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하며 산다는 것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일생을 두고 가장 중요하게 행해야 할 것을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일까요?공자는 “그것은 서()”라고 답을 했다.

‘용서할 서()’ 자, 글자를 풀어 보면 ‘같을 여()’ 자에 ‘마음 심()’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함께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서()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한테 안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말씀으로 서로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 

 매주일 열린예배를 드린다. 젊은 미국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한다. 많은 아이들이 모이기에 자칫 소란스러워져서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을 방해할 있을 같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설교시간에도 아이들은 앞에 나와  조용히 듣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얼마나 다루는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몸으로 가르친다. 자녀와 내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태도를 갖는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자녀가 귀한 시대이다.그만큼 아이들이 소중하다. 그렇다고 남에게 자식을 나처럼 달라는 것은 무리이다. 엄마가 묻는다.” 사람들이 아이를 예뻐하지 않지요?” 딱한 일이다. 타인을 방해하고 무례해도 아이 부모는 무조건  관대하다. 그래서 아이가 사랑받도록 먼저 예의를 가르치세요라고 권고해 주었다. 남들은 괴롭다. 앞에서는 웃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현실을 부모가 전혀 모른다. 아이 보다도 부모가 문제이다. 어른은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분별을 배울수 없다.   자녀라도 무엇을 잘못하고 남에게 불편을 주는지 알게 하는것이 현명한 어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남을 배려하라는 말에 인색한것 같다. 혼란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온 탓일까? 서로에 대한 배려보다는  어떻게든 이기고 보자는 독자 생존력만 배우고 가르치는 같다. 고등학교시절 어느 선생님께서 너희들 공부 안하면 저런  사람처럼 낙오자가 된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배려를 교육현장에서도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다. “나만 편하고 잘되면 되지 남들은 상관없다.”라는 생각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이웃은 나의 거울이다.  살면서 남을 위한 배려를 귀하게 여기고 칭찬해 주는 일들을 주위에서 본다. 수년전 켄터키 시골의 여학생이 불편하게 혼자사는 할머니의  차를 수년동안 세차를 해주고 돌보아준 때문에 예일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보상을 바라고 일이 아니었지만, 남을 배려하는 사람을 사회가 인정 해준 것이다. 자녀들에게 배려와 봉사를 가르치고 더불어 살기를 교육하기 보다는 성적위주의 교육에만 올인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교육에 희망이 없어서 이민을 왔다는 말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먼저 어른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돕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자녀들도 이것을 배우며 성장하게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것이 배려이다. 내것이 귀하면 남의 것도 귀한법이다.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으려면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닐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배려를 가르치고 실천하자. 그러면 세상은 좀더 평안해 것이다.  


'목회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  (0) 2018.08.14
분별을 잘하자  (0) 2018.08.14
돌들이 외치리라  (0) 2018.08.14
더불어 숲을 이루자  (0) 2018.08.14
교회개혁 500주년의 의미  (0) 2018.08.14

돌들이 외치리라



미국 전역에서  수도 워싱턴으로 사람들이 몰려 들었다. “March for Our Lives”라는 이름으로 국민이 총기규제와 생명존중과 인권에 대한 문제를 가지고 시민들이 일어난 것이다.  더이상 국민의 생명을  지키지 못하는 무능한 정치집단에 대한  압력을 위해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시작된 것이다.  총기로 인하여 어린 학생들이 매번  희생되어도 정치인들은 자기들의 이익만을 지키고 아무런  조치를 하지 않고 있다. 아마도 그들 자녀들은 대부분 안전한 사립학교에 다니고 있을 것이다.  이런 무능한  정치인과 정부를  향해  분노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항의를 표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도  시민들이 일어나 무능한  대통령과  정부를 바꾸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시민혁명이라 한다. 더이상  국민을 무시하고 자기들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정부와 정치인들을 국민들은 좌시하지  않는 시민주권 의식이  살아난 것이다.

