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마르코13:1-8)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드리는 주일입니다. 1년 동안 나의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때로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 때마다 손을 잡아주시고 일으켜주신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디슨이 메릴랜드 출생이다. 그의 말 가운데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성공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는 큰 오해가 있었다.

1%의 하느님의 도우심이 사실은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는 말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복음말씀으로 돌아갑니다.    

과거부터 이스라엘에는 종말에 대한 사상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없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이 같은 믿음은 그들이 겪은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번 나라를 잃고 수많은 세월을 살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을 경험하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묵시문학이라는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가 대표적이고, 신약의 요한계시록이 있는데 오늘 복음마르코 13장은 소묵시록이라고 해서 중요한 묵시복음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심판이 있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이라는 멧세지가 신앙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도 예루살렘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언자 마호멧이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의 성전은 흔적도 없고 이슬람의 황금사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유적인 통곡의 벽에 서서 기도를 드리며 예루살렘 성전의 부활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의외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우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곳곳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서로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을 나오면서 제자가 감탄하며 이 성전이 영원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성전의 돌들이 하나도 제자리에 없을 것이며 흔적도 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아니 그 당시에 보면 반역죄에 걸릴 위험한 예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유다전쟁으로 성전이 피괴됨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역사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매우 두려운 현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은 지금도 매일 벌어집니다. 즉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우리가 믿는 중심 축들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9.11 테러가 일어나던 2001 8월말에 저는 그 무역센터 빌딩을 올라가서 미국의 힘과 능력을 실감하면서 빌딩구경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빌딩은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이 건물이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단 0.1%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후 보름이 지나 한국에서 저는 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시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무서운 재앙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전쟁이나 다른 이유로 멸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거대한 빌딩은 일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은 그 때를 지나 새로운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역사입니다.

수없이 무너집니다. 영원할 것 같은 모든 환경들이 결국은 무너집니다. 결국 여러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재앙으로나 전쟁으로나 항상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러한 일들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만 머무르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좌절하지 않고 감사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에게는 온갖 일들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감당해야 살수 있습니다. 성 바울로는 사역을 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말합니다.”내가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주께서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셔서 당신을 섬기는 직분을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비록 나에게는 어려움이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기에 감사합니다. 고난은 오히려 나에게 능력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절망과 좌절을 하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넘어선 승리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바울로 성인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함과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물질적으로도 곤핍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을 일도 여러번 당하였습니다. 그리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의 고난이나 어려움들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만남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만남은 불안하고, 고통을 주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서 절망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어떤 만남은 같은 상황에서도 기쁨을 줍니다. 희망을 줍니다. 어려움을 이길 능력을 줍니다. 사람을 만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우리 주님을 만나면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즉 종말적인 세상을 넘어 새하늘과 새땅을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처음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버지니아의 윌리엄스타운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늘날 이민자처럼 사회에 대한 실망을 안고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때도 그들은 성공회사제를 모시고 와서 먼저 성당을 마을 가운데 세우고 정착을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두려운 미지의 세계를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살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미지의 땅에 온 그들은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저는 처음 설교에서 우리는 광야에 초대되어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는 우리가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지식이나, 능력이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하여 살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종말을 사는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깨달을 자리에 부름받은 선택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의 새로운 출발은 실패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성인 바우로가 가르치신 대로 항상 감사하십시오. 무조건 감사하십시오. 고생할 몸이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고민할 수 있는 정신이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때로는 다투며, 고생을 나누는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홈 리스에게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시고 감사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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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되려면(루가 14:25-33)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 되기를 원하세요? 예수의 삶을 살기를 원하세요? 예수님 처럼 되기를 원하세요?  쉽지 않은 답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면서도 실상은 내가 ? 무엇을 위해서 예수를 선택하였는지 확실한 목표가 없어요. 그러면  흔들립니다. 마음대로 믿고,  내가 믿고 싶고 것만 믿고 삽니다. 결국은 내가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진리가 자리하지를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변함없는 하느님이 안에 살아계셔서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라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구티에레즈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5복음이 있다고 합니다. 사복음서외에 내가 복음이 있어서 오히려 그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보다는 내가 경험하고 내가 알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믿고 산다면 예수의 제자는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이 이번에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성인이 예는 일찍이 없었다고 합니다. 대개는 세기가 지나고 나서 그의 공덕과 전설적인  신앙의 기적을 통해서 성인으로 추대를 하는데 별세한지 오래지 않은 분을 성인으로  인정 한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여인이  일찍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수녀가 되어 일생을 가난하고 병든 인도 캘커타의 빈민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고단한 삶을 따라서 함께 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지어  몰려들었습니다. 데레사 수녀처럼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한번 살겠다는 겁니다. 분은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비난과 관계의 어려움, 시기 질투 여러분과 똑같은  어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지식으로 남들에게 가르침을 줄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데레사 수녀를 보고  용기를 얻어  예수의 길을 가게 되는겁니다. 사람이 한다면 나도 할수 있다. 그들이 saint라면 우리도 saint 있는겁니다.   

