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해를 통해 새롭게

고해성사(告解聖事) 신자가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은총을  구하는  구교회 전통의 성사이다. 성탄절이나 부활절기에 고해성사를 통해서 회개의 시간을 갖는다. 인간인 사제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고백을 하고  다시 같은 죄를 짓기는 어렵다. 요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보면서 고해성사가 생각났다. 우리 사회는 진정성있는 고해성사를 적이 없다. 그동안 국민에게 죄를 ()하고 용서받아야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무고한 민중이 희생당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일들이 우리 현대사에 그대로 드러나 있지않은가? 온갖 부정,부패가 드러나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회피하고 결국에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 말을 한다. 죄와 불의를 보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쳐야 대형교회가 불법세습으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변명하는 꼴을 보면서 그들은 분명 하느님을 이용하는 거짓말쟁이가 분명하다. 참으로 하늘이 노할 일이다.

자기의 인생을 하느님 앞에서  되돌아 볼때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그래서 사람은 서로의 한계와 잘못을 알기에 긍휼의 마음으로 가능하면 용서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백과 용서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다. 진실한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선언이 동반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초대교회에서는 공동고백을 했다. 공동체 회중이 모인 곳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중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과정을 통해 신실한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건강한 사회, 공동체, 가정은 서로의 진정성 있는 고백과 용서로 시작된다. 누구나 살다보면 잘못하고 죄짓는 일들이 생긴다. 이것을 보고 누군가는 나서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성사(聖事)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십자가의 의미도 그와 같은 것이다. 세상의 죄를  하느님께 대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다.

역사나 인생이나 매듭은 풀어야 한다. 매듭을 풀지않으면 죄악은 끝나지 않는다. 매듭이 풀려야 소통의 문이 열리고 과거의 수렁으로 부터 헤어 나올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이다.

행복한 부부는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고백하고 용서하며 사는 부부이다. 자녀나 이웃이 잘못을 해도 그들이 용서를 구하면 지난 것에 대해 다시 묻지 않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지혜이다. 진정으로 고백하면 용서할줄 아는 사람이 좋은 인격자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는 의를 보면 반드시 행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의롭게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스승인 공자도 염려할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을 세우고 닦는 일이 쉽지 않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반성하고 정화하는 좋은 길이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덮고, 세상을 속이며 사는  사람들이 복된 인간상은 아닌것이다. 고해성사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의 허물을 스스로 벗기는 진솔한 행위이다. 우리 민족이 살고 통일의 역사가 일어나고, 분열의 역사를 끝내려면 민족적인 고해성사가 필요하다. 모두가 고해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바래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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