미국 전역에서  버스와 항공기를 이용해서  모였고, 내셔널 성공회 대성당에서는  이들을 위해 숙식을 제공하겠다고 일찍이 공표하며 교회의 적극적인 참여를 독려하였다. 성경에도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일어나 외칠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며, 하느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귀한 존재라는 사실만으로 인간의 가치가 영원히 보존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이라하면 그에 맞는 생각과 상식과 존재로써의  책임이 있어야 한다. 자기만을 위한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은 세상을 자연법에 따라 더불어 줄알고 때로는 다른 피조물들을 배려하며 상생하는 동물들 보다도 못한 존재로 추락할 있다. 우리의 환경을 보라, 인간의 이기적이고 무지한 힘과 능력으로 얼마나 많은 자연과 질서와 정의를 파괴하고 있는가? 이들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는 자체가 부끄럽다. 뻔한 해법을 두고 총기문제를 해결 못하는  정부, 이러한 결과로  민초들의 외침과 저항이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것이다. 이대로는 인간답게 살수 없고 , 공동체 모두가  멸망한다는  절실함에서  시민운동은 시작된다. 학교에서 일어나는 총기사건의 희생자들이 내가 아니어서 안심이 되는가? 이민자들을 향한  인권의 불이익에 대해서,  나는 시민권자니  안심이라고  생각하는가?  인종과 소수자들을 향한 불이익과 차별 정책등  미국 사회의 문제는 나와 상관없다라고 방관하고 있는가? 우리가  잠잠히 있으니   돌들이 일어나 외칠 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문제는 모두 나의 문제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권리와 책임에 대해서  분명한 자각을 해야 한다. 그것들은 나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내가 참여하는 공동체에 대한 의무이다. 따라서 내가 움직이고 내가 나서야 변화가 일어난다. 참여가 없는 사회는  절대로 변화할 없다.  공동체적인 사고가 중요하다. 서로가 유기적인 관계를 가지고 상생의 정신으로  바라볼줄 아는 지혜와 행동이 필요하다. 이것은 우리의 일이요, 우리가 함께 바꾸어  가야할 것이라는 공동체의식을 가지고 살아갈   좀더 나은 세상을 꿈꿀수 있는 것이다. 이런 전국적인  돌들의 외침에 나가보면 우리 한인들의 참여가 너무나 저조하여 안타깝다. 대부분  생계에 매여서 어렵다고 하지만, 주말마다 골프장과  친교모임에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그런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아직도 미국 땅에서 이방인 노릇만하며  주인으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면  대접받으며 살기에는  부족하다.어느분이 말하기를 자기는 몇십년을 살았지만 이태원에 사는 같다고 한다. 공동체와 소통을 하지 않고 구경만하고 사니 마음이 어떻겠는가? 몸은 미국에 있지만 마음은 한국에 있으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행복이란?  몸과 마음이 일치되어 느끼는 것이다. 정신적으로  영적으로  육신적으로  건강한  삶을 누리고  행복하려면  바르게 보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삶의 태도일것이라고 본다.   


'목회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분별을 잘하자  (0) 2018.08.14
배려하며 산다는 것  (0) 2018.08.14
더불어 숲을 이루자  (0) 2018.08.14
교회개혁 500주년의 의미  (0) 2018.08.14
관용이 그리운 사회  (0) 2018.08.14

더불어 숲을 이루자


미국교회에서 사목을 담당하며  이민자와 난민들을 위한 일들을 함께 하고 있다.  얼마전 신문에서 미국내 한국인들의 정치, 사회 참여도가  다른 이민자들보다 현저하게 낫다는 기사를 보았다. 그만큼 미국에서 한인들의 존재감이 떨어진다는 말도 된다.  이것은 오늘의 일이 아니다. 이미 오래 전부터 들어 이야기이고 모두가 공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똑같은 말을 되풀이하고 있는 것은 세월이 흘러도 우리의 의식이 변화하지 않고 있다는 반증일뿐이다. 많은 교민들을 만나보면 미국에서 오랜 세월을 살았음에도 마음은 고향에 두고 있다. 지금은 어쩔 없지만 기회가 되면 언제든 나라를 찾아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크다. 이것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내고향 산천을 그리워하고 그곳을 향한 귀향의 꿈은 당연하다. 그리고 때가 되면 돌아갈수도 있을 것이다. 꿈마저 없이 어떻게 힘든이민의 삶을 이겨낼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여기에 있다. 가족, 동포가 살고있는 이곳에서 우리가 할수 있는 역할과 책임은 감당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자녀들은 이곳에서 성장해서 사회의 일원으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에게는 1세대와 달리  미국이 고향이 있다. 그러니 여기 사는 우리들이  이방인으로만 살수는 없지 않은가? 살았으면 산만큼 역할을 해야 하고 의무와 책임도 있지 않은가? 