1, “누구든지 자기 자신마저 부인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수 없다.”

여러분 나를 부인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무엇을 부인한다는 것인가요?

 신앙의  출발은 내가 누구인가?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삽니다. 대부분 자기의 본질은 모릅니다. 껍데기만 압니다. 껌데기들은 수시로 떨어져 나가고 변화합니다. 이름도 바뀝니다. 모양도 바뀝니다. 성품이나, 습관과 상황도 빠뀌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런나를 나라고 주장하고 믿고 사는것이 사람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부인하라는 말은 본질이 아닌 거짓된 자아를 부인하고 미워하라는 말입니다. 나의 본질이 아닌것 나의 본성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형상이 아닌것은  하느님에게 속한 진리의 내가 아니기에 그것을 휘둘리고 그것에 속상하고 살지말고 그것을 미워하고 버려서 ”(진아) 찾아서  평안하게 살아라 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자아를 자기인줄 알고 삽니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이어서  또다른 거짓을 낳는겁니다. 그런 인생은  모두가 거짓으로 똘똘 뭉쳐서 나를 옭아매어버립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미워하고 부인하고  나를 가지고 따르라이말입니다. 여러분 나라는  존재는 대단하지 않아요 우주의 먼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먼지같은 존재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사실 알게되면  가치는  달라집니다. 데레사 수녀의 훌륭함은 그분은 참나 하느님의 작품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종이 한장 차이일뿐입니다.

거짓을 사는 사람은 사람을 바꿉니다. 어느정도 알고 나면 자기가 드러나니까 불편합니다. 그러면 상대를 바꿉니다. 이런 인생을 계속살게 되는 것이지요.

2, “너희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여러분 예수 믿는데 걸림돌이 무엇인가요? 버릴것을  버리기 때문이지요. 집착이라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 자식에 대한 집착, 일에 대한 집착, 등등  무언가에 집착하면 주님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의 말씀만이,  하느님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러분을 살릴수 있어요. 하느님외의 모든것은  나와 일시적인 인연을 맺을 뿐입니다. 때가되면 사라집니다. 떠나갑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집착하고 잡고 있는 그것들 가운데 영원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요? 그런데 그것에다 모든 것을 쏟는다면  그것은  후회하게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진것을 모두 버리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진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알기에 방해되는 모든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축복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푸르고 싱싱하게 자란다고 시편에서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를 사는 사람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빌레몬서에서 소개하는 오네시모라는 바울의 제자가 있는데 그는 본래 노예였는데 바울이 감옥에 있을때 함께 하다가 예수님을  믿어 제자가 사람입니다.   노예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죽을 때까지  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하기 싫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집착으로 사는 사람은 노예로 산다고 있습니다.  집착이라는 욕망이 이끄는대로 사는 것은 노예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이제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버리고 하느님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신분을 바꾸게 됩니다. 그런 오네시모를 바울은 나의 심장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   심장같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이런 하느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느님의 심장을 가진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먼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제자로 서의 삶을 분명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때  여러분은  참된 진리의 축복을 살게 되고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넘쳐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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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성일 (all saint,s day)

제성일은 본래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이후 7세기부터 서방교회에서 제상일을 지키게 됩니다. 제성일은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성인의 날을 가지키 않은 성인들에 대한 기념을 하는 날입니다. 

성인이란 누구인가?

성인(聖人)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보통 성인이라고 말하면, 도무지 결점을 찾을 수 없고,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어 교회 안에서 평생을 살며, 금욕적인 삶을 통하여 열심히 고통 받을 기회를 찾아다니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매달리고, 황홀경을 경험하고, 손발에 오상(五傷)이 나타나며, 기적을 일으켰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기도하며, 세상과 사람들을 떠나 고독 속에서 하느님만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읽었던 성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러했고, 교회는 다른 성인을 애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찍 성인이 되기를 포기합니다.

