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1990년 프란시스칸으로 뉴질랜드에서 생활할때 사제 서품을 Bruce Gilberd 주교로 부터 받은후  

성공회에는 수도회의 전통을 가지고 있습니다. 남서과 여성 수도회가 있는데 저는 뉴질랜드의 프란시스 수도회에서 

생활을 하였습니다. 이곳은 개방적이며 지역을 섬기는 선교를 하고 각 교회에서도 일을 합니다. 저는 오클랜드에서 

교회일과 선원선교회의 채플을 도와주기도 했습니다. 지금도 여러 형제들이 기도와 섬김의 삶을 통해서 그리스도

예수를 닮아 사는 것을 목표로 생활하고 있으며 남태평양의 여러 나라의 형제들이 항상 같이 생활하는 다국적 수도자

공동체를 이루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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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에서 장소를 제공하여 일반인들이 모여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그들은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모두가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살기에 책 한장을 읽을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을 읽지 않는 민족에게 희망이 없다는 말은 누구나 아는 상식일테지만 현대인의 삶은 독서를 못하게 하는 구조적인 게으름에 빠져있는 것 같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독서량은 연평균 9.1권 미국은 77권 일본이 72권으로 나와있다. 결국 국민의 수준을 독서량으로 가늠해 볼수 밖에 없다. 우리와 경쟁하는 일본보다 형편없이 독서를 하지 않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면서 슬퍼지기까지 한다. 사실 일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않는 사람도 주위에서는 쉽게 찾아 볼수 있다. 그래서 독서모임을 시작하였다. 수요일 이른 아침 오전 6시30분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에 나와서 자신들이 읽은 책을 말하고 서로같이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를 나눈다. 두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모두가 자기의 진솔한 마음을 담아서 말하고 싶어한다. 사실 사회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수 없다. 모두가 살기 위해서 하는 지나가는 말들 뿐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자기를 들여다 볼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생각없이 말하고, 생각없이 행동했던 것들이 조금은 깊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때 만큼은 순수해 지는것 같다. 

나는 어릴적에 톨스토이의 책을 보면서 인간의 삶을 많이 생각하고 배웠다. 그래서 아직도 그때 느꼈던 생각들을 잊을 수가 없다. 책이 주는 영향이 그만큼 큰것이다. 독서모임에서 내가 과거에 읽었던 좋은 책들을 다시 보고 싶어서 찾아보니 대부분이 절판이 되어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신간 베스트셀러들을 가지고 공동독서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책들이 내용으로만 가득했는데 요즘은 내용은 가벼워지고 그림이 많고 편집상 여백이 많아진것을 본다. 아마도 독자들의 세대가 달라져서 그렇게 한듯 싶다. 어떤책들은 내용보다는 표지에 공을 드린것 같아서 아쉽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자기종교의 경전만을 고집하고 일반 서적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러면 편협한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자기의 상식과 생각을 넓히고 종교적인 심성을 잘 키워야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부드러워지고 이해가 넓어진다. 아니면 나의 편협함에만 빠져있기 쉽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새로운 지식과 생각을 나눌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매주 한번 만나는 독서의 동지들과 함께 한 주간이 즐거워지는건 덤으로 얻어지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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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답이 있는가?


성직자로 사람들을 만나는 일이 많다. 이미 선입견을 가지고 있기에 사람들이 내게 묻는 말은 형식적이다. 조금은 거룩한 질문만 하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흔하게 천국과 지옥은 있나요? 라고 묻는다 그리 진지하지 않다. 그냥 모르니까 하는 말이다. 그러면 나는 내가 죽어보지 않았는데 어찌 알겠소? 그러면 대개는 성직자가 그것도 모르냐?고 할것이고 또는 그런 확신도 없이 어떻게 성직직을 하느냐?고 할것이다. 

