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종주의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하여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장에  주교들과 사제들과 이웃 교회의 성직자들이 길에 나와 손을 맞잡고 이들을 막아서는 모습이 메스컴에 등장하는 보면서, 이것이 평화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당연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나만 안전하고 복받고 살면 뭐하는가? 불의를 막지 않고, 이웃이 겪는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교회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 미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양심을 가지고  행동만해도 이같은 비극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땅에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차별하는 극단적인 혐오집단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회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종주의 미국 대통령이 수치스럽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남에게 말하는 미국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인종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인간을 피부색과 문화, 종교, 사회적인 분류를 통해서 인간을 나누고 편견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 이것으로 부터 차별이 생기고 인간에 대한 편견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종주의에 대한 자각이 없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문제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들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이번 기회에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대대로 신실한 기독교 집안의 여자가  뜻을 품고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났다. 그녀의 열정은 아프리카 현지에서 인정을 받았고, 나중에는 현지 남성을 만나 결혼까지 하여  남편은 목사가 되고, 여인은 성공적인 선교 목적을 이루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들이 자녀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선교는 좋지만 결혼은 안된다는 인종주의 때문이었다. 결국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면서도 인종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인종갈등도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는 온갖 차별들로 인하여 갈등하고 있다. 사람사는 어디를 가도 텃세가 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정착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분들에게 텃세를 인정하고 인내하며 그들에게 닥아 가라고 충고한다. 어디를 가나 텃세로 차별을 받는 것이 세상이다.  요즘 도시인들의 귀농이 늘어나면서 농촌도 이방인과의  갈등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사람이 사는 모든곳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조금만 달라도 견디지 못하고 공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한때 켄터키의 보수적인 백인들의 작은타운에서 살았다. 식당에 가면  외계인을 대하듯 나를 신기하게 주시하는 백인들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평생 자기 동네를 벗어나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  이들을 보수적인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같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람과  인종에 대해서 경계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단지 내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우리들은 한국에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인종주의라는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문제를 보고 답을 찾는것이 쉽지않다. 이러한 미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것인가?  우리는 인종주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시점에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가까이 닥아가서 친구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인들이 인종주의 말들을 하면서 상대를 폄하하는 말을 들으면 불편하다. 그들을 상대로 먹고 살고 있으면서 그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보면서 얻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와 많이 다르지만 그들도 같은 사람이다. 인종주의 갈등으로 부터 해방되려면 우리 스스로 편견을  버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진심있는 사랑의 마음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이민자들과 소수민들이 있음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미국민에게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세상의 텃세를 어느정도 감당할 용기와 더불어, 내가 사는 사회 공동체의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들의 희생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이것이 인종주의를 완화시키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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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기억하라


지금은 사순절이라고 해서 부활절까지 40일간 자기를 돌아보고 수련하는 시기로 삼고 있다. 사순절 시작 첫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해서 머리에 재를 바르며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축복기도를  받는다. 그날은 많은 미국인들이 이마에 시커먼 재를 바르고 하루 종일 돌아 다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자기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나도 그날 길에 나가 사람들에게 직접 재를 발라주고 축복을 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와 자기에게 이런 축복의 기회를 준것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였다.

요즘 처럼 삶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돌아 볼 시간이 많지 않다. 사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허상의 현실을 쫓아 무작정 뛰어가는 삶이 너무나 많다. 정작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주인처럼 살기 보다는 일용품 처럼 가볍게 소모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인생을 품위있게 살수는 없을까? 사람의 가치나 인생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진것 같아서 아쉽다 .

플로리다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학살로 또다시 17명의 희생자를 내었지만 이 나라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은 총기 규제를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급기야 청소년들이  일어나 이들에게  항의하고 있다. 세속의 특권층으로 살고있는 그들에게 매일 죽어가는 민중들의 생명은 전혀 관심밖의 일인 것이다.오로지 정치 자금을 받아 권력을 유지하고 총기단체의 이익과 사업을 보호하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회적 불의와 악행은 결국 인간에 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이 없는 결과이므로 크게 놀랄것이 없다.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과 자기의 행동을 반추하고 그것을 반성할 줄 아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탈을 쓴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에서 온갖 괴물들이 돈과 권력을 갖고 세상을 괴롭히는 시대를 살기에 백성들은 심히 고생이 크다. 정말 이들에게인생아 기억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이 절실하다.