교인들은 이런 이유로 크리스챤이 되는 것도 일찍이 포기하기도 합니다.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닮을 수 있어? 예수의 가르침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축복에만 매달려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룩한 공간을 찾아 다닙니다. 성인은 공간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거룩한 공간에 있어야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그 공간을 축성(祝聖)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쫓겨나셨고, 성전을 뒤엎었으며, 유다의 사제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성자들은 사막으로 나갔고, 그 사막에서 나타난 분이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일상의 거룩함

 

 

 

고통으로 따지자면, 수도원은 오히려 안전지대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 모를 고난이 닥쳐오기 십상입니다. 오만 잡다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악취를 견뎌야 하고, 생계를 돌보기 위해 전쟁터 같은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는 순간, 세상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집니다. 내 한 몸도 버거운데, 자녀가 생기면 내 사랑이 그 아이들의 운명을 감당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힘겨워서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그 어떤 사랑이 나를 휘어잡으면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연민으로 세상의 고통을 기꺼이 지고 가게 됩니다. 내 아이의 입을 위하여 내 몫의 빵을 떼어 놓을 때 우리는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셈입니다. 삶의 고단한 현장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 때문에 박해 받는 것이 수행이 됩니다.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집 앞에 서 있는 걸인에게 밥 한 그릇을 나누어 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행복합니다.

참다운 성인은 세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평범한 농부이며 주부이며 의사이며 학자이며 노동자입니다. 그는 노숙자이며 교사이며 때로 버림받은 이의 모습입니다. 성인은 꼭 수도복이나 수단을 입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헐렁한 점퍼 차림과 낡은 구두 아래 숨어 있는 성인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들이며, 주변을 따뜻하게 데우는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성인이란 “그들의 고행과 환시와 행적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선함에 대한 탁월한 역량” 때문에 성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길에서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를 만날 때마다 큰 기쁨이 솟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전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주님, 저런 분과 한 하늘 아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1, 가난한 이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 성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행복이란 정확하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면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때에는 거룩한 역설에 따라 한 가지 필요한 것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지복(至福)을 누린 성인들이 발견한 그 한 가지는 항상 같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진주를 발견한 농부가 집과 재산을 다 팔아 진주가 묻힌 밭을 샀다는 성경의 이야기처럼,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성인은 그리스도와 길동무가 되는 사람이고, 동지요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운명을 나누어 갖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것이 곧 수도자가 되겠다고 작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리를 옮길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 사람을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환경은 물리적으로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지만, 그 사람의 혼이 새로워지고, 환경을 바라보고 대하는 그이의 안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로수를 만지면서도 수액을 따라 지금도 흐르고 있을 창조의 기운을 느끼고, 하늘의 별을 보다가 갑자기 속으로 흐르는 감사의 눈물을 깨닫게 되고, 가난한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부유하나 겸손하고 궁핍하나 당당해집니다. 손끝이 따뜻하고 섬세해지며, 입술이 부드럽고 친절해집니다. 힘써 일하며 즐거이 찬양합니다

2,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예전에 레오나르도 보프가 썼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란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신비가들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배회하거나 아예 세상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고난과 아픔에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신비가’라고 부른 이유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봐야, 성령의 빛이 비추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인으로 선택되어지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자격을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것이 성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는 이유는 성인의 삶을 배우고 고백해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인의 삶을 살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삶을 실천하여 삶으로 성인으로 하루 하루를 복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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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가치 (요한 2:13-22)