그러나 정직해 보자. 누가 천국과 지옥을 가보지 않고 알 수 있는가? 그것은 하느님의 영역이다. 지금 살아 있는 우리에게는 지금의 삶이 더 중요하다. 죽어서 갈 곳에 대한 고민과 걱정으로 현재의 시간을 소비한다면 그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이다. 예수가 이 땅에 온 것은 당신이 직접 우리와 같은 삶을 사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리고 이 땅에 하느님의 나라를 세우려고 오신 것이다. 누구든 이 세상에서 천국같은 행복을 살아간다면 그는 죽어서도 천국을 살것이요. 살아서 지옥같은 인생을 살면 죽어서도 겉은 삶이 이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천국과 지옥은 우리의 마음에 있어서 내가 어떤 마음으로 누리고 사느냐가 먼저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교회는 현실적인 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느님의 답을 구하고 제시하기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매번 천국 지옥 타령만 하게 될 것이다. 이제는 그런 중세기적인 단순 이분법적인 사고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그러나 아직도 소위 성경중심 말씀중심 하느님중심이라고 말하는 근본주의자들처럼 문자주의에 빠져서 말씀대로만 산다고 하면서 현재 삶에 대한 질문에는 무조건 믿으라고만 한다면 사람들의 삶과 역사에 대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 때문에 사람들은 교회가 우리의 삶에 답을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고, 실망하고 떠나게 된다. 우리 사회에는 너무나 많은 의문과 문제들이 있다. 우리들 삶에서 일어난 일이지만 하느님을 섬기는 자들이 그것에 대한 지혜를 가지고 답을 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세상을 이끌고 살아갈 것인가? 

교회는 길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 막연한 이야기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을 하느님의 관점에서 바라보고 관조해서 설명하는 이성적인 노력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자신이 모르는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모른다고 하고 함께 지혜를 구하고 진리를 연구하는 자세가 있어야 한다. 하느님의 역사는 교회 안에만 있지는 않다. 이 세상 모든 곳에서 하느님의 일은 일어나고 나타나고 있다. 이것을 교회안에만 가두어 두고 성서의 문자만 가지고 해석하려 든다면 창조하신 하느님의 우주적인 모든 것을 어떻게 설명 할 수 있을까? 

하느님의 말씀에 답이 있다. 하느님의 진리에 답이 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 답이 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근본적인 존재론을 가지고 풀어 낸다면 이 세상에 알수 없는 문제들은 없다. 하느님에게 답이 있다. 말씀에 답이 있다. 예수의 삶에서 답이 있다. 교회는 그 복음의 답을 세상에 증거해야 할 의무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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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을 향한 공동체


함석헌 선생에 대해서는 제가 seminary에서 접하게 되었다. 성공회에는 별난 사람들이 많아서 기독교뿐 아니라 유불선에 대한 관심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민주화 투쟁이 극심하던 때여서 신비적인 보다는 현실적인 신학과 믿음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해방신학과  우리의 민중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때  유영모선생 이현필선생들에 대한 책들도 접하고 함석헌 선생도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6년간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성무일과 등을 통해서 기도를 몸으로 익히고 수련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후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살다가 나중에는 뉴질랜드의 프란치스코 성공회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고 그때 본격적으로 공동체수련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동체에서 성서를 사는 지혜를  배우고,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배우게 되었다. 나는 성직자의 관점에서 통일은 하늘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까지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파괴와 전쟁의 역사이다. 심지어 종교를 이용해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인류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자발적인 능력으로 평화와 통일의 역사가 만들어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인류는 처절히 피를 흘려야 그나마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통일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평화와 통일은  피흘리지 않고 온전한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이지 않은가?       

통일을 해야 하는가?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데   소원이 되는가?  목적이 무엇인가?  경제적인 , 군사적인것, 역사적인것, 정치적인것 문화적인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긍극적인 것일까?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근간이 되어야 것은 무엇인가? 저는 답을 드릴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서울에서 태어 났지만 원적이 평남 성천이다. 그곳에  고향이다. 그곳에 조상의 땅이 있고 선산이 있고, 뿌리가 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통일을 원한다. 나는 명절이면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객을 가장 부러워하며 살았다. 명절에 찾아 갈곳이 없다는 처럼 서글픈 일이 없다. 그래서 통일을 원했다. 가족과 혈육을 만나기 위한 보다 간절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여기에는 이념도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북이 고향이 아닌분들이 통일을 소원하는지 궁금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통일은 민족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공동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통일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통일, 정치적인 통일, 사회적인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온전한 통일이 아니다.  통일이라는  안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에게는 마치 재창조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양하지만 그것들이 안에서 함께 공존하는 것이  될것이다. 통일이 된다면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하튼 엄청난 변화들이 한반도에서는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것이 두려울수 있다. 엄청난 일도 작은 일로 부터 시작할 있다. 저는 그것을 공동체운동으로 부터 생각한다. 