누구나 괴물이 되기 쉬운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 할수 있는 유혹들이 너무 많다.스스로  사람답게 인격을 지키며 사는것이 그만큼 어려운 사회이다. 정상적인 이성과 판단을 갖고 상식적인 결정을 하고 산다면 세상이 이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사람이 변화하기는 세상이 바뀌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변화하면 세상에 큰 변화를 줄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때가 되면 재가 되어 소멸한다.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은 영원히 갈것 같은 착각속에 또다른 내일을 준비한다. 그러나 내일을 산다는 보장을 누가 할수 있는가? 요즘은 주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하나 둘씩 때가 되어 사라진다. 올때는 순서가 있지만 돌아 가는 길에는 순서가 없다. 그런 존재의 소멸을 깨달아야 변화된 삶을 살수 있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누구도 주어진 인생을 단 하루라도 늘릴수 없다.

“사람아 기억하라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품고 살지 말아라. 모든 다툼과 불행이 그것으로 시작된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자, 조금은 부족한 가운데 살아야 작은 은혜에도 감동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도 욕심이 줄지 않고 놀부같은 심보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인생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부디 세상에 반딧불 같은 희망이라도 비추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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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성과 신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청문회 때문에  창조론이 새삼 논란이 되었다. 최근에 나온 말은 아니지만,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는 내정자의 신앙에 대한 소신을 보면서 신앙과 이성,상식에 대한 생각을 보았다. 사실  지구의 역사가 6000년이라고 가정하면, 구석기 시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신석기시대도 의미가 매우 약해진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진 모든 것들이 거짓이 되어 버린다.

  1610년경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동안 교회에서 믿고 가르쳤던 천동설을 뒤집는 엄청난 반란이었다. 이것으로 갈릴레오는 로마교황청으로 부터 유죄를 선고 받아 일생을 종교의 억압속에 살다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 요한 바우로 2세는 1992 갈릴레오를 복권하며 그동안 교황청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인정하였다. 이미 세상은 알고 있는 상식이요, 사람이 우주를 다니는 때에 뒤늦은 교회의 반성이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무한한 정보와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모든 정보를 보고 스스로 합리적인 생각을 있다. 그만큼 이성적인 판단을  할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가 모든 지식을 독점해서 일반인들은 상식적인 조차도 교회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요즘  부부들은 아이들을 인터넷으로 키운다고 한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할 있는 능력과 자율성이  커진것이 사실이고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무시하고, 중세시대에  종교적인 권위를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억압했던 일들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있다는 사실은 깨어서 경계해야 한다. 갈릴레오는 로마 교황청으로 부터 징계를 받고 복권이 되는데 350년이상이 걸렸다. 세상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을 교회가 인정하는데 수백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금도 신앙이라는 이름하에 비이성적인 일들이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다. 오로지 믿음만을 고집하며, 변화와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수백년을 신앙이라는 이름하에  또다른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를 있는 것이다. 주관적인 주장은 때로  보편적이지 않고 상식적인 설명이 불가능한것들이 많다. 그런면에서 사회나 국가의 공직을 수행할 사람이 보편적이지 않은 이론만을 따르고 주장 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보편적인 지식과 상식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없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에 균형있는 평화를 이룰수 있을까? 살면서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편협할 있는가?이다. 교육을 받고 나이가 들수록 넓은 사고와 이해를 가져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또는 경직된 믿음과 사고로 인하여 답답해지는 것을 본다. 신앙을 갖거나 삶을 위한 수련을 하며, 생각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을 넓히고, 다양한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있는 이성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이성에  자기만의 신념이 들어가면 누구도 말릴 없는 고집불통이 되어 이웃과 세상을 힘들게 한다.  이성은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귀한 선물이다. 상식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믿음을 통해서 진리를 향해 사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가정과 사회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종교의 참된 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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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닦으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身齊家 治國平天下) 중국의 고전 예기에 나오는 말로써 혼란한 시기에 중국에서 서로 잘났다는 인물들이 나와 우후죽순격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니, 이에 먼저 자기의 인품을 닦고,  가정을 이루고 나라를 다스려야 비로서 세상에 평화를 이룰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란 인격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인격이 부족한데 돈과 권력이 있다고  리더가 되는 처럼  세상에 불행한 일은 없다. 인류역사는 그런 자들로 인하여 문명이 파괴되었고 분쟁이 일어났다. 사람보다 돈과 권력이 우선하니 행태가 걱정이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도리와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인하여  온갖 추문에 휩싸여 있다. 성추행과 뇌물과 부정한  일들로 인하여 손가락질을 받는다. 나이와 배움도 소용이 없다. 제법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비상식적인  못된 짓들에 연루되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있어 일이였지만, 약자들의  울부짖음은 항상 권력에 묻혀버리고, 그들은 다시 부활하며 기세를 날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야만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너무 오랜세월 왜곡된 의식속에 갖혀 살았기에 이제는 그것을 벗고 정상적인 인간성 회복운동에 나서야 할것이다.    