사순절 셋째 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눈때문에 두주간 교회가 클로즈를 하여서 사순절 시작을 제대로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각자 기도하시면서 주님의 뜻을 지키고 삶을 살펴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라면 몸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순절에 훈련을 통하여 나름대로 지켜야 것과 버려야 할것들을 찾아서 40일동안 한다면 그것이 몸에 익어서   신앙생활에 습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습관이 있어야 거룩한 생활이 만들어지고 거룩한 생활이 여러분의 삶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거룩함은 하느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결을 의미하고 깨끗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함은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깨끗함을 원합니다.  깨끗함이라는 것은 거룩함과 영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주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악령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무덤에서 살던 사람은 아주 더러운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게서 그안에 있던 악령을 쫓아내자 그는 깨끗하고 얌전하게 변하여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겉모습과 생활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같은 모습은 우리 주위에도 많습니다. 몸에 지나치게 문신을 하고 피어싱을 하여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사람들을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것을 개성이나 자유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한번 우리들의 사진들을 들추어 보면 우리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겉모습에 나타납니다. 방황하고 혼란스러웠던 때와 정결하게 살던 때의 사진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유월절에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예배 장소요, 성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도하러 가보니 성전마당에는 제물을 파는 장삿꾼들과 짐승들, 그리고 환전상들과 장삿꾼들이 가득하였고, 기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입구에는 은행에서 나와서 각종 헌금을 접수하고 있고 교회에서는  바자회를 한다고 장터를 만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둘러 엎으며 소리쳤습니다. “이것을 걷어치워라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이것이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집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깨끗게 하신겁니다. 세속에 오염되고 잘못되어진 하느님의 집을 본래의 목적으로 깨끗이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게 나아와 제사드리고, 새로운 삶을 만드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서 하나하나 고치다 보니 어느덧 하느님은 사라지고 사람의 일만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마비되고 사람들은 성전에서 선포되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더이상 들을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성전은 허물어 버리라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게 하지 않는 성전은 시장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더이상 기도할 마음이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있던 캔터키 교회는 밤이면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 와서 잠을 잡니다. 겨울에는 난방이 되고 여름에는 냉방이 되니까 머물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아침기도를 가서 놀랜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성당문을 걸어 잠근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열려 있습니다. 가끔은 노숙자가 주일미사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요즘 미국의 어느 교회도 건물을 열고 노숙자들이 밤이면 와서 쉴수 있도록 하고 그들을 위해 아침에는 식사를 준비해 주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집이라면 누구든지, 언제나 들어갈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교회는 들어 없습니다.   기능을 상실한 것이지요. 우리 교회는 그나마 채플이 열려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많이 열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이 세속화된 성전을 정화하여  하느님의  집으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일이  일어나야 교회가 정화되고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교회와 교인들은 분명히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린토 전서 3장에는 너희의 몸이 성전이라 그러므로 너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느님게서 멸하시니 거룩하게 지키라고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의 성전이 깨끗치 못하면 결국 그들이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전이 되어 성전에 들어가야 비로서 그곳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는 먼저 자신을 준비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나는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면 안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체가 정화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더럽고 오염된 영혼이라도 성령안에서 필터링을 하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모두 정화를 위하여 준비된 영혼들입니다. 그런 깨끗한 마음들이 모여서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작은 공동체는 소중한 옹달샘같습니다. 아직 맑습니다.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사랑과 순결한 마음을 주님과 함게 만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오늘 구약말씀에서는 십계명이라는 귀한 율법을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가운데 하느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간을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하심과 은혜로 살아   사람만이 거룩한 주일을 지킬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소망하는 깨끗한 마음들이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 주일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드리는 생활을 습관으로 하십시오. 그런 마음 가운데 세상을 이겨내는 깨끗한 마음이 자라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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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의 사명 (마가 1:29-39)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인지,  사람을 위한 일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잘못된 결과를 만들수 있습니다. 롯데 앞에서 소리를 높여 전도하는 사람을 봅니다. 용기에 놀라면서도 한편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합니다.  전도자의 입에서는 성경말씀을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소음으로 들립니다. 이것도 소통을 못하는 결과입니다.  불통의  문제는  남을 배려할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전도를 가르치면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하라는 말을  독선적으로 이해해서 전도를 못한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가 흥성할 때가 있었습니다.  20세기 기독교는  거칠것 없이 부흥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땅에 꽂기만 하면  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고속으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시기에는 길에서 누구나 소리를 내었고 사람들은  반응하였습니다.  시대에 기독교는 오만하였습니다.  그때의 습관을 가지고  21세기에 전도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매우 다양한 시대입니다. 사회나 개인도 다양해졌고 정보도 많아졌습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무례하다고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이제는  전도를 예의있고 품위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느님도  대접받습니다. 앞으로는 싸구려 복음교회는 사라질겁니다.  고품질의  교회만이  복음을 전할 자격이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전도에 대한 주님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는 두가지의 전도가  나타납니다.