 결혼은 남녀가 만나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시작이다. 이것을 통해서 공동체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모여서 다른 공동체를 만든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작은 공동체 통일을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 삶이라는 것들을 못하고 산다. 분열의 상처가 우리에게는 너무 많다. 그리고 불신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뉴질랜드에서 6개국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다각기 다른 언어 문화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함게 사는 훈련을  것이다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었다 경험으로 나는 적응력이 빠르다나를 주장하면 공동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나를 어느정도 부인하고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있어야 조화로운 통일 공동체를 이룰수 있다. 다양하고 생각과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님 안에서 어울려 살수 있는가? 그리고 함께 행복할 있는가?  근본적으로는 분배의 문제이다. 대천덕 신부는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로 고백했다. 나눔의 사회를 원하였다.  대천덕신부의 비젼은 성서대로 살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을 살수 없다면 성서는 거짓말이고 예수는 헛것이다. 그는 모든것들이 서로가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각기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의 통일도 나눔으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먼저 나눔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나눔을  위한 인식의 변화가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한다. 남북이 서로 나의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없이 통일을 논할 없다.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통일되면 횡재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땅투기, 사업, 인건비 절약 등등 이것이 통일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나눔을 얼마나 믿고 확신하고 있는가?  하느님나라를 이룬다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나 통일된 나라 세상을 이룬다는 것이나 같은 말이라고 본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신앙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지금 세상을 미혹하는 타락된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결국은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남북통일에 기여할 있다. 강원도 예수원 삼수령 목장에 통일학교를 세워서 통일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삶을 나누는 헌신을 교육하고 있다. 일찍이 세계교회들은 한국교회들은 통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다. 분열과 자본주의 교회의 모습을 보이는 교회가 북한에 들어간다면 결과는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기독교가 북한에 세워지기를 바란다.    

퀘이커 공동체는 세계평화에 가장 많이 구체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들의 평화센터가 활발한 활동을 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다.공인된 교인은 세계적으로 33만밖에 안되지만 활동은 여타 기독교가  따를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 지금 세계곳곳에서 평화,환경운동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대부분 퀘이커쪽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면 맞다. 현재  필라델리아의 펜들힐에 퀘이커 평화센터가 있다.그곳에는 세계사람들이모여서 참된평화를 배우고 간다. 이들은 공동체로서 연대하며 활동을 하고 있다.   부르더호프 공동체 또한 평화를 이루는 삶을 몸으로 사는 훈련을 하고 산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공동의 선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이 존경스럽지 않은가? 

이들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생활을 한다. 혹시 떨어져 있다고 해도 생활양식은 같다.세계 어느곳에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통일된 목적과 생활양식을 따른다. 스스로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고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는 생활을 훈련한다.

공동체는 전통적으로 세가지의  약속을 지킨다.   

1, 청빈의 (poverty, simple life)

자본주의는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관계 ,환경, 정치 , 경제 결국 돈으로 모든 것을 하려는 사회구조는 인간성을 말살시켜 버린다. 지금 통일을 말하면서 경제적인 부흥을 목표로 한다면  안하는것이 낫겠다. 정의로운 나눔경제가 기본적으로 이루어지는 북유럽의 사회주의 제도가 좋겠다. 수도원이나 평화공동체는 그렇게 살고 있다. 개인의 욕심이 절제 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깨어진다. 예수는 가난의 상징이다. 홈리스이다. 예수 믿고 부자되겠다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거지 예수에게서 무슨 돈을 구하는가? 사람이 돈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평화를 누릴 수이다. 예수원같은 공동체는 개인 재산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공동체의 기본이다. 넉넉히 가진 사람들은 너그럽게 돈을 풀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부터 통일은 시작된다.  

2, 순명의 ( obedience)

이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의 정신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를때 요구가 하나였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이것에 동의하면 나와 함께 살수있다. 내가 비워지고 포기되어야 비로서 진리를 나눌수 있다. 그것이 예수 정신이다. 평화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남북이 이야기 한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 상식적인 대화가 부족하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먼저 세워야 한다. 그래야 순명이라는 가치가 세워진다. 우리 워싱톤의 교민단체, 시민단체  보수와 진보 모두가  신뢰가 부족한것 같다. 그들만의  모임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누가 따르겠는가? 먼저 서로가  신뢰와 존중이 세워져야 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한다. 그러면 통일운동 자격이 없다. 서로 만나라. 대화하라. 신뢰를 세우고 존중하라. 그리고 정직하라. 안에서 순명으로 리더들을  따라 행동하면 좋겠다.     