미국에서 반이민자 정서가 일어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나그네들에게는 주인의식이 없다. 잠시 살다가면 그만이다. 주인과 같은 생각으로 참여하고 의무를 다하는 관계속에서 신뢰는 쌓여간다.  그런데 여기를 잠시 이용하고 돌아갈 생각을 하는 사람들에게 헌신을 기대할 없다면 땅을 성실하게 가꾸려는 사람들에게 불만이 없을 수없다.   요즘 한국 사회에도 외국인 노동자가 증가하면서 사회적 갈등이 생겨나고 있다. 외국인들이 방문해서 자기의 이익만 취하고 돌아가겠다고 생각한다면 나그네를 향한 애정과 친밀함을 얼마나 기대할 있을까? 이런 갈등이 없는 것이 좋은 사회일 것이다. 따라서 이런 제안을 본다. 미국사회에 좀더 적극적으로  참여하자. 그리고  우리 자녀들이 자라고,우리 이웃들이 함께해서 살고 있는것을  진심으로 감사하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리고 감사함을 적극적으로 사회에 표현할 필요가 있다.  작게는 커뮤니티 모임에 참여하여 우리가 이웃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시간을 내어 지역행사를 방문하고 작은 일에 봉사자로 참여하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생업과 언어문제가 있지만 다양한 방법으로 참여할 있고, 돈으로 후원하는 방법도 있다.   나라에서도 이사를 가면 낯선 이웃들과 친해지기 위하여 떡을 돌리고 동네 모임에 나가서 얼굴을 알리고 시간을 들여 노력해야  살기가 편해진다. 하물며 이국 땅에서는 더많은 노력이 요구되지 않겠는가? 디아스포라 유대인 공동체는 다른 민족과 더불어 살기 위해 가족관계를 맺고 그들의 문화와 삶을 이해하고 친구가 되기 위해, 오랜 노력을 통해서 인정을 받았고 다른 나라에서 여러분야의 지도자가 있었다. 자기가 사는 곳을 것으로 만들어 살아 내는 지혜를 발휘한 것이다. 우리에게도 이러한 지혜가 필요하다. 우리의 이웃들을 찾아보고, 다양한  모임에 가보자. 그리고  주위에 있는 다양한 미국교회들도 방문해 보자.미국에는 한인들이 경험하지 못한 특별한 교회들과 커뮤니티들이 많다. 그들은 모여서 어떤 일을 하고 어떤 관계들을 갖고 사는지 알아보면 좋겠다. 때로는 여러분을 기다리는 이웃도 만날 있을 것이다. 대부분 이민자가 영어를 하리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우리의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함께 이웃이 되어 이나라의 가치를 인정하고 함께 하려는 마음과 용기가 있으면 누구든지 환영받을 것이다. 열린 마음으로 사회의 주인처럼  살아보는 것이 이민을 사는 재미가 아닐까? .

