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는 생명의 빵 (요한 6:24-35)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빵으로 5천명을 먹이신 나눔의 기적일 일어난 후에 제자들과 만나서 하신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은 군중들은 직접 그들이 체험한 놀라운 기적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적의 빵을 먹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 이후로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더 현실적으로 좋와졌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왕이 되면 우리들의 먹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하는 마음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열악한 정치와 수탈의 경제상황에서 백성들의 소망은 예수에게 급속히 집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려우니 한국이나 미국이다 선거를 앞두고 찾는 지도자는 먹는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누구든지 경제 문제만 해결하면 누구든지 좋다, 그것이 늘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후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일어납니다.   

여러분 신앙체험은 신비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먹었는데, 신비롭게도, 그것이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나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나누어 먹었을 뿐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면 그것이 기적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잊고 살 뿐입니다.

 그런 것 없이 우리는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게서 여러분에게 주신 생명의 빵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수도원생활 할 때 일입니다. 형제들은 매주일 모여서 생활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데 어느날 결정하기를 매주 수요일 저녁은 빵과 스프만으로 먹고 남은 돈으로 홈리스를 돕자고 했습니다. 그후 매주 수요일은 남은 빵과 스프만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사실 수도원에서는 저녁 한끼만 제대로 먹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희생하는 저녁을 먹으며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우리 형제들 8명 정도가 식사를 했지만 기분은 오천명이 함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의 빵을 나눔으로 오는 행복을 느껴 본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이런 행복을 만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서에서 빵이 나오면 우리는 두가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1,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2백만이라는 사람이 광야에서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의 빵을 먹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어른들이 6,25나 고난의 시기에 하는 이야기의 중심은 그때 무엇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먹을 것으로 나의 목숨을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먹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조상이 광야 40년동안 오로지 하느님이 내려주신 빵으로 기적적인 삶을 살았던 그 사실을 통하여 오늘도 하느님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먹이신 하느님, 그는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이 어떤 사람들인데 무조건 믿지 않습니다.

아주 지독할 정도로 하느님을 확인해서 믿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똑 같은 빵을 먹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고 어떤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같은 은총을 받아 살았지만 누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았고 누구는 그저 한끼의 빵으로만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 하십니다.”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신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여러분 빵을 먹으며 그것을 주신 하느님의 손길을 보시기 바랍니다.

빵 맛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식사기도를 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이 밥의 주인이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구나 같은 환경에서 먹고 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면서도 짜증을 내면서,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달에 만불은 번다 그러면서 흑인을 짐승이라고 하며 산다.차에는 묵주를 걸어 놓고 다닌다)

한 이디오피아 이민자는 gas ststion에서 일하는데 늘 보면 성서를 수시로 보면서 행복한 미소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먹고 죽을 빵을 먹고 살지만, 다른 사람은 생명의 빵을 먹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까?

 

   

2, 오병이어의 빵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먹는 문제를 중요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배고픔을 위해서 축복을 하십니다. 광야에서 주님과 함게 빵을 나눈 사람들은 빵만 먹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려면 기적으로 빵만 만들어 먹이면 됩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광야의 빵은 그런 빵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매일 같이 내리는 빵을 받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적의 빵이 아니라 서로 나눔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직접 체험케 해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말씀하십니다.”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와있다.”

이 나라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천명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으로 입으로 확인하고 갔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원리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 똑같이 밥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그 뜻이 전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격주로 우리 교회에서 저녁기도를 하고 음식을 나눕니다.

저는 이날 저녁이 매우 특별합니다. 개인적으로 감동이 옵니다. 단순히 모여서 밥을 한끼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특별한 만찬입니다. 호텔에서 먹는 것 보다도, 큰 부풰에 가는 것 보다도 더 훌륭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특별한 만찬의 전통이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우리들의 외롭고 힘든 이웃들이 함께 초대 되어 감동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사는 기쁨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이런 주님을 믿으면 살만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누가 생명의 빵이 되어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걱정, 근심없는 인생으로 인도하겠습니까?

한끼를 먹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내가 고생하여 얻었다는 것 보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양식으로 내게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먹으면, 그 인생의 가치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 나라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인의 존재  (0) 2019.02.26
그리스도의 섬김  (0) 2019.02.26
그리스도 우리의 왕  (0) 2019.02.26
구원을 이루어라  (0) 2019.02.26
광야의소리를 들어라  (0) 2019.02.26

그리스도 우리의 (루가23:35-43)