3,정결의 (chastity)    

수도회에서는 독신을 요구한다. 몸과 마음의 정결을 요구하는것니다. 사실은 마음이 정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공동체는 자기를 성찰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것을 가장 우선한다. 내면에 하느님을 만나면 그분께서 나를 보여 주신다. 그것이 진아라고 나의 자아이다. 사람은 가면을 쓰고 산다. 잘난척, 아는척, 있는척, 온갖 헛것들을 뒤집어 쓰고 그것을 자기라고 거짓의 탈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간이 더러운 것이다. 어느 짐승이 인간처럼 거짓의 탈을 쓰고 사는가? 그런 거짓들이 모여서 무슨 평화를 이룰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솔직히 진보단체를 보면  비판이 많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자격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과거에 시민운동을 같이 사람들  모두가 자리씩 차지하고 재야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은  비난받는 자리에 있다. 그들을 보고 누가 시민운동을 신뢰하겠는가? 우리는 온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는가?

제가 수도공동체의 기본을 알려드렸는데 이것은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하느님나라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져야 기본적인  생활을 2000년동안 이어오고 있는 기독교 전통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수도자로 사신분이다. 평생을 수도생활하셨다. 그래야 평화운동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비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수 있다. 그들에게서  씨알이 자라난다. 함선생님이 말씀하신 씨알 사상을 성서에 비추어 보면 그씨알은 반드시 썩어야 한다. 그리고 열매를 맺어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어느 천년된 무덤에서 씨앗종자들를 발견하는데 그것을 신기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씨앗은 역사적 가치는 있지만 할짓은 제대로 못한것이다. 썩어서 죽어야 하는데 말라서 죽어버린것이다. 우리는 썩고 있는가? 아니면 말라가고 있는가? 스스로의 가치를 점검해야 한다.

통일운동은 썩어서 열매맺는 운동이다. 그런 씨알들이 모여서 그런 마음으로 해야 비로서 가치있는 일이 되고 열매가 맺혀질 것이다.   

통일운동은 평화운동이다 우리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다. 이것은 한반도에  하느님나라를  완성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활동가들은 공동체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만큼 중요하고, 절대적인 일이다. 우리 민족공동체의 운명은 통일에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욕망이 앞서서는 안된다.  서로가  성찰이 있어야 한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너그러움과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이런 희생 없이 어떻게 통일운동을 것이고 평화운동을 하는가 ? 예수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어렵다.개인적인 화해도 못하면서 무슨 민족화해를 이루겠는가?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은 종교심 같은 신념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하면 된다. 함석헌 선생은 예수 정신을 민족정신으로 해석하신 분이다. 그래서 씨알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민족이 살아난다고  설파하신 것이다.     

결국 통일은  개개인의  많은 각성으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통일공동체가 분열과 다툼이 없이 갈수 있다. 우리들 스스로  작은 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평화가 없으면서 무슨 통일을 이룰수 있겠는가?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면 일은 개인을 위한 일이 될수는 없다. 우리 민족 공동체가 함께 하고 누려야 소명인 것이다. 일을 여러분들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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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만족


미국가정을 방문하였다. 집이 제법 크고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다.  넓은 거실 몇곳에는 부부의 취향이 묻어나는 가구들이 가득하여 마치 가구 전시장에 있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17년을 살았는데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는 작은 곳으로 이사를 생각하고 있단다. 자녀들이 장성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2008 미국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난 집에 대한 인기가 줄고, 작은 집에 대한 선호가  커졌다고 한다. 기회에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  요즘들어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미니멀 라이프 , 최소한으로 살기 라는 말이다. 생활을 간편하게 줄이고, 소비도 줄여서  작지만 풍요롭게  사는 운동으로 2000년대에 들어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특히 운동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선진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떻게 보면 물질과 자본에 짓눌린 빡빡한 생활로 부터 박탈당한 시간과 여유로움을 찾고 싶어하는 시대의  변화라고 할수 있다.  그동안 인류의 삶은 큰것을 지향하였다. 모든 것을 크고 거대한 것으로 만들고 세우는 일에 몰두해서 인류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거대한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들의 삶도 큰것을 지향하였다. 세월이 흐르면 것이 오히려 애물단지가 되어버린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때로는   것에 집착하던 사람들이  경제적 한파에 의하여 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비로서 것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적은 것을 통한  행복을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것을 얻고자 인생을 허비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적은 것을 가지고 현재를 알차게  살수 있다는 생각이 미니멀 라이프 운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런 삶을  살아왔지만  시대의 욕망을 멈추게 할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젊은 세대들의 불안한 취업환경은 오랜동안 일인 시대를 살아야 하고, 가족도 예전과 다르게 단촐해 진것도 미니멀 라이프의  동기가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삶이 환경적으로 변화된 것이  사회적 트렌드를 만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에 욕심을 낸다. 없어도 될것을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가정마다 버리지 못하고 쌓아 놓은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만 나누어도 세상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소비주의가 사람들에게 죽도록 일만 하도록 만드는 마약같은 것이라고 경고한 말이 기억난다. 없어도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없으면 안될 같은 착각을 만들어 내는 광고 효과 때문이다. 순간적인 충동과 유행을 따르는 삶이 지나친 소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소비를 위해서 과도한 노동을 하는것은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삶의 기쁨을 빼앗는다.  소득은 소비의 욕구를 절대로 충족 시킬수 없기  때문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소비지향적인 삶의 양식을 바꾸어서 적은 것을 샘물처럼 귀하게 사용하며  행복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자원을 아끼고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게서 지어주신 풍요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얻어지는 것만 가지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만족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삶은 단순해지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있다. 많이 갖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사용하고 함께 나누는  나눔의 삶이 어느때 보다 절실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적은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만족하며 즐거움을 누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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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는 부모