1, 예수님의  전도입니다.

주님께서는  현장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전도방법은 함께  하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아프고 힘들다고 주님을 원하시면  주님은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누구의 청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전도를 제자들도 옆에서 배웠습니다.  예수께서 떠난후  복음은  제자들에 의해서  세상에 선포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반을 생활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삶을 직접 배웠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병을 고치고 더러운  영을 쫒아내는 자리에 제자들과 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함께 발견하고 치유의 방법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면 나가서 나와 같이 하라고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내십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는 항상 어렵고 고통받고 힘든자들과 함게 하면서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복음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행위와 함게 했습니다. 서로 다른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전통을 교회는 간직하고 세상의 문제와 고민들로 부터  함께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말씀으로 복음으로  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할 있는 응답인지를 진지하게  찾는 것입니다.

2, 바울로의 전도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될수 없습니다.”

사실 바울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경험이 없습니다.  그는 극적으로 예수의 영을 만나 스스로 깨어지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의  전도는 제자들의 전도와는 차이가   있겠지요. 오늘날  개신교회는 사도 바울로의 전도를  많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실 바울로의 전도로 인해서 세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바울로가 원치는 않았지만   주님같은 예언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도 믿음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같은 삶으로  전도자의 사명을 이어갔습니다.  바울로는 복음이 자기의 자랑이 될수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것은 말씀으로 변화되고  회복되어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전도자들은 복음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주님을 언급하지만 이미 안에는 자기가 주님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이   하느님의 말씀이 나의 자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이고 나도 아래에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말을 바구면 전도는 겸손히 하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말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복음으로 소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맞추어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원래 바울로는 고집이 전통적인 유대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섬길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복음전도자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게서는 인간과 소통하시려고 땅으로 내려 오셨지요.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늘의 것이지만  세상속에서 누구나 나누고 가질 있는 하느님의  축복언어인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자기 잇속을 채우거나,  딴짓을 한다면  이것은 수치스러운 행위입니다.  것입니다.

나눔의 운동이 성공회에서  35년전에 시작이 되었다. 초창기에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과 사는데 일용직 노동자들과 술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것이 시작이었다.그당시 이것은 교회 선교방법이 아니었고 교회들로 부터 비난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지금은 당당히 교회가 되어  주님들이 복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다. 주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당신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셨던  전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생명이라도 구원할 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서 그들과 같이 하겠다는 바울로의 전도방법과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성공회는 21세기 교회라고 소개합니다. 21세기 사회의  많은 문제와 이슈를   교회에 담아서 이야기를 하고 실험하는 열린교회입니다.  서로가 다른 생각과 문화와 언어 들이 있어도 그것을 존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다양함을 인정하는 정신이 있어서 누구도 누구를 심판하 않습니다. 안에서 저는  무언가를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나 바울로 사도의 공통점은 2000년전 옛날에  21세기 살고 있는 교회나 사람들도  뛰어 넘지 못하는  장벽을  두려움 없이 허물고 의연히 전도하는 모습을  다시 조명해야  것입니다.  주님게서 하셨는데 우리가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전도는 사랑으로 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앙행위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에게 향기가 되어 실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 치유가 되고, 분쟁과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와 화해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능력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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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하는 (루가14:1-14)

주님의 말씀이 나의 발등상의 등불이 되어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축복된 삶을 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이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것에 맞는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가지를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1,   먼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우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분이 나를 도우시고 이끄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그리스도인의 자격에 문제가 됩니다. 

3,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를  항상 인도하시는 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을  선포하는 것은 당연한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선언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생명을 걸고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인정하고 선포하는    가지를 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이러한 삶의 고백과 실천으로 부터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은 두가지를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겸손하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것이 센텐스입니다.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인생을 전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싸워서 이기고 내것으로 만들고 내가 주도하려고 합니다. 결국은 자신을 높이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동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했지요.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남에게 자랑하기를 바라고  심지어 마음속까지 들여다 보시는 하느님께도 그런 마음으로 살으니까,  예수께서 위선자라고까지 하십니다.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표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부담스러워 합니다.  사람들은  나보다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을  좋와합니다. 그런 사람이 편안 합니다.  예를들어, 찰리 채플린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구나 맹구는 어떻습니까?  이들은 진짜 바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주려고 스스로 망가지고  바보가 됩니다. 세상은 이들을 천재라고도 말합니다. 오히려 존경합니다. 같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30년을 부부가 살았는데 지금도 다투고 삽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주도권 싸움입니다.  서로 머리가 되고, 잘났다고 하니까  싸웁니다. 누가 잘나면 다른쪽은 못나야 되잖어요.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있어요 자기를 드러내고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가정이나 공동체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서로 겸손함으로 사는 것이 은혜입니다.