오늘은 추수감사 절기 맞이하여  한해의 감사를  찾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리스도의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 부터는  대림절로 들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준비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사십니까?  맞이하는 예수님은 나에게  무슨 기대를 채워주실 것인가? 지금 시대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필요한 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선택입니다. {순간의 선택은 십년을 좌우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일생을 좌우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바뀔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선택을 하며 사셨습니까? 그리고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했으면 그것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어떤 분이 내쉬빌에서 비즈니스를 하는데 결정이 어려운거예요. 불안하게  결정을 놓고 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실 모든 것이 불활실한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돌아보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했어요.)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주님이 나의  영적 인도자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의 말씀이  나에게  가장 소중합니다.   분의 말씀이 나의 삶을  인도합니다. 그렇게 결정하셨으면 최선을 다하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생의 삶이 그리스도 주님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움직여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믿음에 대해서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확신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근본적인 선택이 흔들리면 인생이 불안해지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도우심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는 인생은 불안합니다. 나아가서 불행합니다. 그리서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은혜를  알지를 못합니다. 가운데 감사가 없어요. 불평합니다. 있어도 불평 없어도 불평, 이것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있는 마음은 내가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고난고 어려움을 이기고 감사하게 사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느님이 함께 하셔서 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대면하는 일은  소중한 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소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유럽은 기독교국가가 아닙니다. 예를들어 과거의 기독교의 부흥국가들이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이 인구의  3% 넘지못합니다. 세속적인 것들에 빠져서 영적인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음으로 오는 혼돈의 상태를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400년을  하느님을 잃고 살아온 유대인들이 광야에 나타난 세례요한의 회개의 음성을 듣고  마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절망과 고통을 뼈저리게 살던 백성들이 영적으로 , 삶에서 회개하기 시작한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고 그의 말씀이 복음이 된것입니다. 주님이 살아있던 그때까지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는데,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신것을 깨닫게 것입니다.  분이 세상의 왕이셨구나. 그후 복음이 세상에  들불처럼 퍼져나가게 된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삼아 사는 사람에게는 두가지를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1, 감사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감사입니다. 골로사이서 1:12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면 불만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채워집니다. 왜냐하면 살아보니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것을 많이 알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75세라는 늙은 나이에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을 하는겁니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는 겁니다. 이것이 빨리 깨달아 질수록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2, 용서입니다.

주님의 가장 파워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혜 때문에 주님을 나의 왕으로 삼는겁니다. 그분이 나를 질책하고 심판하고, 판단한다면 힘들어서 그분과 함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왕은 우리를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서 주남은 저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느님께 간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권한입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화해할 있는 것도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감사를 품고 사십시오,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자녀로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사는 길입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의 섬김  (0) 2019.02.26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  (0) 2019.02.26
구원을 이루어라  (0) 2019.02.26
광야의소리를 들어라  (0) 2019.02.26
외치는 자의 역할  (0) 2019.02.26

구원을 이루어라 (빌립보2:10-18)

 

“처음 처럼”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들이 처음 주님과 만남, 처음 가졌던 순수함, 처음 경험한 감동 등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좋은 크리스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은혜공동체를 이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구원은  최상의 가치이며 존재이유입니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온 몸을 다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구원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을 말하지 않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제한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정성을 다 합니다. (불교인의 정성과 봉헌은 기독교인이 못 따른다. 힌두교인들의 열정 가정마다 제단을 만들어 기도한다, 이슬람교인들의 생명을 바치는 순교 )

기독교인에게 구원에 대한 생각들이 제각기 많이 다릅니다. 한번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으니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생명의 말씀을 지키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받은 구원의 선물을 간직하고 완성 하는데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한번의 체험과 은혜를 가지고 평생 거저먹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안일함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오만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은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나 쉽게 구원을 선언해 줍니다. 이것을 값싼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교회나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그 권한을 교회가 지나치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10)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구원받은 자는 먼저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을 살려주셨습니다. 나의 비천함을 이기고 새로운 존귀함으로 나를 높여 주셔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한 순간이 아니요, 그 분을 만나는 그날까지 무릎을 꿇고 살아가는 것입니다.그래서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탕자의 아들에서 보면 처음에는 기고만장하여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떼를 쓰고 나가더니 다 망하고 빈 손으로 돌아 왔는데 그 아들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기다리다가 당신의 아들로 다시 받아 주시고, 사랑으로 안아주신 분이 하느님입니다.

 돌아 온 아들은 일생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구원을 주신 주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주님을 감동하는 마음으로 대 하십시오.

 

2,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13)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걱정과 근심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없고 구원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분명 세상에서 사는 고된 생활이 있지만 다른 한가지 하나님과 그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에 우리에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소망이라는 것이 항상 같이 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테반을 보십시오. 그는 돌에 맞아서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미소를 짓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과 천사들을 바라보고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요, 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소망의 모습입니다. 인간 역사 가운데 누가 이러한 위대한 희망의 죽음을 맞이하였습니까? (홍콩에서 황금부자가 갑자기 53세에 죽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 가운데서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 소망으로 구원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것을 다 잃어도 심지어 목숨을 잃어도 구원의 소망이 있으면 죽어도 살리라.  

 

3, 기쁨으로 사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18)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감사하라. 어떤 처지에도 감사하라.” 이것은 구원으로 인하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처지에서 늘 감사할 수 있습니까?  구원 받은 자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질 뿐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항상 그래야 합니다. 정성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내가 온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성령에게 맡기고 정신 줄을 놓고 있으면 안됩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서 기도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함이 없습니다.(믿음 생활에 변화가 많고 변덕이 있는 사람은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 구원은 간직하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이런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

 

여러분 사도바울은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간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 “나의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나는 나의 갈 길을 열심히 달려왔습니다.”라는 등의 말로서 자신이 얼마나 구원의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희생하고 애를 썼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도 절절히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 은혜와 축복을 간직하기 위하여 “나는 이렇게 하였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모습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간증입니다. 간증하라고 하면 다들 복 받은 자랑만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은혜로 받은 구원을 간직하기 위한 투쟁의 삶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면 수 많은 사탄의 유혹과 대적해야 합니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이 원수가 되어 달려듭니다. 심지어 같은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섬긴다는 사람이 사단같이 달려듭니다. 세상의 타락된 풍조들은 우리의 영적 순결을 위협합니다.