나는 조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항상 조부모님은 어떤 분일까 ?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이제 어느덧 자신이 그분들의  자리를 넘보는 나이가 되어, 어른으로써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곳에서 나타나는  세대간의 갈등을 보며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살면 최소한  꼰대(?) 소리는 피할 있을 같고,   젊은이들과 더불어  소통도 가능할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른으로써 사는 생각을 몇자 적어본다.

 유교의  () 사상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중의 관계를 의미하고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가족과 이웃간의 예의는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사실 효는 어른만  대접 하는 것이아니라, 세대간의 존중이 안에 깔려있다. 오래전  강화도에서 사목을 할때,  마을 종가집에 효자문이 세워져 있었다. 그때는   자녀들이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집안 어른들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효자문을 어른들이 세워준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아무리 효심이 지극해도 부모의 사랑과 헌신을 따를 없다. 그래서 효자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혜로운 어른들이 자녀들의 정성에 답하여 효자문을 세워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어느 집에 아들 내외가 시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치매환자가 계시니  집안 분위기가 평안할리 없고, 남편이  병든 아내의 수발을 드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나면  아들 내외를 칭찬하고 자랑스러워 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녀들의 도움이 크다는 것이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며느리가 사주었다고 자랑하고 아들 내외를 향한  감사를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결국 소문이 퍼져,  지역에서  아들, 며느리에게 효자 효부상을 주었다. 부모님 덕분에 그들은 명예를 얻게 된것이다. 상을 받은 이들이 부모에게 어떻게 하며 살았을까?  결과적으로 효자녀는 지혜롭고 훌륭한 부모가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들어 불평만하고, 고집을 부리다, 자녀들과 불화하며 사는 사람들을  본다. 똑똑한 어른은 많은데 지혜로운 어른은 없다는 말이 있다. 미국에 사는 자녀들은 교육도 받고 소통이 되니,  세상의  정보가 훨씬 많고 사회를 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예전에 살아온 세월을 말하고, 경험을 내세워 말만 들으라는 어른들이 있다. 소통이 안되면 젊은이들은 어른의 곁을 떠난다. 자녀나 젊은이들에게 답답한  꼰대(?) 노릇을 하면  끼워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말은 줄여야 하고 듣기를 많이 해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책을 보고 새로운 상식을 넓히고 자아 성찰에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젊은이들 하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고 나서지 말자. 우리도 그렇게 실수하고 넘어지며  지금까지 잘살았다. 그것이 청춘이요, 성숙의 과정이다. 어른들은 어린 세대를 너그럽게 대하고  칭찬하고 아껴주는 것으로 존중을 받는다. 그러며  젊은이들이 스스로 다가와  지혜를 구할 것이다. 때를 인내로써 기다리자. 이것이 서로 존중하며 긴나긴 노후를 행복하게 더불어 살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자녀들을 모두 효자녀로 만들어 보자. 그것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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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용의 마음