 모두가 주도권을 내려놓고 겸손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이라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능력도 있고 모든 것을 가지셨지만,   모든 것을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것이 그분을 메시아, 그리스도 , 구세주라고 사람들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착한행위입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남을 선대하고 존중할 압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윗자리에 앉히는겁니다. 남을 존중하는 , 하느님을 존중하여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세상이 평화롭게  되어지는 겁니다. 우리 공동체도 나를 죽이고 겸손하게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해서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존중받으려면 먼저  남을 존중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입니다.

2,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주님의 관심은 항상  작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스로를 작고 보잘껏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를  불쌍하고 작은 사람으로 보거나 인정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이  게으르고 잘못된 운명을 사는 아웃사이더로만 보일 뿐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자만에 빠질 있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한사람, 스스로 보잘것  없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절대적으로  필요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존중하여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들을  선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주시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산상복음이  복음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뉴한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하다는 말은  파산당했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도  포함을  합니다.  이들에게  세상의 어려움이 얼마나 큽니까?  그들에게는 정의롭고 평등한 하느님의 나라가  너무도 간절하지요. 없고 부족하고 파산을 당하면  대부분 작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세상은 이들을 멸시하고,   억압하고  고통을 주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셔서  세상에서는 얻을 없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겸손한 자에게 필요한겁니다. 겸손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는 세속적인 욕심과  자랑이  파산됬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은혜로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겁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많고 그것으로   인생의 목적을  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느님의 것을 누릴 자격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겸손을 갖추십시오.

존중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하느님을 존중하고 이웃을 존중하십시오.

축복된 삷을 원하십니까?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주님의  삶을  따라 사십시오.

그안에  여러분이  찾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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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마태5:1-12)

산상설교는 마태와 루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복음의 핵심이 담겨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처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참된행복에 대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긍극적인 관심은  행복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Mission statement입니다. 말씀을 따라사는  사람을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예수의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마태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해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그냥 우리가 아는  가난한 사람으로 정확합니다.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행복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행복은 누구도 채울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신기루같은 겁니다.  가난한 사람, 운명적인 일을 당해서 애통하는 사람,  주어진 불행을 어쩔수 없이 살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모든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행복해질 방법을 세상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들어 구약에서 구체적인 약자라고 칭하는 과부, 고아 장애인, 이방인 minority 에게 주어진 운명을 행복하게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불행하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참된 행복의 가치기준을 뒤집어 버리시는 겁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온유한(착한)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행복을 모두 뒤집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불행한 것들을 모두 행복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모두 참된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행복하다, 무엇이든 살수 있다, 힘있는 자는 행복하다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승리자는 행복하다 많은 것을 누릴 것이다. 배고픈 자는 행복하다 식당에서 배부르게 먹으면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행복 조건이 되겠지요. 그런데 늪에 빠지면 빠질수록 행복하지 않은겁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세요, 수많은 증거들이 있지않습니까?  

세상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굳이 하느님의 복이 간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누리는 복을 지키는 것과 복을 채워 달라고 욕심을 부릴 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따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 오는 사람들은 정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간절함을 가지고  오는겁니다. 예수의 도움이 없으면 살수 없는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오는 겁니다.  따라서 참된 행복은 사람들을 위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자가 제가 가진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입니다. 저에게 행복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자기의 것을 나누며 사는 사람에게도  참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가난해서 하느님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맛나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마음이 가난하여 행복할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나라는 없어도 , 없어도 , 능력이 부족해도, 장애가 있어도 행복을 누릴수 있는 나라입니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인 것이지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이 것입니다.