순간순간 주의 도우심으로 싸워서 이겨내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지켜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깨어서 기도하고, 나의 영혼이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악을 정욕을 버리고 죄로부터 돌아서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주의 도우심으로 그리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자신을 고백하고 주님앞에 온전히 내어놓는 내가 될 때 비로서 구원의 능력으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를 채워나갑시다. 믿음의 사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 자리를 채워서 정말 하나님의 영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믿음 공동체의 교회를 이 땅에 세워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바르게 구원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참된 구원자들이 하여야 할 사명인줄 믿고 그 일에 우리 모두가 부름 받은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는 생명의 빵  (0) 2019.02.26
그리스도 우리의 왕  (0) 2019.02.26
광야의소리를 들어라  (0) 2019.02.26
외치는 자의 역할  (0) 2019.02.26
광야를 살자  (0) 2019.02.26

광야의 소리를 들어라(마태오3:1-12)

주님께서 여러분을 무엇하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하세요? 빛이되어라

옛날 전기불이 없이 촛불이나 호롱불을 밝히면  어둠속의 공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작은 불꽃이지만 그것이 가진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마치 환상을 사는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우리 세상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촛불같은 사람이 세상을 밝힐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빛으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하느님게서는 의인을 통해서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가운데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암흑기에 나타난 마지막 구약예언자라고도 합니다. 그는 예수보다 6개월정도 빠른 나이니까 예수님과 같은 또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제법 유복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나갑니다.  촛불처럼 암울한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세상을 향해 선포합니다. 여러분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가장먼저 해야할 것은 뒤집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게서  사용하신 방법입니다. 하느님께는 적당한 타협이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모든 것을 뒤집어서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겁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리스도인들은 혁명적인 사고를 가진 불순한 사람으로 위정자들의 위험대상이었습니다. “ 저들은 세상을 바꾸어 하느님나라를 세우려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결국 요한은 헤로데왕의 불의에 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자신을 혁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나는 그자리에서 똑같은 삶을 살면서 말로만 세상이 깨끗해져야해, 바뀌어야해 라고 하는 말은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자신을 먼저 회개함으로 혁명적인 삶을 고백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졌던 부유함을 던져버렸습니다. 집을 떠나 광야의 척박한 삶으로 스스로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대로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모든 예언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들에서 나는 것들을 먹고 입으며 생활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친환경적인 생활로 바뀐 것이지요. 세속적인 편안함을  떠나서 창조적인 생활을 한것이지요. 여기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유대땅에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를 원해요. 다만 그것을 용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표본이 되어 용기를 가지고 나오면, 나도 할수 있습니다.

 요한이 하였으니 나도 할수 있어요. 예수께서 하셨으니 나도 있어요. 프란시스성인이 하셨으니 나도 있어요.  요한은 하느님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두가지를 약속받습니다.

1,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라

여러분은 자신을 진실하게 고백한 경험이 있어요? 마치 목욕탕에서 처럼 자신을 빨가벗고 드러낸 경험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나의 잘못과 허물을 말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없이 나의 변화를 기대할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 하느님나라를 맞이할 없습니다. 잘난것은 압니다. 못나고 상처난것이 드러나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것으로 거듭날수 있는거예요. 고백의 과정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가 안에 들어 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약속의 세례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 혁명의 시작입니다. 완성이 아닙니다. 이렇게  출발하는 겁니다.

어떻게해야 고백을  잘할수 있을까요? 예수 성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채워져야 합니다.   하느님앞에서 어린아이가 되면 고백을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에게 나를 보여주듯이 되는겁니다.  하느님게서 이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린아이 같이 되라고 말씀하시는겁니다. 나의 나약함과  허물이 있음을 부끄러워 마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그래야 하느님 나라를 누릴 있습니다.

2,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서 보여라요한은 적극적으로 회개의 삶을 강조합니다. 요한이 그렇게 사람이기에 감히 말합니다. 이렇게 살아보니 이것이 정말 좋고 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사람들에게 강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이 고백합니다. 알지만 지금의 삶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변에는 모두가 그렇게 말은 하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그냥삽니다. 여러분 진정한  깨달음을 가지면 그의 생활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설프게 알면 아무것도 안합니다. 그냥 머리로만 알고 말아버리지요. 이것은 나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양다리를 걸치면 안됩니다. 세속을 살것인지, 하느님 나라를 살것인지 분명한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한국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회에 올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낭비입니다. 시간을 죽이는 일입니다. 반드시 확실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로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셨습니다. 이말은 내가 하느님처럼 은혜를 산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날을 기다립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것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니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주님 안에서 깨달은 말씀대로 행동하십시오. 세속과 하느님나라에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께 올인하십시오. 그것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온전한 길입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그리스도 우리의 왕  (0) 2019.02.26
구원을 이루어라  (0) 2019.02.26
외치는 자의 역할  (0) 2019.02.26
광야를 살자  (0) 2019.02.26
고난을 이기는 기도  (0) 2019.02.26