어느  집성촌에서 경험한 일이다. 마을이 집안이라 유교적인 위계가  있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마을이 개발되고 갑자기 값이 올라 졸지에 부자가 사람들이 생겨나고 개발이익에 눈을   젊은층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나이들어 재테크에  밝지않은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소외 되었다. 어느덧 재력없는 어른들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취급을 받게 되었다. 마을의  발전을 보면서, 개발로 인한 인간성의  타락도   있었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어른취급도 못받는다는 어르신들의 넉두리가 현실이 되었다. 예전에는 어른이 있고,  인품만으로 충분히 존경받았다. 그리고 그분들의 인격을  따라 배우려는 마음들이 많았다. 지금의 교육 목표는 무엇인가? 자녀들 교육에도 인성을 키우는 보다는  잘버는 능력을 키우는데 집중 되어있고, 그것을 세상에서는 성공이라고 말한다. 남을 돕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봉사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실천이 있어야  살만한 세상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일그러진  사회상속에는 바른 인성교육과 실천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먼저 자녀부터 올바른 인성을 위해서 부모가 바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가장 나쁜 교육 가운데 하나는 부모가 잘못 살면서 자녀에게 너는 나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 가르치는 것이다.자신의 인격을 바르게 세우려고 노력하며  올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려 하지않고 잘못된 삶을 닮지 말라고만 하는 것은 부모의 자질 문제이다.  

요즘 교회에서 중독치유에 대한 모임을 한다.미국 사회에서 만연하는 알콜과 마약과 여러가지 현대사회에서 얻어지는 중독들을 논하면서 결국은 부모와  가정생활로 부터 후손들의 중독성이 습득된다는 말을 들었다. 한사람의 잘못된 인격이 가족에게 유전처럼 전해 지는 것이 무서운일이 아닐수 없다. 현대 사회는 편리함과 더불어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람들이 배움이 부족하고 똑똑하지 않아서 그런 어리석은 죄악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인격장애를  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산다. 깨어서 나를 제대로 볼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종교나 각자의  노력으로  수덕(修德)생활을 하는 것은 재물의 복과 성공을 목적이 아니다. 나의 인성을 바르게 하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가 아는 성인(聖人)들이나 존경하는 분들의 인격을 배우며 나의 거울로 삼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세상은 안전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수도자(修道者)같은 자세로 자기를 돌아보고 인격을 닦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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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들의 행진