세월호 침몰처럼 자식를 잃은 부모에게 필요한것이 있습니까? , 권력, , 자동차, 부모의 마음을 위로하고 보상해 줄것은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죽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보상을 줄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과 약속만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실망 가운데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그들은 기도합니다. “나는 자식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고난 가운데 인간이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약한겁니다.  여러분께 예수의 기도를  권합니다. ”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를 통해서  주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하느님의 나라를 찾습니다. 여러분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공동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느님게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탈진하여 여행중에 로마에서 데레사 수녀님을 만났습니다.나우웬신부님은 데레사 수녀가 사람들과 대하면서 지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데레사 수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을 만날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람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이런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때 데레사 수녀가 말하기를 하루에 한시간씩 묵상기도를 하십시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오로지 그리스도앞에 내려놓고 묵상 하십시오, 그때에 거리낌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느느겁니다. 그러면 모든 근심과 불안으로 부터 자유로울 있습니다. 마음대로 되는것은 없고 모든 것은 고통일 뿐입니다. 일을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러분이 하늘나라를 산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있겠어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가지지 않아도 이미 받은 사람처럼 모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 목적이 진정 행복이라면 마음을 가난하게 비우세요. 헛된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하느님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여러분에게 행복하게 살수 있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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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르심 (루가 5:1-11)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부르시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시몬 베드로를 통해서 부르심을 따르는 자세를 묵상합시다.


1,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께서 찾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시몬은 밤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마리도 못잡고 그믈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인 예수게서 깊은 물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자기가 해서 안되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아마도 그가 조금이라도 고기를 잡았다면 순종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해볼만큼 다 해보고 안되었을때는 하느님께 맡길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능력만 믿고 살면 여러가지로 함이듭니다. 

시몬은 주님의 말에 순종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히 고기를 잡았습니다. 

2, 회개하는 사람을 주님은 찾습니다.

배에 가득한 고기를 보고 보통은 기뻐서 즐거워하며 도와준 분에게 인사를 하겠지요. 그러나 시몬은 주님게 무릎을 끓고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저는 죄인이니 저를 떠나주십시오." 시몬은 엄청나게 잡힌 물고기를 보고 기뻐하기 보다는 이런 일을 주신 하느님의 존재를 먼저 생각하는 겁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두려울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몬처럼 쉴새없이 그물을 던지는 삶을 살고 있을 겁니다. 잡힐때도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삶을 늘 되풀이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매달리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물고기를 주시지만 또다른 길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시몬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렇게 원하던 물고기를 포기하는겁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진정한 복된 삶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선택하게 하십니다. 물고기를 잡고 살것인가? 사람을 낚는 삶을 살것인가? 

여러분의 선택이 구원의 삶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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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루가 10:25-37)


착한 사마리아 사람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읍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27     "'2)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고 하였읍니다." 이 대답에

28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35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영생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찾아 그 길을 묻습니다. 그는 율법을 정확하게 알고, 하느님게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목적을 잘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정성을 다해서 사랑학고 그와같은 마음으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이 우리에게 영생의 기쁨을 줄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모든 것은 사라진다해도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그러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며 이웃에 대한 정의를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게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이웃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여 줍니다. 이웃이란 남의 고난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 일처럼 돌보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반목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이웃에서 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마리아인은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자기의 시간과 정성과 돈을 다들여 그를 돕습니다. 여기에는 인종이나, 계급이나. 종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불쌍한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하느님게서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측은지심이라 합니다. 이 말은 본래 맹자가 한 말인데 어려운 이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했습니다. 하느님게서는 누구든지 사람에게는 이런 측은지심의 사랑의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제물로 우리들을 위해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해 할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게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으로 그에게 답을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 세상에는 불쌍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를 들러서 돕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지금 멕시코 국경에는 중미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살려다라고 도움의 손길을 내닐밀어 미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미국정부는 이들을 돕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스스로 하느님의 사람이기를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영생의 축복을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윌에게 보내 주시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시려는 하느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쌍한 이들을 버리는 일은 곧 하느님을 버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일입니다. 그래서 롱 아일랜드의 성공회 주교님은 교인들을 이끌고 

 멕시코 국경에 가서 그들을 돕울 수 있는 일을 찾아 돕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그들을 통해서 미국을 정부를 회개 시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려운 형제를 행동으로 돕는 것이 곧 하느님게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느님의 나라는 어두움의 권세를 몰아내어 결국은 승리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갈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주위를 돌아 보십시오. 내가 돕지 않으면 안으면 안되는 그 일과 그 사람을 위해서 나를 봉헌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영생의 삶으로 축복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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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2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필립보 가이사리아 지방에 있는 마을들을 향하여 길을 떠나셨다. 가시는 도중에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더냐?" 하고 물으셨다.



