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치는 자의 역할(1:6-8,19-28)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느님에게서 낳다.”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에게서 나았지만 그의 인생은 하느님의 빛으로 살았습니다.우리는 빛을 보고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사람은 빛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초기 수도원의 창시자인 안토니오는 251 이집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34세가 되어 주일 설교를 듣던 가진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성경말씀을 듣고 자리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게됩니다.그리고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유산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사막으로 가서  그곳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찾으며 살았습니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사막으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그는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그대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복음을 외치고 복음의 빛을 증거하는데 나머지 생을 다하였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변화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된 생활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빛을 보여줍니다.이것은 당시에도 사람들에게는 신비하게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신비의 빛을 받아 사는 것이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운데는 기적이 있고 놀라운 일들이 순간 순간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는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혹시 나도 주님의 부름을 받아서 저렇게 되지나 않을까? 그러면 나의 인생은 매우 힘들것이다 라는 상상으로 미리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혹시 자기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릇의 모양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듯이 주님의 부르심이 있다고해서 모두가 세례요한이나 안토니오 성인같이 사는 것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대부분은 일상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크기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수도자들이 그와 같은 생활을 지금도 배우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모습들은 세레자 요한으로 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품으면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좀더 세상적으로 고상하게 살면서 하느님을 따를 수는 없을까? 하느님게서 우리들을 부르셔서 살게 하신것에는 차별이 없습니다.그러나 사명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가 예언자가 될수 없고 모두가 수도자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고 서로에게 연관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게 사는 것이 요한이 말하는 빛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도 빛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두움이 함께 있기에 온전한 하느님의 빛을 드러낼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빛이라고 빛을 우리가 보고 살아야 한다고 증언하는 일은 있습니다. 정도를 하기 위해서도 왠만큼의 영적인 힘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만큼의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교회가 2차대전때 폭격을 맞고 크게 훼손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예수상은 손만 떨어져 나간채 보존되었다. 교회 신자들은 조각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이전보다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다. 어느날 조각가가 손이 떨어져 나간 예수상을 보수하자고 건의 하였는데 교인들이 반대하였다. “우리는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겠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바로 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교회는 예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야 합니다.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비쳐지는 스포트 라이트를 거부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묻습니다.당신은 그리스도입니까? 당신은 예언자 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했을때 , 자기를 설명할 있을까요? 이것이 영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능력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가르치고, 변화시키고,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참된 능력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분명하게 고백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자기가 살면서 행해야 일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빛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자기의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공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인 프란시스는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자기가 하느님의 평화로 부름받은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대림절기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땅에서 나는 주님의 사람으로 그와 더불어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일의 크기는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치있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들 모두가 이것을 발견하여 우리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빛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빛을 활용해서 사람들은 많은 변화의 일들을 만들어 있습니다.그리스도는 빛으로 살아계십니다.우리는 그기스도를 통해서 무언가를 변화되도록 부름받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아서 살아갈때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대하십시오, 2015년에는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를 기대하십시오. 변화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게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비라고 할지 모르지만 하느님게서 이루시는 일은 놀라운 일상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에 여러분의 일상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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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1:1-8  벧후 3:8-13

 

여러분은 하느님을 만난 느낌을 가지고 있나요?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이었는가? 하느님을 만난 사람, 하느님을 만나며 사는 사람은 인생이 행복하다.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인생의 답이 그분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곧 나를 아는 것이요. 나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고뇌로 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존재와 나 자신의 존재는 일치한다. 따라서 인생의 방황이나 의심이나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곧 번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밖에 없다. . 

     

사람들은 모든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사는 목적은 행복이다. 돈버는 것 자식 키우는 것, 활동하는 것, 공부하는 것, 신앙생활하는 것.하느님이 존재하는 것, 예수가 오신것) 그런데 행복한가요?