지금 트럼프는 극단적으로 누가 우리의 친구이고 적인지를 구분하는 갈등 구조를 만들어 불안한 사회를 조장하고 있다. 잘못 쏘아진 화살이 사회적 약자, 이민자, 난민들에게 날아들 가능성이 높아지고 있다. 지금은 이민자들이 미국에서의 갈등과 차별을 국복하기 위한 지혜를 모아야 때가 온것 같다. 이민자, 난민들에 대한 편견이 있다면 그것을 바꾸어야 한다. 이럴때 일수록  앞에 나서서 함께 하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에게 미국 사회는 기회를 허락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끼리만 모인 섬을 벗어나 사회의 다양함을 이해하고,  참여하는 이민자들을 보고 이웃들은 존중하고 지켜줄 것이라고 믿는다. 하나로는 부족하지만 더불어 숲을 이루어 아름다운 자연을 만들어 내듯이 모두의 희망이 모여 살만한 세상을 이루어가기를 바란다


'목회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배려하며 산다는 것  (0) 2018.08.14
돌들이 외치리라  (0) 2018.08.14
교회개혁 500주년의 의미  (0) 2018.08.14
관용이 그리운 사회  (0) 2018.08.14
고해를 통해 새롭게  (0) 2018.08.14

교회개혁 500주년의 의미


한햇 동안 기독교 종교개혁 500주년이라 하여 교회는 다양한 행사를 통해 의미를 기념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교회개혁이라고 해야 한다. 내용을 보면 교회의 반성과 회한을 담고 있고, 교회의 사명을 확인하고 회복할 있는 계기로 삼으려 한다.그러나 이것을 기념만 해서는 안될 일이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을 제대로 이끌지 못하고, 지적을 당하는 현실에서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지 못한다면 교회개혁의 의미는 없을 것이다.

1517 로마 카톨릭교회가 교회답지 못한 것을 보고 마틴루터 사제는 권력을 가지고 세속의 길을 가고 있는 교회앞에 정신차리라고 혁명의 멧세지를 던진다. 이것은 목숨을 행동이었고 루터의 교회혁명으로 개신교회가 탄생하였다. 종교개혁의 시작은 예수로 부터 찾을수 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자신의 생명을 바치지 않았다면 왜곡된 종교로 부터 희망의 빛을 밝히지 못했을 것이다. 역사는 교회가 욕심과 권력을 누리 돈을 축적할 때 반드시 타락 한다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겸손하게 이웃을 섬기고 사랑을 나누면 그곳에 평화가 세워지는 것을 알수있다. 이러한 일은 지금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지 않은가?

중세교회는 절대권력으로 민중을 지배했다. 그리하여 사랑과 겸손으로 사람을 섬기라고 하는 성서의 가르침을 잃어버렸다. 스스로 교만과 탐욕에 침몰해 버린 것이다. 민중은 교회를 통해서 하느님을 만날수 없었고, 평화의 복음을 들을 없었다. 이런 암울한 시기에도 희망의 불꽃은 교회에 살아있었다. 교회의 세속화를 보고 일단의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되찾고, 교회의 본질을 회복하기 위해 신앙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세속화 되어가는 교회안에서 영성 회복과 믿음의 본질을 찾기 위한 운동이 수도 공동체라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이것이 교회를 일깨우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교회가 순수한 공동체를 보고 다시 배우는 것이다. 따라서 교회회복 운동 루터 이전에도 지속적으로 있었던 것이다. 사실 교회는 완전하지 않고 불안하다. 그래서 깨어서 근본을 지키려는 사람들이 늘 함께 하였. 교회는사람이다. 따라서 교회는 그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할수 있다. 우리가 사는 사회를 비추어 준다.  구교,신교를 비교하며 비난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든 교회는 같은 길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다. 흘러가야 한다. 변화의 물결을 받아들이는 포용력이 있어야 한다. 종교는 시대를 앞서보고 세상에 희망을 제시해 줄수 있어야 한다. 시대적 불안을 거두고 모두 더불어 살수 있는 삶으로 인도해 가야 한다. 교회는 변화하는 세상 가운데 사람을 위하여 사람답게 살아갈수 있도록 돕고 살아가는 일이다. 그러나 교회가 시대를 선도하지 못하고 과거의 영광에 발목이 잡혀서 때의 호시절을 그리워하며 되돌아 가려고 하는 같다. 교회도 역사를 통해 배워 가야 한다. 시대의 어려움과 세대의 고난을 함께 짊어지고 하늘과 땅을 향해서 나아가는 교회가 되도록 깨어있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개혁의 정신이라고 본다.