2017년821 전국에서  성직자들 3천여명이  워싱톤, 마틴루터 기념관앞 광장에 모여 미국의 정의를 위한 행진을 하였다. 자리에는 모든 종교 성직자들이 함께 하였다.  평화를 이루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모두가 마음인 것이다. 나도 아침부터 우리교회의  성직자들과  함께  좋은  날씨를 만끽하며 기분좋은 출발을 하였다.  메트로역에 정차할때 마다 모르는 성직자들을 만났지만, 서로 인사를 나누며 즐거운 담소를 이어갔다. 심지어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분들도 있었다. 내게는 특별한 행사였지만 , 미국인들에게는 일상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때로 사람들로 부터   성직자들이 사회문제에 참여하느냐?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참여를 하면 안되냐? 되묻는다. 우리 모두는 지금 사는 나라의  국민이다. 나라의 국민으로  세금을 내고 살면서 , 국가나 사회가  잘못된다면  국민의 권리를 가지고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땅의 삶을 버리고, 천상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성직자는 양심을 가지고 시대에 대해서 바른 말을 하고 그것을 가르쳐야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성직자에 대한 징세가 논란이 되었지만  23018년부터는 성직자도 새금을 낸다니 다행이다.  오랜동안  제기 되었지만,  일부 종교계의  반대로 실행을 못했다.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미국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세금을 낸다. 그래야 성직자도 국가에 대해서 말하고 저항하고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로써 미국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전국의 성직자들이  모인 것이다. 한시간의 거리를  행진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우리가 하는 행진이  나라를 변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먼길을 걸어도 좋겠다고 말을 한다. 어떤 목사님은 이민자 사역을 하시는데, 신시내티에서 일부러 오늘 하루를 위해 오셨단다.  행진을 마무리 하는 자리에서  반갑게  한인 여성목회자들을 만났다.  한분은 장로교. 한분은 감리교목사님이셨는데  두분 미국교회를  담당 하시는 분들이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 한인교회나 이민자, 소수민족 성직자들의  참여가 별로 없는 것이 많이 아쉽다. 이것이 미국인들만의 관심이며 그들만의 일인가?  우리가  속해서 살아가는 나라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진하는 일이  작은것 같지만,  워싱톤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이들의 움직임은 전국민에게 멧세지를 전하는 것이다.   세상을 불안하게 하고 미국사회를 분열과 불의로 이끌고 가는  트럼프를 향해서  전국에서 모인 성직자들이 정의를 세울것을 경고하는 것은 성직자로서 당연한 직무라고 생각한다.  성직자는 자신의 종교안에서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러한 일을 교회가 지원하고 관심갖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이민교회들의 참여와 목소리는 사회에 이방인들의  존재감을 알릴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미국민들이 중심이 되서 땅에 정의를 지키고 이민자들과  소수민들의 인권을 위해서 나서는 길에 우리들이 함께 한다면 자리는 더욱 빛날것이고, 실질적인 관심을 얻게 것이다.   교회가 나만을 위한 소원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 보다는 땅의 모든 민족들과 연합해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 확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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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인은 누구인가