외치는 자의 역할(1:6-8,19-28)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느님에게서 낳다.”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에게서 나았지만 그의 인생은 하느님의 빛으로 살았습니다.우리는 빛을 보고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사람은 빛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초기 수도원의 창시자인 안토니오는 251 이집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34세가 되어 주일 설교를 듣던 가진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성경말씀을 듣고 자리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게됩니다.그리고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유산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사막으로 가서  그곳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찾으며 살았습니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사막으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그는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그대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복음을 외치고 복음의 빛을 증거하는데 나머지 생을 다하였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변화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된 생활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빛을 보여줍니다.이것은 당시에도 사람들에게는 신비하게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신비의 빛을 받아 사는 것이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운데는 기적이 있고 놀라운 일들이 순간 순간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는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혹시 나도 주님의 부름을 받아서 저렇게 되지나 않을까? 그러면 나의 인생은 매우 힘들것이다 라는 상상으로 미리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혹시 자기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릇의 모양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듯이 주님의 부르심이 있다고해서 모두가 세례요한이나 안토니오 성인같이 사는 것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대부분은 일상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크기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수도자들이 그와 같은 생활을 지금도 배우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모습들은 세레자 요한으로 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품으면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좀더 세상적으로 고상하게 살면서 하느님을 따를 수는 없을까? 하느님게서 우리들을 부르셔서 살게 하신것에는 차별이 없습니다.그러나 사명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가 예언자가 될수 없고 모두가 수도자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고 서로에게 연관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게 사는 것이 요한이 말하는 빛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도 빛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두움이 함께 있기에 온전한 하느님의 빛을 드러낼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빛이라고 빛을 우리가 보고 살아야 한다고 증언하는 일은 있습니다. 정도를 하기 위해서도 왠만큼의 영적인 힘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만큼의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교회가 2차대전때 폭격을 맞고 크게 훼손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예수상은 손만 떨어져 나간채 보존되었다. 교회 신자들은 조각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이전보다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다. 어느날 조각가가 손이 떨어져 나간 예수상을 보수하자고 건의 하였는데 교인들이 반대하였다. “우리는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겠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바로 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교회는 예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야 합니다.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비쳐지는 스포트 라이트를 거부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묻습니다.당신은 그리스도입니까? 당신은 예언자 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했을때 , 자기를 설명할 있을까요? 이것이 영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능력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가르치고, 변화시키고,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참된 능력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분명하게 고백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자기가 살면서 행해야 일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빛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자기의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공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인 프란시스는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자기가 하느님의 평화로 부름받은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대림절기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땅에서 나는 주님의 사람으로 그와 더불어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일의 크기는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치있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들 모두가 이것을 발견하여 우리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빛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빛을 활용해서 사람들은 많은 변화의 일들을 만들어 있습니다.그리스도는 빛으로 살아계십니다.우리는 그기스도를 통해서 무언가를 변화되도록 부름받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아서 살아갈때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대하십시오, 2015년에는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를 기대하십시오. 변화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게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비라고 할지 모르지만 하느님게서 이루시는 일은 놀라운 일상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에 여러분의 일상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구원을 이루어라  (0) 2019.02.26
광야의소리를 들어라  (0) 2019.02.26
광야를 살자  (0) 2019.02.26
고난을 이기는 기도  (0) 2019.02.26
감사한 자의 기도  (0) 2019.02.26

마르코1:1-8  벧후 3:8-13

 

여러분은 하느님을 만난 느낌을 가지고 있나요?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이었는가? 하느님을 만난 사람, 하느님을 만나며 사는 사람은 인생이 행복하다.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인생의 답이 그분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곧 나를 아는 것이요. 나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고뇌로 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존재와 나 자신의 존재는 일치한다. 따라서 인생의 방황이나 의심이나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곧 번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밖에 없다. . 

     

사람들은 모든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사는 목적은 행복이다. 돈버는 것 자식 키우는 것, 활동하는 것, 공부하는 것, 신앙생활하는 것.하느님이 존재하는 것, 예수가 오신것) 그런데 행복한가요?

왜 안 그럴까요 이유는 행복의 중심에 온전하지 못한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내 중심으로 하니까,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지 않다. 우리들이 지금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렵고 하다면 지금 내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찾아서 몸부림치는데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 살지 않는 한 그 무엇으로 채운다해도 그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세례요한이 하느님을 만나며 사는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요한은 제사장 즈가리아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에는 신분도 있고 잘사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그런 가정에서 어려서 부터 종교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고 자랐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편안한 길을 버리고, 스스로 광야를 찾아갑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불행하고, 고통받는 생활이다. 그는 왜 광야생활을 선택했을까?

 여러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구약에서 부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공통된 행동들이 있는데, 홀로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 ? 우리들 생활은 복잡하고,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잊고산다. 이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하느님을 느끼기가 어렵다. 하느님 음성을 못듣는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피정, 묵상, 안식일, 기도 등의 행위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구체적인 일이다.) 따라서 광야에 나가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하느님은 선택한 자들은 광야로 부르셔서 당신을 드러내셔서 말씀하시고 듣게 하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애서 하느님을 만난다. 사울도 다메섹 길 즉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된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시나이반도의 광야를 보면 허허벌판이다.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느님만 의지해야 한다.