'목회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돌들이 외치리라  (0) 2018.08.14
더불어 숲을 이루자  (0) 2018.08.14
관용이 그리운 사회  (0) 2018.08.14
고해를 통해 새롭게  (0) 2018.08.14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8.08.14

관용이 그리운 사회


가을이 좋은것은 하늘이 깊고 넓은 계절이기 때문이다.어려서는 하늘을 바라보며 꿈을 키우고 살았는데, 어른이 될수록  땅만 보고 하늘을 보지 않는다.  하늘이 좋은 것은 바람을 타고 거침없이 흘러가는 구름이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인생은 그렇게 살아야 한다.  피조물들이  제각기  모습을 드러내고 자유롭게 어울리는 것이 평화로운 것이다. 하늘처럼 모든 것을 품고 사는 것이  관용이다. 요즘 세상이 너무 각박하다.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 마음에 드는 것만 인정하려고 한다. 인종문제나 계층간의 갈등을 보아도 그렇고, 믿는것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배척을 한다. 교회에  여성사제가  새로 취임하였다. 혹자는 여자가 무슨 사제가 되느냐? 말한다. 아직도 여성에 대한 고정관념과 불관용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일들은 사회에 다반사로 나타난다. 심지어 자신도 약자이고 소수민이면서, 다른 이들을 차별하고 인정하지 않는다. 지금 미국사회가  백인들만 주류로 인정하려고 하는 때문에 혼란스러운것 아닌가?  세상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땅에 사는 모든 사람이 주인이고 공동책임을 가지고 산다. 뉴질랜드의 식민지 역사는 특별하다. 뉴질랜드의 마오리 원주민은 영국왕실과  1840년에 와이탕기 조약을 맺음으로 토지는 마오리족이 소유하고 통치는 영국과 함께 한다는 조약을 맺었다. 세계사에 유일하게 영국과 원주민이 조약을 통해서 나라를 건국을  했다는  자부심이 있다.  그래서  뉴질랜드는 백인 이주민과 마오리 원주민 사이에 조화로운 평화가 이루어졌다.  마오리문화와 전통은 뉴질랜드에서  상당히 존중받고 있고, 뉴질랜드인은 대부분 마오리 말을 할줄 안다. 관용의 정신을 통해서 이루어진 평화를 모두가 함께 누리는 것이다. 이민자들로  세워진 미국에 필요한 것도 이러한  관용의 정신이다. 미국을 백인들만의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의 기득권은 인정하지만,  그것으로 소수민과 약자들을 핍박해서는 안된다. 사실 흑인들에게 아프리칸 아메리칸이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렇다면 백인은 유러피안 아메리칸이라고 해야 맞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렇게 부르지 않는다. 미국에서 몇세대를   아시안도 당연히 아메리칸으로  동등하게 불려지고 받아들여져야 한다. 명칭하나에도 관용의 정신이 부족한것을 알수 있다. 미국에서 불체자의 자녀 88만명이  쫏겨날 운명에 처해졌다. 가운데 한인도 만명은 족히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매우 비인간적이며 잔인한 일이다. 희망을 안고 자녀들은 부모를 따라 땅에 살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미국인으로 성장하여 몇십년을 살았다. 기득권자들만을 위한 법으로 이민자녀들의 인권과 생존을 위협하는 것은 하늘이 노할 일이다. 동물에 대한 생존권을 그렇게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미국이 인간에 대한 배려가 이렇게 없으면서, 세상 인권에 대해서 말할 자격이 있는가? 어려운 사람이 어려운 사람을 돕는 것이 마땅한 일이다. 남의 일이라  방관하지 말자, 소수민과 이민자들의 권리를 찾한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기를 바란다. 메릴랜드 성공회 교구에서는 919 오후 530분에 볼티모어 대성당에서 DACA 지키기 위한 기도와 집회를 갖는다. 우리들의 문제이다.   참여도 하여 우리도 사회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알리고 소수민들의 아픔을 함께 공유해야 한다. 우리 한인사회가 관용의 정신을 세우는데 일조하는 공동체가 되어지기를 바란다.