111일은 전통적인 교회에서는 성인 (聖人) 기념하는 날이다. 세상에는 많은 성인들이 있다. 그들은 각기 세상에 빛을 남긴 훌륭한 분들이고 특히 하늘의 사명을 땅에서 사람들에게 베푸신 분들로  기억한다. 미사후 같이 점심을 나누며 각자 자기에게 중요한 성인의 사진이나 그림을 가지고 와서 이야기를 나누면 좋겠다고 해서 모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자기 부모님이나  주위의 가까운 사람 가운데 자기 인생에 깊은 영향을 사람들의 사진을 가지고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성인들을 보면 대부분 한국인들은  알지도 못하고 만나 적도 없는 서양인이 대부분이다. 그들의 신비한 행적이나 놀라운 기적들을 통해서 과거의 사람들이 검증했다는 것을 믿고 그들을 성인이라는 반열에 올려 놓았다. 그래서 교회도 전통적으로 그들을 기념하고 있는 것이다.기독교는 서양의 문화적인 영향을 받고 있기 때문에 그들 대부분은 외국인 일수 밖에 없다. 한국 천주교에서 과거 박해를 통해 희생당한 분들 가운데 여러분을 성인으로 올려 놓았지만 수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우리에게 영향을 주고 기억할 만한 성인이 과거에만 존재하는 것은 아닐것이다. 더구나 교회에서 정해 놓고 인정한 사람만을 성인이라고 하는 것도 세상을 넓게 보면 무리가 있는 같다.부모님이나. 가까운 사람들 가운데 직접 만나고 지켜본 인물들을 성인처럼 생각하지 못할 이유가 있을까? 사실 많은 교회에서는 교인을 성도라고도 부른다. 성도라는 말도 성인이라는 말이다. 서로를 거룩한 존재로 인식하고 거룩한 사람으로 대하는 것이 굳이 기분 나쁠 이유는 없다. 그러나 세속을 살면서 성도라고 부르는 것이 낯설기는 하다. 만큼의 역할을 하지 못하는 부끄러움 때문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인간을 존귀하고 하느님을 닮은 인격체로 본다면 누구나 성인 처럼 사는 것이 인간의 도리인것 같다.

천사를 하늘에서 찾는 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단다. 사실 천사는 하늘을 날아다니고 세상과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날개가 없다. 그리고 세상에서 사람들과 가까이 함께 있다. 누구든지 거룩한 일을 행동으로 하는 순간 사람은 천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잘못만 하고 사는게 아니다. 때로는 사람다운 일을 때도 있다. 성인들을 보면 그들은 세상 사람들과 함께 열심히 살고 ,나누고 ,섬기는 사람들이었다. 높은 자리에 앉아 온갖 것으로 치장을 하며 사람들과 별개의 존재로 살지 않았다.

가장 최근에 우리와 함께 살았던 인도의 가난한 자들의 어머니 성녀 데레사는 평생을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살았던 이웃사람이었다. 세상은 그녀에게서 삶에 대한 가치와 사람을 대하는 태도를 배웠다. 그의 삶을 너무 포장할 필요도 없다. 그는 그러한 것도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녀는 자기의 인생을 행복하고 가치있게 살다간 우리의 착한 이웃인 것이다. 이런 이웃들이 주위에는 많이 있다. 지금 우리 주위에도 나를 돕고 나를 행복하게 해주는 천사같은 성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들을 알아 보는 것이 소중한 일이다. 돼지 눈에는 돼지만 보이듯이 성인의 눈에는 성인만 보일것이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말씀이 새롭게 들린다. 이제는 우리 곁에서 성인( 聖人) 만나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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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윤리를 가르치라


아침마다 즐겨보던 투데이 뉴스 남자 앵커가 성추행 전력이 드러나며 방송에서 퇴출되었다때마다 유명인들의 성추행 전력이 드러나 사회적 논란이 된것은 하루 아침의 일은 아니다사회 전반으로 이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고심지어 종교계에서도 추문이 끊이지 않는걸 보면  심각함은 이미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이것이 결국에는 사람간의 불신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사회문제인 것이다 