 

여러분 여기는 광야입니다. 고향을 떠난 삶은 광야이다. 그런데 사람이 많다보니 하느님을 의지 하기 보다는 사람들 끼리 의지하고 믿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이렇게 하면 광야생활은 실패한다. 하느님게서 광야로 부르신 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당신을 만나도록 , 듣도록 특별히 선택하신 것이다. ? 하느님을 정확하게 알도록 하시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허울을 다 벗게 만드는 곳이다.그러니 스스로는 부끄럽지만, 본질의 모습을 알게 된다.알고 보니 자신이 그리 대단치 않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 머리숙여 겸손히 바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느님은 존재하십니다

 

광야는 세가지의 행복을 준다.

1, 회개

요한이 가장 먼저 광야에서 선포한 것은 회개인데 그가 먼저 광야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벗어드린것이다. 그는 화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것을 허울을 다 벗어버린 자의 모습은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별것도 아닌 사람이 광야에서는 다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회개이다. 여러분 죄를 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아십니까? 죄가 보인다면 그는 거룩한 인생을 살수 있고 그것으로 인생의 고민을 안해도 됩니다. 회개는 죄가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죄가 보여야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보여야 딲습니다.    

 

2, 세례

세례는 축복이다. 세례는 하느님께 나를 등록하여 보여드리는 것이다. 광야에서 나와 하느님이 함께 만나는 자리가 곧 세례의 자리인것이다. 그래서 광야는 축복의 장소이다. 그래서 은자들이 광야에서 나오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 사해공동체는 매일 하루에 두번 세례를 재현했다. 성당입구에는 대부분 성수가 있는데 사람들은 들어오고 나갈때 성수를 적시며 세례의 은총을 기억한다세례는 거듭남의 증거이다.   

3, 꿈을 꾼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나라를 경험하며, 그 나라를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하게 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 왔다.광야를 지나면 가나안이 있다. 출애굽의 여정은 고난의 길이 아니라 꿈을 꾸는 과정이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의 글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꿈을 꿉니다. 몰입하면 꿈을 꿉니다. 꿈을 꾸면 언젠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졌을 때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꿈다운 꿈입니다.

여러분의 꿈을 꾸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인가를 베드로 후서에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은 한분이시고, 진리이다. 따라서 절대로 변함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만들어 버린다.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이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허황된 오해를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허황된 하느님이다. 광야의 경험이 없는 자들은 이렇듯 하느님을 가지고 우상놀이를 한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 백성이 하느님을 모르는도다.” 그들이 어리석은 우상에 빠져 있을 때 듣는 말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만나고 나면 정확한 디렉션을 받아 인생을 살기에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의 의미와 지금 가는 길의 방향,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의 변화되는 감을 가지고 살면 불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인생의 답이 없고 불안하니까. 행복이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만나 살기를 간구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 신학이 세워졌다. 민중신학, 복음신학, 성령신학 등 그런데 미국 이민사회 가운데 나온 신학이 광야신학이다.이민자들의 Identity를 신학자들이 성서에서 찾아보니 그 중심에 하느님의 의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인구가 200만이 넘었다고 본다. 2011미국에 한인들이 방문자를 합해서 대략 2157천 이라니 거의 비슷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나와 가나안 이라는 복된 땅을 목표로 가는 것이다. 이들의 출발은 이집트 탈출이었다. 2백만이 함께 떠났지만, 모세 만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나섰을 뿐 대부분은 그저 현실이 괴롭고 힘들고, 이집트 정세가 싫고,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냥 탈출해서 떠난 것이다. 어찌 시작되었든지 간에 모세와 한배를 타고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온갖 고생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산다. 그 가운데 일부는 왜 떠나왔는냐며 불평하고, 일부는 다시 돌아가고, 일부는 타락하고, 그러다 죽었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을 의지하고 확신을 가진 자들은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된다. 여러분 우리의 이민생활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이 광야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과 아닌 것의 결과는 이미 성경에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깨달아 사는 것이 지혜요 은총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장소이다. 하느님게서 이스라엘을 4개월이면 충분히 갈수 있는 가나안 길을 40년간 이끌고 다닌 이유는 과거의 그들의 종살이 하던 성품을 변화 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변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간들 이집트에서 살던 종의 성품이 그대로 있다면 이집트에 사나 가나안에 사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아직도 이 광야에서 살면서도 과거의 삶을 고집하고,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그렇게 살면 광야에서는 죽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부르셨고, 가나안의 행복을 약속하셨고, 무언가 미래의 역사적인 소명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을 알면 광야생활은 즐겁고 복된 것이다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광야에서 사는 겁니다. 이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하느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 답을 얻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나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광야에서 살아날 방법이나 요령은 없습니다하느님의 진리에 전적으로 맡겨질 때 비로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어 살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자유를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바라고

하느님게 진지하게 나의 문제를 물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답을 주십니다. 이곳이 광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응답을 듣는 기적같은 장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광야에 부름받은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야의소리를 들어라  (0) 2019.02.26
외치는 자의 역할  (0) 2019.02.26
고난을 이기는 기도  (0) 2019.02.26
감사한 자의 기도  (0) 2019.02.26
감사하라  (0) 2019.02.26