'목회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불어 숲을 이루자  (0) 2018.08.14
교회개혁 500주년의 의미  (0) 2018.08.14
고해를 통해 새롭게  (0) 2018.08.14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8.08.14
가난한 성 프란시스의 교훈  (0) 2018.08.14

고해를 통해 새롭게

고해성사(告解聖事) 신자가 자신이 지은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사제를 통해 하느님께 죄를 고백하고  용서의 은총을  구하는  구교회 전통의 성사이다. 성탄절이나 부활절기에 고해성사를 통해서 회개의 시간을 갖는다. 인간인 사제에게 자기의 죄를 고백하는 것은 대단한 결단이 필요하다. 이런 고백을 하고  다시 같은 죄를 짓기는 어렵다. 요즘 우리 조국 대한민국을 보면서 고해성사가 생각났다. 우리 사회는 진정성있는 고해성사를 적이 없다. 그동안 국민에게 죄를 ()하고 용서받아야 일들이 얼마나 많았는가? 무고한 민중이 희생당하고 억울하게 죽어간 일들이 우리 현대사에 그대로 드러나 있지않은가? 온갖 부정,부패가 드러나도 자기 잘못이 아니라고 회피하고 결국에는 역사의 판단에 맡기겠다는 후안무치(厚顔無恥) 말을 한다. 죄와 불의를 보고 하느님의 정의를 외쳐야 대형교회가 불법세습으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변명하는 꼴을 보면서 그들은 분명 하느님을 이용하는 거짓말쟁이가 분명하다. 참으로 하늘이 노할 일이다.

자기의 인생을 하느님 앞에서  되돌아 볼때 허물이 없는 사람이 어디있는가? 그래서 사람은 서로의 한계와 잘못을 알기에 긍휼의 마음으로 가능하면 용서하고 사랑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고백과 용서에는  반드시 전제가 있다. 진실한 반성과 회개가 있어야 한다. 다시는 같은 죄를 짓지 않겠다는 선언이 동반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용서할 수 없다.

초대교회에서는 공동고백을 했다. 공동체 회중이 모인 곳에서 자기의 죄를 고백하고 회중은 사람을 용서해 주는 과정을 통해 신실한 공동체를 유지하였다. 건강한 사회, 공동체, 가정은 서로의 진정성 있는 고백과 용서로 시작된다. 누구나 살다보면 잘못하고 죄짓는 일들이 생긴다. 이것을 보고 누군가는 나서서 잘못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성사(聖事)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예수 십자가의 의미도 그와 같은 것이다. 세상의 죄를  하느님께 대신 고백하고 용서를 구한 것이다.

역사나 인생이나 매듭은 풀어야 한다. 매듭을 풀지않으면 죄악은 끝나지 않는다. 매듭이 풀려야 소통의 문이 열리고 과거의 수렁으로 부터 헤어 나올수 있는 길이 보이는 것이다.

행복한 부부는 서로의 잘못을 지적하기 보다는 고백하고 용서하며 사는 부부이다. 자녀나 이웃이 잘못을 해도 그들이 용서를 구하면 지난 것에 대해 다시 묻지 않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지혜이다. 진정으로 고백하면 용서할줄 아는 사람이 좋은 인격자이다.

공자의 제자 자로는 의를 보면 반드시 행하는 것으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었다. 의롭게 살기 위해 애쓰는 것을 보고 스승인 공자도 염려할 정도였다. 그만큼 자신을 세우고 닦는 일이 쉽지 않다. 신앙생활은 자신을 반성하고 정화하는 좋은 길이다. 자기의 죄와 허물을 덮고, 세상을 속이며 사는  사람들이 복된 인간상은 아닌것이다. 고해성사는 자신을 위해서 하는 것이다. 내가 다시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에서, 나의 허물을 스스로 벗기는 진솔한 행위이다. 우리 민족이 살고 통일의 역사가 일어나고, 분열의 역사를 끝내려면 민족적인 고해성사가 필요하다. 모두가 고해를 통해 진정한 자유를 누리기를 바래본다.