실제로 피해자인 여성에 대한 성의식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모른다.더구나 인터넷으로 누구나 쉽게 접할수 있는 포르노그라피의 폐혜로 인하여 성의식은 점점  잘못되어지고 있다이런 시대에 성윤리 교육은 모두에게 필요할 뿐더러인간존중 운동으로 확산 시켜야 한다미국 에피스코팔 교단에서는 모든 성직자와 리더봉사자,직원들은 반드시 성윤리 교육 이수를 의무화하고 5년마다 재교육을 받도록 한다 내용을 보면 성인과 미성년으로 나누어 교회 활동이나 관계속에서 일어날  있는 상황을 제시하고 실제로 일어났던 사례들과 피해자들의 증언도 듣고 대처 방법도 구체적으로 알려준다그리고 여러가지 상황에서 이성을 대하는 태도를 실제적으로 교육한다이런 교육 시스템을 가지고 있어도 문제가 생길수 있는데아무런 교육이 없다면 이것은 심각한 일이 아닐  없다. 한인들이 운영하는 모든 곳에서 이같은 성윤리교육이 시급하게 요청된다. 한국사회에서는 성적인 문제들은 덮어두고 감추려는 경향이 많다. 성윤리에 대한 개념이 부족하고, 그럴수도 있다는 생각으로 넘어가는 것 같다가정교육이나 학교의 가르침도 없부족하고 군대에서도 성윤리 교육을 받아본 기억이 없을 것이다혹자는 이제는 여성을 잘못 쳐다만 보아도 추행이라고 한다는 볼멘 소리도 한다그러나 우리 사회가 그동안 얼마나 잘못된 성윤리관 속에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생각된다. 미국사회에서 이같은 일이 얼마나  범죄인지를 인지하는 것이 필요하다. 몇년전 한국에 있는 교회에도 이런 성윤리 교육의 필요성을 알려주고교육하라고 정보를 보내준 일도 있다그러나 어디에서도 성윤리 교육을 공식화 한다는 말을 쉽게 들을  없었다.

습관적으로 하는 언어적 희롱이나 행동들이 자칫 상대방 이성에게 줄수 있는 위험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매우 잘못된 것이다. “ 네가 바라는 대로 남에게  주어라하는 황금률의 마음을 갖고 행동하기 위해서 먼저 성윤리에 대해서 배우는 이성적인 훈련이 필요하다.그래야 남을 배려하고 그를 위한 일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특히 사회적 약자나 아동과  여성들에 대해서  가벼이 여기고 대하는 태도에 대해서 각성해야 한다특히 교회에서 성서를 남성중심이 아닌 남녀평등의 눈으로 보는 변화가 있어야 한다교회에서 부터 먼저 성윤리교육을 시작하는 것은 어떨까?  기성세대들의 고정관념을 바꾸고 젊은 세대에게도 인간으로서 생각하고 살아야  진지함에 대해 알수 있도록 가르치는 것이 기본이 되어야 건강한 공동체를 이룰수 있다여성은   어머니이며 아내이고 누이고 나의 딸인 사실을 알아서 우리의 성윤리 수준이 변해야 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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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맛나는 공동체