28 "세례자 요한이라고들 합니다. 그러나 엘리야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고 예언자 중의 한 분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읍니다" 하고 제자들이 대답하였다.

29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하고 예수께서 다시 물으시자 베드로가 나서서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30 그러자 예수께서는 자기 이야기를 아무에게도 하지 말라고 단단히 당부하셨다.



31 그 때에 비로소 예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받고 원로들과 대사제들과 율법학자들에게 버림을 받아 그들의 손에 죽었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게 될 것임을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셨다.

32 예수께서는 이 말씀을 명백하게 하셨던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베드로 예수를 붙들고 그래서는 안 된다고 펄쩍 뛰었다.

33 그러자 예수께서는 돌아 서서 제자들을 보신 다음 베드로에게 "사탄아, 물러가라.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하시며 꾸짖으셨다.

34 예수께서 군중과 제자들을 한 자리에 불러 놓고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를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35 제 목숨을 살리려는 사람은 잃을 것이며, 나 때문에 또 복음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살릴 것이다.

36 사람이 온 세상을 얻는다 해도 제 목숨을 잃는다면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37 사람이 목숨을 무엇과 바꿀 수 있겠느냐?

38 절개 없고 죄 많은 이 세대에서 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사람의 아들도 아버지의 영광에 싸여 거룩한 천사들을 거느리고 올 때에 그를 부끄럽게 여길 것이다." (마르코8:27-38)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이 중심이 없으면 나의 감정이나 기분에 따라서 흔들릴 수 있다. 지금은 이렇게 고백하지만 다음에는 상황에 따라 다르게 예수를 고백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진실한 믿음은 아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물음에 "선생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라고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고백하였다. 그 때 베드로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것이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사람의 고백이다. 


사실 신앙고백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도우심으로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그렇게 할수 있는 능력을 주셨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러나 이후에 베드로는 주님의 고난과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할 때 크게 놀라서 반발하며 주님의 길을 가로 막았다. 이것을 본 주님께서 "사탄아 물러가라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라며 꾸짖으셨다. 이때 베드로는 주님의 십자가를 버린 모습이었다. 


주님의 십자가가 없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엉뚱한 소리를 할수 있다. 그리고 주님의 말씀도 알아듣고 이해할 수 없다. 이것이 십자가가 없는 어리석은 인간이다. 예수를 믿고 따른다는 것은 나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는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우리는 언제든지 주님을 버릴 수 있고, 나의 욕심을 채우는데 예수를 이용한다. 세속적인 교회들이 교회를 자기의 사업으로 알고 재벌처럼 행동한다. 이들은 이미 십자가를 버린 자들이다. 예수를 이용하여 자기의 뱃속을 채우는 일을 한다. 예수의 가난을 따르지 않고, 하느님 나라를 통한 참된 행복을 잃어버린 자들이다. 그들에게 예수가 있을리 만무하고 인간의 욕망이 가득하다. 십자가를 버리고 예수를 버리면 누구나 사탄의 종이 된다. 사탄은 사람의 일만 생각하게 한다. 사람의 일이란 분명하다. 자기의 욕심과 이익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나의 부요한과 평안만을 구한다. 사탄에게는 하느님의 의로움이 없다. 사람의 일을 하면 고민과 걱정과 근심과 절망만 있게 된다. 


그래서 주님게서 우리들에게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십자가는 세상이 주는 고민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살 수 있는 복을 주는 십자가이다. 우리는 이것을 기꺼이 지겠다고 세례를 받은 사람들이다. 그리고 제자이다. 그리고 베드로와 같은 고백을 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주어진 십자가의 영광을 늘 지키고 살자. 세상의 유혹과 나의 이기심이 드러날 때마다 그것을 죽이고 예수의 길을 따르는 것이 중요하다. 이것이 수행이다. 자기를 죽이는 노력없이 인간의 욕망을 이길 수 없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자신을 죽이라고 말하지 않는가? 교회에서 예배를 통해 한시간만 주님을 생각하고 세상에 나가면 사람의 생각과 알만을 하고 산다면 그에게 하느님의 평화가 있겠는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한결같이 주님의 복음의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느님의 평화와 사랑이 항상 있어서 세상은 살기 좋은 하느님 나라가 될수 있는 것이다.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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