 


'목회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불어 숲을 이루자  (0) 2018.08.14
교회개혁 500주년의 의미  (0) 2018.08.14
관용이 그리운 사회  (0) 2018.08.14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8.08.14
가난한 성 프란시스의 교훈  (0) 2018.08.14

감동을 주는 사람

21세기는 감성적인 사람이 성공한다.기계적인 사람보다는 감성이 풍부한 사람이  좀더 창의적이고 세상에 감동을 줄수있는 일을 만들어 수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세상은 무언가로 부터 감동받고 싶어한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많이 건조해졌다. 감동받을 보다는 감정이 상할 일들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상식이 난무하고, 기대치는 낮아지고, 사람은 제대로된 대접을 못받고 있다. 지금 미국의 상황도 가관이다. 나라의 대통령 언론과 국민들을 상대로 장터에서 싸우듯이 언쟁과 싸움을 연일 벌이고 있다. 국민은 싫다는데 억지로 밀어 부치고 거짓말과 폭언을 공공연히 한다. 이렇게 하면서 국민의 신뢰를 얻을 있을까? 리더는 사람을 감동시키는 사람이어야 한다. 특히 국가의 대통령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국민에게 희망의 멧세지를 전하는 감동의 전도사여야 한다. 그래서 한마디도 신중하게 생각하며 해야 한다. 국민을 존중하고 섬기는 것이 대통령이 갖추어야 당연한 덕목인데, 많은 국민들이 느끼는 홀대와 핍박을 생각하면 마음이 불편하다. 누구도 인간을 억압하거나 지배할 자격이 없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사람이 하느님을 닮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만큼 귀하다는 뜻이다. 사람이 사람에게 주어야할 것은 상처와 분노가 아니라 감동이어야 한다. 감동의 시작은 내가 받고 싶은 만큼 남에게 해주는 것이다. 사실 부부 사이에도 서로 존중하는 마음으로 대하고 상대에게 최선을 한다면  행복한 가정은 자연스럽게 이루어 것이다. 사실 예수와 모든 성현들의 가르침은 우리들에게 세상에 감동을 주는 삶을 살라는 것이다. 그러면 세상은 천국같이 것이 분명하다. 만나는 사람마다 사는 이야기를 듣다보면 상처받은 것이 너무 많다.그래서 믿지 못하는 삶을 살고 있다. 그들의 인생에서 감동의 시기는 전혀 없었던 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우리에게는 감동의 시간들이 분명히 있다. 다만 그것을 마음에 새겨두지 않고 있을 뿐이다. 옛말에도 감사는 물에 새기고 원망은 돌에 새긴다고 하지 않던가? 이것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오히려 원망을 물에 새겨서 흘려버리고 감사를 돌에 새겨서 볼수 있다면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행복할 것인가?

나는 일년에 한번은 가족여행을 한다. 이때 만큼은 가장으로서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한다. 먼저 아내에게 모든 선택권을 준다. 준비에서 부터 모든 것을 가족들이 원하는대로 한다. 그리고 그동안 소흘했던 가족에 대한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함께 여행하는 동안 가족이 기억 될만한 감동을 만드는 것이 목표이다. 이것으로 우리 가족은 일년 동안의 행복에너지를 충전한다. 돈으로 하는 여행이 아니라 가족애를 가지고 하는 여행이기에 그만큼 효과가 크다.  감동의 삶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 누군가의 헌신과 배려와 관심이 다른 사람에게는 감동이 될수 있다. 사람은 누구든지 한번의 인생을 공평하게 선물로 받았다. 귀한 삶을 통해서 어떤 감동의 드라마를 연출할 것인지는 주인공인 우리들이 만들어 가야 것이다. 감동할 준비가 되었다면 그것을 행하라

'목회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불어 숲을 이루자  (0) 2018.08.14
교회개혁 500주년의 의미  (0) 2018.08.14
관용이 그리운 사회  (0) 2018.08.14
고해를 통해 새롭게  (0) 2018.08.14
가난한 성 프란시스의 교훈  (0) 2018.08.14