왜 안 그럴까요 이유는 행복의 중심에 온전하지 못한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내 중심으로 하니까,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지 않다. 우리들이 지금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렵고 하다면 지금 내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찾아서 몸부림치는데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 살지 않는 한 그 무엇으로 채운다해도 그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세례요한이 하느님을 만나며 사는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요한은 제사장 즈가리아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에는 신분도 있고 잘사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그런 가정에서 어려서 부터 종교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고 자랐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편안한 길을 버리고, 스스로 광야를 찾아갑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불행하고, 고통받는 생활이다. 그는 왜 광야생활을 선택했을까?

 여러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구약에서 부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공통된 행동들이 있는데, 홀로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 ? 우리들 생활은 복잡하고,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잊고산다. 이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하느님을 느끼기가 어렵다. 하느님 음성을 못듣는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피정, 묵상, 안식일, 기도 등의 행위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구체적인 일이다.) 따라서 광야에 나가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하느님은 선택한 자들은 광야로 부르셔서 당신을 드러내셔서 말씀하시고 듣게 하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애서 하느님을 만난다. 사울도 다메섹 길 즉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된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시나이반도의 광야를 보면 허허벌판이다.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느님만 의지해야 한다.

 

여러분 여기는 광야입니다. 고향을 떠난 삶은 광야이다. 그런데 사람이 많다보니 하느님을 의지 하기 보다는 사람들 끼리 의지하고 믿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이렇게 하면 광야생활은 실패한다. 하느님게서 광야로 부르신 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당신을 만나도록 , 듣도록 특별히 선택하신 것이다. ? 하느님을 정확하게 알도록 하시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허울을 다 벗게 만드는 곳이다.그러니 스스로는 부끄럽지만, 본질의 모습을 알게 된다.알고 보니 자신이 그리 대단치 않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 머리숙여 겸손히 바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느님은 존재하십니다

 

광야는 세가지의 행복을 준다.

1, 회개

요한이 가장 먼저 광야에서 선포한 것은 회개인데 그가 먼저 광야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벗어드린것이다. 그는 화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것을 허울을 다 벗어버린 자의 모습은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별것도 아닌 사람이 광야에서는 다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회개이다. 여러분 죄를 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아십니까? 죄가 보인다면 그는 거룩한 인생을 살수 있고 그것으로 인생의 고민을 안해도 됩니다. 회개는 죄가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죄가 보여야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보여야 딲습니다.    

 

2, 세례

세례는 축복이다. 세례는 하느님께 나를 등록하여 보여드리는 것이다. 광야에서 나와 하느님이 함께 만나는 자리가 곧 세례의 자리인것이다. 그래서 광야는 축복의 장소이다. 그래서 은자들이 광야에서 나오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 사해공동체는 매일 하루에 두번 세례를 재현했다. 성당입구에는 대부분 성수가 있는데 사람들은 들어오고 나갈때 성수를 적시며 세례의 은총을 기억한다세례는 거듭남의 증거이다.   

3, 꿈을 꾼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나라를 경험하며, 그 나라를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하게 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 왔다.광야를 지나면 가나안이 있다. 출애굽의 여정은 고난의 길이 아니라 꿈을 꾸는 과정이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의 글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꿈을 꿉니다. 몰입하면 꿈을 꿉니다. 꿈을 꾸면 언젠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졌을 때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꿈다운 꿈입니다.