우리들이 사는 세상이  요즘 많이 시끄럽다. 우리는 평안한 삶을 원하지만  그런 삶을 살기가 쉽지 않다. 얼마전  동료 사제가 펜실베니아의 부르더 호프라는 신앙공동체에서 일년간 생활을 하고 돌아갔다. 아내와 자녀둘과 함께  낯선 외국인들과  공동체 생활을 하면서  많은 것을 얻고 귀국하였는데,  평화공동체를 살면서 좋은 경험을 했다고 한다.  브루더호프 공동체는 16세기 유럽 종교개혁으로 부터 기원이 시작된다. 1930년말  나치를 피해 영국으로 이주하게 되고 이후 미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에서  신앙공동체를 이루고 있다.  다양한 이유로  공동체를 이루어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일인가족 시대가 늘어나고 가족 단위가  작아지면서   대부분  혼자 남아서 살아갈 100 인생에 대한 계획을 생각해야 한다. 사람이란 자고로 어울려 사는 것이  행복한 것같다. 가정을 이루는 이유도 혼자 살아가기에는 쉽지않은 인생이기에  대부분의 사람은 선택을 한다. 그런데도 우리 주위에서는 나와 다른 사람과 더불어 사는 것을 불편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데 이유는 서로 맞지않는다는 것이다.  교회에  많이 모이는것 같지만  여러가지로  어울리기 싫어서  가지 않는 사람들도 많다. 여하튼 더불어 살아가는 이웃과 친구가  없다면 외로운 삶이다.  고국에 친구와 가족을 두고 사람이라면 공간이 클수 밖에 없다. 나이가 들수록 친구가  중요하다 . 부부도 나이들면 친구처럼 살아가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한다. 그래서 부루더 호프  처럼 공동체 삶에 관심을 갖는 사람들이 있다. 가족도 아니고  배경은 다르지만  선한 마음을 가지고 행복을 나누고 싶은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물론 함께  어울려 사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어느정도 자기의 것을  포기하고 나누며 살려는 마음이 있어야만  살아 볼수 있는 생활이다.  부루더호프 공동체에서는 두가지의  분명한 약속이 있다. 하나는 절대로 남을 험담하지 않는 것이고 둘째는 솔직한 대화를 하는 것이다. 사실  인간관계에 있어서 중요한것은 상대방에 대한 존중이다. 존중은 신뢰를 바탕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기본적인 예절이 있어야 어울림이 가능하다.  요즘 우리 사회를 보면 서로에 대한 비난이 너무 지나치다.  사회적인 인식과  정치적 견해에서는 더욱 심각하다. 나와 생각이 다르고 성향이 다르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것을  매체를 통해 보면  마음이 불편하다. 좁은 땅에서  부대며 살아온 이웃들인데  곳까지 와서 편을 가르고 사는 모습은  좋아 보이지 않는다. 서로가  나름의  생각과 이성이 있다고  너그럽게 보아주면 안될까?  자기의 생각은 옳고 상대는 틀린것인가?  고정된 사고가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만큼 스스로 성장하지 않은  것을 증명하는 것이다. 흔히들  고국을 떠나 때의  고정된 생각을 가지고 이민을 산다고 하는데, 이것처럼 답답한 말은 없다.  내가 경험한  것만 고집하고 주장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행동이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는 어느 공동체에서도 어울리기 어렵다. 사람은 누구나 귀한 존재이다. 말과 생각이 옳으면 상대방도  옳은 사람이라고 보아야 하고 그것을  성숙한  인격이라고 한다.  나는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것이 지혜롭게 살아가는 사람의 모습이다. 이것을 성찰이라고 한다.  성숙한 사회는 성찰이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결과물이다.  그러면에서  공동체를 산다는 것은 성숙한 세상을  만들어가는 기초적인 행위인것이다.  부르더 호프 공동체 같은 정신으로  서로를  존중하고  서로의 가치를  인정하고 배려할 아는 인간에 대한 문화가 세워지는 일이 일어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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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


내가 마음에 두고 부르는 노래가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곡이다. 어두운 시절을 힘들게 살던 사람들에게 사람의 가치를 표현해준 노래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아름답고 귀한 존재이다.  사람은 어떠한 이유로도 억압하거나 무시하거나, 가벼이 여겨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사람을 경시하고 홀대하는 일들을 만들고 있다. 서울 어느 동네에서는 장애인 학교를 세우면 집값이 떨어지고 주거환경이 나빠진다고 반대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들도 나름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반대를 하겠지만, 세상에 사람의 인권과 생명보다 앞서는 권리라는 것이 무엇인가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이다. 나이들고 몸이 약해지면 자연스럽게  장애인이 된다. 다만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부터 아니면 사고로 장애를 먼저 겪을 뿐이다. 특히 어린 장애아들을 위한 교육과 돌봄은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려해야 의무이다. 이것을 잘하는 사회가 선진국이고 사회이다. 얼마전 본당 장의자를 일부 치우고  휠체어를 위한 공간을 편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였다.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 본래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숙원사업을 마친것이다.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배려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사는 공동체이다.  