가난한 성인 프란시스의 교훈


104일은   프란시스 기념일이다. 실제로 프란시스는 ,구교회에서 가장 존경받는 인물이다. 예수의 삶을 가장 가깝게 사신 분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1182년에 이태리에서 태어났다. 부유한 부모에게서 성장했지만 가난한 세상을 만나고 부터 그의 인생은 바뀌었다. 스스로 부유한 삶을 포기하고, 가난을 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공동체를 이루어  살았다. 세속적인 욕심만 추구하는 세상을 향해, 이것은 아니라고 거부하고, 용기와 실천을 몸으로 살았던 분이 프란시스다. 나는 그의 삶과 정신에 공감하는 프란시스칸이다. 뜻을 같이 하는 이들과 함께 정기적으로 만나고 서로를 격려하는 공동체를 하고 있다.

 21세기의  화두는 빈부의 문제이다. 사람을 만나면 하는말은 경제와 이야기다. 누구에게나 가장 환영받는 선물은 현금이다. 그만큼 우리 모두는 돈없이 살수 없는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다.  모든것이 돈으로 평가된다. 물질의 욕망으로 부터 자유로운 사람을 보면 그를 기인이라고 할것이다.  이런 세상을 향해서 프란시스는가난이라는 화두를 던졌다. 세상과 그의 부모는 그를 미쳤다고 했다.  욕망으로 부터 벗어나서 어느정도의 결핍을 사는 것이 오히려 행복할수 있지 않을까?  요즘 시대의 상식으로는 말도 안되는 같지만,  그의 정신에 공감하고 따르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만큼 세상을 살기가 쉽지않은 것이다. 한국 노숙자보호센터에서 상담을 할때였다. 이들을 3개월안에 사회에 복귀시키지 않으면  노숙자로 평생 머물수도 있다고 한다. 가진것 없이 살아보니 오히려 그것이 편안해서 복잡한 경쟁사회로 돌아가기를 거부한다는 것이다. 어쩌면 정신없이, 바쁘게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고 이들이 불쌍하다고 할지도 모르겠다. 사실 예수는 노숙자였다. 집도 잠잘곳도 없었고 가진것도 없다고 했다. 그를 따르는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살라고 가르쳤고,  심지어 추종자들에게는 가진것을 포기하고 따르라고 했다.  이것이 예수의 실천적 삶이었다. 그런 예수에게  요즘 사람들이 예수의 이름으로 부자가 되고 성공시켜 달라고  기도를 하지만, 기도를 예수께서 얼마나 들어줄수 있을지 궁금한 일이다. 프란시스는 예수처럼 가난을  살았다. 세상은 그를 탁발수도사라고 불렀다. 세상이 베풀어 주는대로 모든것을 은혜로 여기며 살았다.  이런 프란시스를 사람들이 성인으로 추대해서 부러워하고, 기념 한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주위를 보면, 어려운 사람은 백불을 걱정한다. 그러나 부자는 만불을 걱정하며 산다. 누구의 걱정과 근심의 무게가 크겠는가?  그러니 너무 큰것에 집착하지 말아라, 그것을 누리기 위한 근심이 커지기 때문이다. 우리 주위에는 스스로  단순한 삶을 통해서 행복을 누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부족한대로 기쁨을 누리고, 작은 것에도 감사하는 삶을 산다. 인생의 가치는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미국은 지나치게 소비를 조장하는 물질만능사회이다. 유혹에 빠지면 평생 돈만 바라보다 많은 것을 놓치고 살수도 있다. 욕심을 부리는 것이 만악의 근원이라 했으니  소박하고 조금은 가난한 마음으로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지혜일 것이다.  가정과 사회의 평화와 행복을 돈으로는 살수 없다. 깊은 가을을 맞이하여 인생을 행복하게 살기위해 프란시스의 평화의 기도를 마음 깊이 담아보기를 바란다


'목회자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더불어 숲을 이루자  (0) 2018.08.14
교회개혁 500주년의 의미  (0) 2018.08.14
관용이 그리운 사회  (0) 2018.08.14
고해를 통해 새롭게  (0) 2018.08.14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8.08.14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