고난을 이기는 기도(11:1-13)

성공회를 전통적으로는  기도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1549 토마스 크램머 켄터베리 대주교에 의해서  최초의 영어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만들어서  사람들이 누구든지 항상 기도할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공동문을 가지고  공동으로 또는 개인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도문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성공회교인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기도는 신앙생활에서  중요합니다.  바울은  쉬지말고 기도하라 교회에 적극 권하였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연결되는 길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길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게 어떻게 하느님과 기도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이에 주님께서 주의 기도문을 말씀하십니다. 기도문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통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도를 통한 많은 하느님과의 교통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타락은 모든 부분에 걸쳐서 말할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흔히 성경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심판을 이야기 우리는 소돔을 예로듭니다. 소돔과고모라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까?

정답은 의인이 없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님게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거부하고 가운데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다른 타락으로 멸망의 자리에 선것이 아닙니다. 죄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가운에 하느님의 의인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님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살려 주십시오, 45명만 있으면 살려주십시오, 40명만 10명만있어도 살려 주겠다라고 하느님게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0명의 의인도 없어서 결국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는 한명의 의인도 없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의로운자 하느님과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기도하며 소통하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나라를 살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정을 살립니다. 공동체를 살립니다. 하느님께 저와 여러분을 자리에 부르신 이유는 기도하라고 부르신겁니다. 하느님과 대화하라고 부르신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고 딴짓을 하고 하느님의 관계를 소흘히 하면 그것이 죄입니다.  심판의 조건입니다.

흔히들 하느님 안믿으면 어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생각과 삶은  다를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시대의 타락과 폭력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지금 저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있는가?  

지금 여러분이 사는 세상을 보세요.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삽니까? 하느님이 중요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존재합니다. 이것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하느님 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가장 먼저 한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가장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나의 소원이 아닙니다. 나의 목적이 우선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가  기도의 목적입니다.  주님게서 기도할 중언 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쓸모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느님 아버지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내가 바라는 간절히 원하는 어려움들은 우리의 아버지게서 이미 아시고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자세는 이렇습니다.

1,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청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곁에 계십니다. 그분을 안으로 모셔들이는 겁니다. 이것을 영접이라고 합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들어 오셔서 나를 움직이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퀘이커교인들이 잘합니다. 그들은 기도할때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마치 명상기도같습니다. 그러면 몸이 움직입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퀘이커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분이  함석헌 선생입니다. 기독교 가운데 평화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퀘이커교도들입니다.

 기도는 몸으로 깊이 받아들여서 하는겁니다. 나를 온전하게 하느님께 내어들이고 의탁하는 행위가 온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가 필요한것만 구하고 말아버립니다. 특히 오늘 성경에서 말씀을 가지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하라 두드려라 그리하면 찾고 열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조건 원하는 것을 가지고  두드립니다. 무리하고 이기적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솔직히 사람들의 소원이라는 것이 하느님께서 보실때 별볼일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예들들어 자녀를 성공시키는것 , 사업 잘되는 이것이 하느님나라를 이루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지요? 생각해 봅시다.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지난주에 김요한 신부님이 밀리언 집을 얻었는데 자기집이 아니니까 하느님게서 주신겁니다. 그분 개인에게 집이 필요합니까? 15명이 살려면 밀리언 집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사람에게 그런 집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경말씀을 오해하여 잘못된 것을 가지고 떼를쓰는 그런 믿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여러분이 하느님과 마주하면 모든것이 그분의 안에서 은혜롭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 주는대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바로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의 삶의 목적이 분명합니다.모든 것을 하느님의 나라 평화를 이루는 삶으로 바뀝니다. 그가 말하는 그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평화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하느님게서는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끊임없이 소통하십시오. 그러기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께  부름받은 의로운 사람으로 생활하여 가정이나 공동체나 어디에서든지 구원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외치는 자의 역할  (0) 2019.02.26
광야를 살자  (0) 2019.02.26
감사한 자의 기도  (0) 2019.02.26
감사하라  (0) 2019.02.26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9.02.26

겸손한 자의 기도(루가18:9-14)

한자로 겸손이라 함은 자신을 누르고 다른 사람 앞에서 물러난다주제넘게 남에게 참견하지 않는 다는 뜻이 됩니다. 자기가 알고 경험한 것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여 나를 누르고 참는 것입니다. 대단한 수양이지요. 사실은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도 단편적인 것입니다.  성서에서의 겸손은 땅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땅에 맞추어 내린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신  존재 앞에 나가서 나의 비천함과 나약함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또는 자신이 거룩함 앞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어서 땅을 바라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거룩함 앞에서 얼굴을 들수 없을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시덤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을 모세는 여호와를 보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감추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겸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이런 현존의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영적인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를 질문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성찰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오랜동안 성찰하는 문화가 없어졌습니다. 기도하며 떼쓰고 얻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찬양하고 즐기고 좋와하는 문화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나를 성찰하는 문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는것입니다. 성찰하면 당연히 겸손해집니다.