사회에서 시급으로 사람을 계산하는 현실을 경험할때면 천민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비인간적인 제도라는 생각을 떨칠 없다. 사람은 돈만으로 따지고 평가 할수 있는 허접한 존재가 아니다. 한시간의 생명을 몇푼으로 가치를 따질 있는가?  인간의 삶을 돈으로만 환산하는 처럼 잔혹한 일은 없는 것같다.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어진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라고 성서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 세상은 전혀 다르게 사람을 대한다. 이런 구조에 모두가 매몰되어 살면 인간성을 사라지고, 돈만 남게 된다. 모든 사람을 돈으로 보고 사람의 가치를 따지게 되니, 아름답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운 불행한 시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을  죽어서 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살아서 얼마든지 경험할 있다. 사람의 가치가 존중받고 서로가 신뢰를 사는 곳이라면 그곳은 천국같은 곳이요. 그러나 불신으로 가득차고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져 묻는 이기적인 사회라면 그곳이 지옥이 된다. 이것을 만들고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다. 혼자 살기 위해서 남의 불행과 어려움을 외면하고 살면서 불안한 사회를 조장하는 것은 스스로 지옥을 사는 것이 것이다. UN에서 트럼프는 전세계 사람들을 향해서 오로지 미국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겠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도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단다. 미국을 위해서,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가족들이 희생을 당해도 상관 없다는 말인가? 정상적인 사람이 할수 없는 말이다.  사람 생명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찾을수 없는 것보다 악한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경제와 돈보다 먼저 사람이 우선해야 한다.  한가위 추석이다. 국민을 이용하여 거짓과 선동을 일삼는 것들에 흔들이지 말고, 가족과 이웃들과 어울려 서로의 이야기에 기울이며, 삶을 함께 나누고 사람에게 관심 갖기를 바란다.  아름답게 집을 치장하고 좋은 차를 탄다 해도 이웃의 눈물과 고통이 있는 우리는 행복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당신도 꽃보다 아름답다. 그러니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말자. 그래야  행복한 세상을 함께 누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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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을 잘하자



한번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카피가 한동안 유행했었다.  우리 생활속에서  선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선택으로 나타난 결과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바꾸어 질수도 있다 . 그래서 선택 이전에  분별이 중요하다.  지금 처럼 선과 악의 분별이 어려운 시대에    분별력을 가지고 시대를 읽는 능력은  더없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속한 성공회에서는 성직 청원자가 생기면   분별심사를  몇년 동안 걸쳐야  성직과정에  들어 갈수있다. 그만큼  분별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본인은 스스로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을 하게 된다. 나라의  대통령을 뽑거나  어떤 공동체의 리더를 세우는 일도 성숙한 사람들의 분별로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좋와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좋은 선택을 있는 분별력을 키우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평가하고 상황을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있다. 그러나  기본이  충실한  상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나눈다면  얼마든지  최선의 선택을 있다고 본다.  다양한  지식을 배우고, 능력을 키우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분별력 있는 인재가 만들어 지지는 않는 같다. 세간에  논란을 일으키는 인물들을  보면 그들이 학식과 재능이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을 생각하고 세상을 위하는 분별력과 상식이  부족하다는데에  있다. 돈으로만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 잘못된 차별 같은 것들이   분별력을 흐리게 만드는 요인이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세와 거짓을 통해서 세상의  분별력을 흐트리려고 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런 세태들로 인하여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아닐까?

나는  분별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일상속에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선입견을 갖게하는 것이아니라, 바른 상식을 키우고, 스스로 선한 목표를 위한 분별을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를 아는 것을 법을 배워야 한다.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은 지나친 욕심때문에  겸손하지 않고, 남을  존중할줄 모르는 교만한 마음으로 부터 나온다.  내가 사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이것으로 우리 모두가  행복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  분명한 책임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해서 지금의 자리를 만들었고,  열심히 살고 있다. 이민을 온것도  나의 선택이다.그러니 이곳에서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야 책임이 있다.  무언가 잘못했다고  깨달으면 그것도 배운것이다. 분별의 능력은 실패와 성공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편협하고 주관적인  판단에  머물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심을 갖는 것도 상식적인  분별력을 위한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자칫 자기의 신앙심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또한 분별없는 신앙이 되어,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성숙한 상식을 통해서  정상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 소통이 되어야 세상이  행복하다. 우리 사회가 분별의  지혜를 통해서 나은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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