중용(中庸) 이라는 말을 한마디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과하거나 부족함 없이 떳떳하며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는 상태나 정도라고 설명하고 있다.또한 어떤 것에 대하여 한쪽에 편중되지 않고 중심에서 서로를 아우르고 포용하는 정신이라고도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에 대한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가운데 우려되는 것은 사회가 극단주의에 빠져드는 것이다.지난번 대한민국의 촛불과 태극기 시위를 보면서 우리 사회의 분열을 모두가 느꼈을 터이기에 고민이 크게 다가온다.이런 극단적인 사회적 분열은 사회적으로 상처를 남긴다. 요즘 국가주의, 민족주의, 좌파, 우파라는 말을 사용해서 사람들 편을 가르고, 안에 넣으려는 경향이 있다. 종교적으로도 진보와 보수로 나누어 서로 자신들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것은 정확히 틀린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느 한쪽에만  온전히 동의하지도 않고, 어느 한곳 속하는 것도 불편하다. 이런 극단적 현상들이  드러나는 것은 그만큼 사회가 불안정 하고 미성숙한 것을 드러내는 것이다. 한동안 세계가 하나라는 말을 하면서 우리는 세상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며, 손을 맞잡고 글로벌한 세상을 기대하였다. 이렇게 손을 잡아야 한다.  서로 생각과 사상, 종교와 문화가 달라도,  그것 때문에 사람들의 가치를  폄하하거나 심판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 여기에 중용의 정신이 담겨 있다.중용은 평화를 이루는 정신이다. 내가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하다. 생각과 믿음이 좋다면 남의 생각과 믿음도 당연히 존중받아야 한다. 이런 상식을 깨면서 얻을 있는 행복과 평화는 세상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중용의 자세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있어야 한다. 모두가 손잡고 이해와 화해를 먼저 생각하고 아우르는 넓은 가슴을 준비해야 한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주어진  짧은 인생을 사랑만으로 채우려해도 세월이 부족하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는 어느 극단에도 속하지 않으면서  존중하며 사는 사람이 많고, 그들은 세상의 상식과 평화를 이루는 중심된 구성원이다. 교회적으로는 16세기 영국교회 개혁시기에 신구교 싸움으로 많은 희생과 갈등을 겪으면서 교회가 화해와 평화를 찾던 , 중용의 정신을 따라, 신구교를 아우르는 중용의 신앙을 추구하는 성공회 교회가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이 교회 전통이 되었다.    

 중용의 마음을 가지려면 스스로의 성찰과 수련이 되어야 유지할 있다. 너그러움과 용서와 이해는 중용의 정신안에서 나올수 있는 덕목이다.  신앙인으로서 생각을 해본다. 종교를 가지고 기도하며 열심으로 산다고 하면서 이웃과 평화를 이루지 못하고 오히려 정죄하며  다툰다면,  신앙의 본질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신앙의 본질은 더불어 평화를 이루어 하늘나라를 우리 안에  이루어 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통합과 평화가 절실하다. 이것을 이루기 위해, 나의 것만 주장해서 분열하기 보다는 모두를 감싸 안는 중용의 정신이 확산 되기를 바란다. 안에서 평화 공동체가 이루어 질수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성인 프란치스코의 기도의 서두를 적어본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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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이 일어날까


한동안 만나는 사람마다  한반도에 전쟁이 일어날까요?  라는 질문을 많이 했. 누구도 알수 없는 일이지만 ,  전쟁을 입에 올린다는 것은  그만큼 위험을 감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과 북한의 호전적인 막말경쟁과  정치지도자들의 수준으로 보면 국민의 안전과 삶에는 관심이 없어 보이는 같아 안타깝다. 6.25전쟁을 겪은 한반도는 참혹함을 누구보다도 알고 있고,  상처를 70년가까이 안고사는 민족이기에, 또다시 비극적인 전쟁은 일어나지 말아야 한다. 전쟁은 남북 어느쪽에도 도움이 안되고 한반도 전체가 패망의 길로 간다는 것은 누구나  예측할 있다. 가장 문제는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가들이 한반도 평화와 우리 민족은 안중에 없고 자기들의 이익만을 지키는데  몰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세계는 엄청난 혼돈속에 빠져있고  세계 각국들은  앞다투어  국수주의와 인종주의로 흐르고 있다.  더구나 미국의 트럼프 정부가  앞장서 일을  주도하고 있다. 결국 힘없고,  경제적 종속관계속에 살아가는 나라들은  강대국의 희생제물이 위험성이  그만큼  높아진 것이다.이런 상황에서  한반도 전쟁이 우리 민족과는 상관없이 강대국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벌어질수도 있다는 것이  심각한문제이다. 또다시 나라의 운명을 남의 손에 맡기는 불행은 당하지 말아야 한다.열강들이 대치하고 있는 한반도는 자칫 세계대전의 화약고의 가능성이 있기에 위험은 더욱 심각하다.  한반도전쟁은 세계전쟁으로 이어질수 있다. 이런때 우리 민초들과 신앙인은 무엇을 것인가?