바리사이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와서 기도합니다. 세리는 자기의 공로를 자랑합니다. 나는 십일조도 바칩니다. 율법을 따라서 온전한 생활을 합니다. 부정하게 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십시오. 당당하게 하느님게 요구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내면의 죄와  본질은 숨기고 드러나는 것을 가지고 인정받고 그것으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구합니다. 기도할때 은밀히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기도를 합니다. (대개 예배에 대표기도를 합니다. 그때 기도 내용은 하느님게 드리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듯이 합니다.)

반면에 소위 죄인이라는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땅에 머리를 대고 기도합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소리도 크게 내지를 못하고 그저 가슴을 치며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애통해 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짧은 기도 밖에는 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만 해도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접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요?

 성당과 예배당의 차이를 저는 봅니다. 예배당은 회중이 공동으로 모여서 항상 북적거립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 대부분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개인적인 공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성당에는 대부분 작은 기도처나 묵상공간이 있습니다.(감실) 그곳에서 스스로 주님과 대화하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겁니다. 사실은 이것이 가장 은밀하면서 가장 정직한 자리이며 주님과 마주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자리입니다. 여럽 사람들 앞에 대중기도하면서 솔직하게 말할 없어요.   은밀한 주님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서 비로서 겸손한 성품을 찾을 있습니다. 두사람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누구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 인정을 받았는가? 묻습니다.  세리의 기도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기도는 오로지  하나입니다.”주여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아시니 불쌍히 안아 주세요 라는 나를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나를 경영하고 나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랑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기도해서 얻어냈다라고 하는 것은 교만한 겁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에도 은혜를 주시는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땅에 스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겸손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주인이시지만 그분은 겸손하십니다. 필요하면 세상을 위하여 땅으로 겸손히 내려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십니다. 사람마다 하느님에 대한 의견이 다르겠지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본질은 겸손일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을 보고 인간이 겸손을 배우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단히 가르치려고 합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특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데 열심을 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바리사이인 같은 교만이 세상을 혼란과 부정함으로 인도해 갑니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많이 빠져듭니다. 그리고 함께 침몰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열을 알아도 하나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몸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겸손함을 살고, 청빈함을 살고, 세속적인 것보다 하느님의 은혜를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고 나를 성찰하며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낯추면 높아지리라 말씀은 탈무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교훈입니다. 유대교인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궂이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이미 우리들의  상식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를 성찰하며 기도하십시오. 오늘 받은 축복과 은혜을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은혜와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자신에게 부끄러워 하십시오. 그래야 성숙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는 자랑하지 않아도 남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고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고 떠들면 은혜는 사라지고 교만이 되어 버립니다.

기억하세요. 하느님게서 받으신 기도가 누구의 기도인지? 어떤 태도의 기도인지를 기억하고 스스로 자기를 성찰하고 주님 앞에서 바르게 서는 태도를 배우고 익히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야를 살자  (0) 2019.02.26
고난을 이기는 기도  (0) 2019.02.26
감사하라  (0) 2019.02.26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9.02.26
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  (0) 2019.02.20

감사하라(시편 50:14-23)

오늘의 시편말씀

사람이 하느님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감사하는 마음 가운데 하느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저는 미국의 명절 감사절을 생각하기 보다는  여러분의 삶에서의 감사함을 찾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 가운데 은혜가 있고 감사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갑니다. 그만큼 감사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분의 삶에 감사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감사는 습관입니다.  감사할 아는 자녀는 훌륭하게 자랍니다.  그것이 자녀들을 성공한 인생으로 만듭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부모가 어떤말을하고 어떤 습관을 가지고 사느냐를 따라 똑같이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녀들을 원하십시니까? 감사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세요. 

수도원과 감옥은 매우 흡사합니다. 다르다면 감옥은 원하지 않아서 있는 것이고 수도원은 스스로 갖혀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하느님께 감사함으로 일생을 기도하며 사는 곳이고 감옥은 죄를 지었지만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수도원은 천국같다고 말하지만  감옥은 지옥같다고 말을 합니다. 결국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는 감사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매사에 불평을 하며 삽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분명히  행복을 누립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불평하는 사람은 은혜를 얻지 못하지만, 작은 일에도 감동받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경험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렇듯 신앙의 기본은 감사입니다.

남들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적은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감사를 느끼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도 고난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을 끼쁘게 하는 감사의 생활을 있습니까?

1, 원망을 하지 않는다.

사람의 체질은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가진 죄의 본성이 불만족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망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구원하셔서 광야로 갔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향해 가면서도 불평을 그치지 않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지만 이집트에서 먹던 부추와 마늘과 양파를 찾습니다. 하느님게서 기적으로 40년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먹이셨지만 그러한 기적적인 공급에 대해서 감사하기 보다는  끊입없이 불평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우리 세상을 보십시오.    온통 불만 투성이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통 불평이 많습니다. 하느님게서 세상의 모든것을 축복해서 주셨지만 하느님이 나에게 준것이 무엇인가?라고 불평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도  넘치는 것을 받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병의 권위자인 브렌드 박사는 고통을 만드신 하느님 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고통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신경이 죽어서 손을 뜨거운 곳에 넣어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몸은 고통을 느낍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고통을 느끼고 아픔을 느낄때 그것이 내가 살아있음으로 겪을 있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아픔이 있으면 그것은 치유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나의 눈으로 볼때는 불평이 되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때는  축복을 베풀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불평으로 삶을 죽이기 보다는 감사함으로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2, 환란중에 감사합니다.

