당연히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을 갖을 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역시 서로가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적인 친분관계와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데 필요한 사랑입니다.

그래야 내가 다니는 교회가 달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기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그런 사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자신이 타인을 위해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모두 부인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서로 사랑하라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 축에도 끼어들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내가 전하는 예수님을 이웃이 좋아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타인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역시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가 어떻게 사랑할 있겠는가?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전하고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친절함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그네를 선대하라  (0) 2019.02.26
깨어서 기다려라  (0) 2019.02.26
그리스도의 화해  (0) 2019.02.26
그리스도인의 존재  (0) 2019.02.26
그리스도의 섬김  (0) 2019.02.26

그리스도의 화해 (루가 15:1-32)

화해(Reconciliation)라는 말을 깊이 곱씹어 보고 싶습니다.

  단어를 묵상하다보면 평화라는 말이 같이 나타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화해가 없는 불행한 시대를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보다는 나와 다르다는 것으로  거절하고 잘라버리는 것을 너무나 쉽게하는 것입니다. 사람간에 계층간에 인종간에 각자의 울타리를 만들고 안에서 자기만의 소리를 내고 다른 것에는  관심같지 않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화해보다는 싸움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싸우고 투쟁하라고 말합니다. 서로 다투어서 승리하라고 말합니다. 결과는  상처와 불신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화해를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도 화해를 통해서 해결하라고 성서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과 화해하는 방법으로 화목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이웃에게 죄를 지어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려면 먼저   화해의 제물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오면 하느님께서 사람의 죄와 허물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셔서, 사람은 화해를 통한 평화를 얻습니다. 하느님 목적은 세상을 향한 심판이 아닙니다. 용서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아 우리와 화해를 이루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지금까지는 사람이 하느님께 화해제물을 드렸지만 일이 반복되고 죄가 사라지지 않으니까, 이제는 하느니께서 당신의 아들을 직접 제물로 드려서 인간에게 더이상 형식적인 제물이 필요없이 하느님의 제물을 믿는 자들에게 화해할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신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화해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화해 방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화해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어서 실타래 처럼 얽혀있습니다. 어떻게 해결 하고 싶은데 방법을 찾을 없습니다. 혼란속에 뺘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내가 잘못됐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원하는대로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재산을 가지고 자기가 성공해 보겠다고 스스로 생각한 아들은 받은 재산을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결국에 방탕한 생활에 빠져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실패한 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동정을 베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아들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많은 일군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그가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을 생각할 때까지 그가 받은 고통은 죽음에 가까웠습니다.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회개가 나옵니다.”어서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새로운 출발은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아직도 있다는  생각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해보겠다고 하는 새출발은 되지 않습니다. 평생 다져온 생각과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버려야 비로서 하느님 아버지가 생각나고 보이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것만 내려놓으면 그것을 누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탕자입니다. 그것이 인정이 되어야 하느님을 찾게되는겁니다. 새로운 출발이 되는겁니다. 아직도 내가 탕자인줄을 모르고 잘하고 사는 효자인줄 착각하고 사는 인생의 변화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 주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 보낸후 항상 그자리에서서 문을 항상 열어놓고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흥하던지 망하던지 상관없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죄를 짓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사람이 주님을 떠나고 사람이 타락하고 스스로 절망합니다.그리고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임에도 오히려 주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똑같이 자리에 계십니다. 사랑은 잘먹고 잘살고 평안할 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통과 절망과 어려움에 빠져서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품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새롭게 출발할 있는겁니다. 소위 일탈하는 청소년들은  부모로 부터  잘못을 질타당하고 심지어 폭행을 당해서 돌아갈 곳이 없어서 그렇게 된것입니다. 그들은 돌아갈 아버지 집이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용서하고 사랑해 주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방황하며 사는겁니다. 우리들도 인생에 방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곳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곳 밖에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돌아가야합니다.

 

 

 

3, 화해제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살았는데 갑돌이가 기념일을 잊어버려서 갑순이가 화가 났습니다. 그러자 갑돌이는 장미 백송이를 들고 가니 갑순이가 화가 풀려서 화해가 되었다. 화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가는데 망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끌어안고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배플어 주었습니다. 무엇이 아버지를 감동시켰습니까? 빈손으로 망해서 거지가 되어 아들 자체입니다. 어느 부모는 돈을 가져와야 환영합니다 출세하고 공부를 잘해야만 받아들입니다. 부모의 자랑이 되어야만 자식같이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부모가 아닙니다. 자격이 없는 부모입니다. 하느님게서 원하시는 화해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돈이나 정성이나, 봉사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느님께 돌아와 사는 것이 주님게서 원하시는 참된 제물입니다. 내가 온전한 하느님의 제물이 되면 제물 가운데 하느님의 모든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 가운데 하느님게서 원하시는 가장 소중한 봉헌물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자기를 화목제물로 바치셨다. 우리는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의 고백을 통해서 온전한 화해를 하느님과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바쳐져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서야 합니다. 제물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축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주셨습니다.그리고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바울 성인은 이어서 말합니다.”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 하십시오.” 여러분 말씀을 어떻게 들으십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대적해서 삽니다.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잘못해서 탕자같이 된것을 하느님을 원망하는한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잘못이며 내가 하느님을 떠나 인간적으로 잘못 판단하고 결정한 것으로 인하여 일어난 모든 나의 일들을 회개하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돌아 간다면, 하느님은 나를 받아주시고 새로운 출발을 만들어 주실 것을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하느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축복된 삶입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깨어서 기다려라  (0) 2019.02.26
사랑의 종교  (0) 2019.02.26
그리스도인의 존재  (0) 2019.02.26
그리스도의 섬김  (0) 2019.02.26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  (0) 2019.02.26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