 세상의 모든 종교는 평화와 사랑을 근본으로 한다. 평화를 부인하는  종교나 영적지도자는 있을수 없다. 스스로 종교를 가지고 사는 사람이라면 그는  평화와 사랑을 전제로 모든 문제를 풀어야 하고 어떠한 이유로도 전쟁과 분열을 막는것에 대한  절대적 신념이 있어야 한다.  불안한 세상을 조장하는 일에 나서는 사람들도 있는것 같다. 전쟁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있다는 위험한 생각을 하는 것이다. 결국 전쟁으로 희생되는 사람들은 연약한 민중들이다. 세계 곳곳에서 전쟁을 하고 있지만 희생은 국민 몫이다. 전쟁을 결정한 당사자들은  군대를 가보지도 않은 사람들도 많고 자녀들을  전장에 보내지도 않는다. 얼마나 잔인한 현실인가? 전쟁 영웅들이  행진할 그들의 옷에는 훈장이 달려있다. 그들이 서로 죽이고 죽은 상대는 누구인가? 그들은 서로를 죽여야만 했을까?  전쟁은 모든 사람을 지옥으로 안내한다. 거기에는 승자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패자일 뿐이다. 남북 관계를 전쟁으로 몰아가는 사람들에게  무슨 이익이 얻어지는지 묻고싶다. 같은 민족을 죽이려는 어떠한 시도도 우리는 반대해야 한다. 특히 하느님의 평화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삶은 생명을 사랑하고 생명들이 귀하게 살아갈 있는 평화의 세상을 이루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도리이다. 여기에는 사상이나 어떤 정치적 논리도 필요없다. 오직 사람이 살아야 한다는 명제앞에 모두가 순종해야 한다. 한반도금수강산에는 어떤 살상 무기나 핵이 필요치 않다.  선조로 부터 물려받은 평화의 마음만 있으면 족하다. 강대국들의  이해에 놀아나는, 어리석은  다툼은 그쳐야 한다.  한반도 조국의 불안함을 정쟁으로 이용하여  권력을 누리려는  것들을  국민은  경계해야 한다. 누구도 우리만큼 우리 자신을 사랑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전쟁은 어떠한 경우에도 입에 올리지말라. 오로지 평화만을 선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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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앙을 대하는 태도


어마라는 허리케인이 이름만큼 어머어마한 피해를 주고 갔다. 매번 자연재해를 마주할 때마다 인간의 나약함을 새삼 깨닫게 된다. 인간은 감히 자연을 상대할 존재가 아닌것이다. 자연에 순응하고 따르는 것이 하느님의 섭리라는 사실을 다시한번 일깨워 준다. 우리 교우들도 일찍이 플로리다로 내려가 가족과 친지들을 데리고 메릴랜드로 피난 분들이 있었다. 그러나 도움이 없어서  피난을 못하고 집과 터전을 하루아침에 잃은 이들의 아픔을 어떻게 위로 있겠는가? 우리는 살면서 크고 작은 재앙을 맞이하고 산다. 결국 사람이 할수 있는 일은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밖에는 없다. 이것을 피할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래서 겸손해야 한다. 지금 잘산다고 안심할것이 아니다. 지금 안정되었다고 모든 것이 끝난것이 아니다. 어느 분은 미국 이민을 살면서 안정을 이루었다고 생각했지만, 어느날 뜻하지 않은 일로 하루 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린 분도 있었다. 아직도 우리 주위에는 안정된 일과 신분을 갖지 못하여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 이웃들이 얼마나 많은가? 대부분 힘든 과정을 겪으며 미국에 정착 하였다. 자신의 문제가 해결 되었다고해서 어려운 이웃들을 외면해서는 안되는 이유가 있는것이다. 