환경이 좋고 될때는 누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에서 감사하는 것은 믿음으로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기에  감사를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여호사밧은 하느님을 섬기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민족인 모압과 암몬이 유대땅을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겪에  됩니다. 이때 왕은 모든 백성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 금식하며 부르짓기 시작합니다. 전쟁에 나갈때 찬양대를 앞세워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게서 이들을 도와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고  나라를 보존할 있었습니다. 먼저 기도와 감사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가난해서 신문을 팔며 공부를 했는데 한번은 열차에서 실험을 하다가 불을 내번하여 차장이 그를 열차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때 그는 귀를 다쳐서 장애인이 됩니다. 이후 에디슨은 고백하기를 자신의 귀에  딴소리 들리지 않아서 연구하는게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감사입니다. 어떤 환경도 하느님의 주권아래에 있으며 그러므로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우리는 능히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이겨 낼수 있음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3, 모든 일에 감사합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뜻입니다.”(살전5:16) 주님의 명령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챤의  기본 생활입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이와같은 현상이 반드시 일어나고,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사는 사람은 인생이  기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쁨은 기도로  응답하게 되고 기도로 충만한 삶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로 이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서도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아들을 잃고 고통을 겪었지만 회개하며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욥은 환경에 의하여 모든 재산을 잃고 가족도 잃는 불행 가운데 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함으로  예전보다 많은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감사는 하느님께  회개하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하는 세상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야 위무입니다. 왜냐하며 이것이 하느님게서 바라시는 우리를 향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기며 사는 것이 불행입니다. 하느니므이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느님의  일이 일어나고 은혜의 열매가 열립니다.

여러분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에는 절대로 기쁨과 축복의 열매가 없습니다. 부부간에 가족간에 이웃간에도 원망과 불평과 시기가 있으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행복하게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와 환경과 상황에서도 감사한 마음을 지키십시오. 사람을 보고 환경을 보고 자신을 보고 감사한것은 잠시이고 사라집니다.  반드시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더욱 풍성해지고 기쁨과 기도와 감사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아멘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을 이기는 기도  (0) 2019.02.26
감사한 자의 기도  (0) 2019.02.26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9.02.26
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  (0) 2019.02.20
제자가 되려면  (0) 2019.02.20

감동을 주는 사람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마음이 약해진 탓일 것이다.과거에 남자는 일생동안 번만 눈물을 보여야 한다고 강요 받아왔다. 그런데 말이 맞지 않는 같다.요즘들어 고국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울컥하여 눈물이 때가 많아졌다. 특별히 대통령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것이 연출이라해도 보기 좋다.그런데 진심이 느껴진다.언제부터인가 공직자들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흉악스러워졌다. 심지어 국민들은 돼지라는 막말까지 들어야 했다. 우리들이 주는 세금으로 풍요와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사는 자들의 오만함을 보면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 대통령이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받는다. 이유는 단 하나,사람대접을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위에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사람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짓누르고 있는지 모두가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갑을 관계이다. 대부분은 을의 자리에 있다. 모든 을의 사람들은 갑이 되기 위해 일생을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난다. 사실은 누구도 진정한 갑이 될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그런데도 어설픈 갑이라도 되보려는 것은 사람의 욕심일 뿐이다. 이런 삭막한 시대에 대통령이 낮은 자세로 섬김의 모습을 보이니 국민들이 감동을 받는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는 자신의 온 가족을 데리고 갑의 최고봉에 올라 앉아 사람들에게 온갖 실망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근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케 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감동시킬 수 없기에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일생을 의미있게 잘사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가정에서 서로에게 감동을 준다면 부부와 자녀관계는 좋을 밖에 없을 이다. 우리 세대만해도 감동을 보고 자라지 못해서 마음은 있지만 행동으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때 마다 많이 아쉽고 속이 상한다. 그때 말을 못하고,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그때 사람에게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와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기억속에 남아있다. 교육이 무엇인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래전 뉴질랜드에서 사제품을 받을 그곳 동료사제가 손수 바느질해서 만들어준 빨간색 제의용 스톨을 사용할 때마다 그 분의 마음을 되새기게 된다. 어느날은 시계줄을 바꾸려고 갔는데,볼품없이 시계를 보고 주인께서 같은 것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을때 의아했지만 진심을 알고 새것으로 교환받은 적이 있다. 그리 비싼 시계가 아니어서 부담은 적었지만 감사함으로 시계를 볼때마다 그분을 위해서 마음으로 기도할 밖에 없었던 기억도 있다. 감동이란 살아야 하는지 가치를 알게 주는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사는 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있을까? 내가 진심을 다하여 상대방이 감동을 받을 있다면 사람의 가치를 표현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도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는 말씀을 실천함으로 온 세상을 감동시키셨다.부디 겸손히 섬기는 사람들로 인하여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살기좋은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한 자의 기도  (0) 2019.02.26
감사하라  (0) 2019.02.26
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  (0) 2019.02.20
제자가 되려면  (0) 2019.02.20
제성일  (0) 2019.02.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