성서를 보면 재앙을 하늘의 심판으로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라의 지도자는 국민을 대표하여  속죄제를 올리고 먼저 자신의 허물을 찾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모습을 보였다. 지도자가 권위의 옷을 벗고 , 땅에 무릎을 끓고 , 금식을 하면 , 국민들도 동참하지 않을수 없다. 이것을 보고 하늘이 불쌍히 여겨 도움을 준다고 사람들은 믿었다. 지금 미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들이 재앙 가운데 있다면, 어찌 지도자들의 회개가 필요하지 않겠는가?  재앙을 겪는 국민을 보고  하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지도자의 덕목이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에서 땅을 내려다 보면 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다. 기껏해야 작은 벌레같이 움직이는 자동차만 눈에 보인다. 이것이 땅에 존재하는 사람의 실상이다. 그래서 성서에도 사람이 미물같다 라고 고백하지 않는가? 이런 작은 사람들이 재앙을 겪을때 어떠한 태도를 가져야 할까? 라는 물음에 대해, 사람보다 못한 동물을 보고 배우는게  나을지도 모르겠다. 자연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가는 미물들이라고 하지만 그들에게는 본능적으로 자연에 순응하며 극복하는 삶이 있기 때문이다. 누구에게나 피할 없는  재앙같은 상황이 올수 있다.  20 가까이 미국에서 안정된 삶을 살지 못하고, 고생하던 분이 도움을 청해서 병원에 갔다. 이미 말기 암으로 인하여 그는 마지막 재앙을 살고 있었다. 그런 앞에서 무슨 위로를 있을까? 다만 누구든지 이런 일을 맞을 있다는 사실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개인의 재앙이든 국가의 재앙이든 모두가 슬픈일이고 사람의 능력으로 해결할 없는 영역이다. 다만 재앙을 맞이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혜와 겸손한  마음으로  존재의 교훈을 얻을 있을 뿐이다. 이웃이 힘들고 어려움에 있을때 , 기도하겠다는 말만 것이아니라, 실질적인  삶을  나누고 진실한 마음을 나누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말씀이 재앙 가운데  어려움을 겪는 이웃들을 보며 울림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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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아성찰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집을 떠나 짧은 여행을 하며 마음속에 뒹구는 상념들을 줏어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마음이  향하는 곳을 볼수 있다면 한결 여유로운 삶을 누릴수 있지 않을까?

한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영성모임을 만들어, 조용한 곳을 찾아 여행한 일이 있었다. 천주교나 개신교의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분들과 한잔을  나누며, 세속의 옷을 잠시 벗는 기회를 갖었다. 일반적인 여행이기 보다는 마음을 정화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중요한 것은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마음의 소리를 듣는것이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에 기울이고, 남을 보고 판단하는 일은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들여다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모르고 살아가니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때때로 사는것이  재미가 없단다. 그러나 시야를 돌려 자기를 보는 만으로도 생활의 느낌이 달라진다.  자아성찰을 하려면  말을 아껴야 된다. 말을 잠시  멈추기만 해도  변화가 느껴진다. 우리는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고 산다. 그리고  말의 대부분은 좋은 보다는  남의 이야기나 세상의 사건들이다. 정작 나의 이야기는 기회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를 알아야  나의 말을 할텐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며 사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다.  

뉴스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외쳐대는 말을 듣다보면, 저것이 정상적인 사람인가? 의심이 들때가 있다. 요즘같은 혼란의 시기에  경쟁하듯  대중을 향해 선동하는 그들의  말에는 억지와 편협함이 가득하고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말도  너무나 쉽게 한다.  이런것에 사람들은  분노하고 서로 다툰다. 차라리   듣는것이 낫다.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뱉어내는 말의 많은 부분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들이 많다. 이것으로 다툼이 생기는건 당연한 결과이다. 힘들게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쾌한 말이 나온다. 그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와 아픔을 준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어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평화를 얻을 있다. 침묵은 내면을 다스리기 위한 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정(Retreat) 떠난다.  피정은  말을 안하는 것이 기본이다.침묵으로 부터  평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침묵을 하면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다. 새소리가 들린다. 바람에 움직이는 나뭇잎의 흔들림이 들린다. 작은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소리도 듣게 된다.  멈추면 비로서 보이는것들이라는 글을 쓰신 혜민스님의  말씀처럼  그동안 지나친 소중한 것들을 보고 들을수 있다. 이것은 삶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내가 깨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놓치는 신비로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것을 모르고 살아서 재미없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을 볼수 있다고 성서에 쓰여있다. 그만큼 마음을 돌보는 일은  또다른 세상을  살수 있는 소중한 작업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가을 길이 많다. 그곳으로 떠나보자, 나의 삶의 고민과 문제는 항상 생활속에 있다. 잠시 장소를 떠나 나의 마음의 길을 걸어보자. 그리고 내가 가야 곳을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 마음에 담아보자. 비로서 내가 살아야 세상이 보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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