여러분의 꿈을 꾸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인가를 베드로 후서에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은 한분이시고, 진리이다. 따라서 절대로 변함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만들어 버린다.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이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허황된 오해를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허황된 하느님이다. 광야의 경험이 없는 자들은 이렇듯 하느님을 가지고 우상놀이를 한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 백성이 하느님을 모르는도다.” 그들이 어리석은 우상에 빠져 있을 때 듣는 말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만나고 나면 정확한 디렉션을 받아 인생을 살기에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의 의미와 지금 가는 길의 방향,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의 변화되는 감을 가지고 살면 불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인생의 답이 없고 불안하니까. 행복이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만나 살기를 간구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 신학이 세워졌다. 민중신학, 복음신학, 성령신학 등 그런데 미국 이민사회 가운데 나온 신학이 광야신학이다.이민자들의 Identity를 신학자들이 성서에서 찾아보니 그 중심에 하느님의 의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인구가 200만이 넘었다고 본다. 2011미국에 한인들이 방문자를 합해서 대략 2157천 이라니 거의 비슷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나와 가나안 이라는 복된 땅을 목표로 가는 것이다. 이들의 출발은 이집트 탈출이었다. 2백만이 함께 떠났지만, 모세 만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나섰을 뿐 대부분은 그저 현실이 괴롭고 힘들고, 이집트 정세가 싫고,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냥 탈출해서 떠난 것이다. 어찌 시작되었든지 간에 모세와 한배를 타고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온갖 고생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산다. 그 가운데 일부는 왜 떠나왔는냐며 불평하고, 일부는 다시 돌아가고, 일부는 타락하고, 그러다 죽었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을 의지하고 확신을 가진 자들은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된다. 여러분 우리의 이민생활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이 광야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과 아닌 것의 결과는 이미 성경에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깨달아 사는 것이 지혜요 은총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장소이다. 하느님게서 이스라엘을 4개월이면 충분히 갈수 있는 가나안 길을 40년간 이끌고 다닌 이유는 과거의 그들의 종살이 하던 성품을 변화 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변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간들 이집트에서 살던 종의 성품이 그대로 있다면 이집트에 사나 가나안에 사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아직도 이 광야에서 살면서도 과거의 삶을 고집하고,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그렇게 살면 광야에서는 죽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부르셨고, 가나안의 행복을 약속하셨고, 무언가 미래의 역사적인 소명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을 알면 광야생활은 즐겁고 복된 것이다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광야에서 사는 겁니다. 이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하느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 답을 얻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나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광야에서 살아날 방법이나 요령은 없습니다하느님의 진리에 전적으로 맡겨질 때 비로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어 살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자유를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바라고

하느님게 진지하게 나의 문제를 물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답을 주십니다. 이곳이 광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응답을 듣는 기적같은 장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광야에 부름받은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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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을 이기는 기도(11:1-13)

성공회를 전통적으로는  기도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1549 토마스 크램머 켄터베리 대주교에 의해서  최초의 영어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만들어서  사람들이 누구든지 항상 기도할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공동문을 가지고  공동으로 또는 개인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도문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성공회교인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기도는 신앙생활에서  중요합니다.  바울은  쉬지말고 기도하라 교회에 적극 권하였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연결되는 길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길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게 어떻게 하느님과 기도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이에 주님께서 주의 기도문을 말씀하십니다. 기도문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통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도를 통한 많은 하느님과의 교통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타락은 모든 부분에 걸쳐서 말할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흔히 성경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심판을 이야기 우리는 소돔을 예로듭니다. 소돔과고모라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까?

정답은 의인이 없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님게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거부하고 가운데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다른 타락으로 멸망의 자리에 선것이 아닙니다. 죄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가운에 하느님의 의인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님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살려 주십시오, 45명만 있으면 살려주십시오, 40명만 10명만있어도 살려 주겠다라고 하느님게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0명의 의인도 없어서 결국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는 한명의 의인도 없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의로운자 하느님과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기도하며 소통하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나라를 살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정을 살립니다. 공동체를 살립니다. 하느님께 저와 여러분을 자리에 부르신 이유는 기도하라고 부르신겁니다. 하느님과 대화하라고 부르신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고 딴짓을 하고 하느님의 관계를 소흘히 하면 그것이 죄입니다.  심판의 조건입니다.

흔히들 하느님 안믿으면 어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생각과 삶은  다를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시대의 타락과 폭력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지금 저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있는가?  

지금 여러분이 사는 세상을 보세요.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삽니까? 하느님이 중요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존재합니다. 이것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하느님 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가장 먼저 한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가장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나의 소원이 아닙니다. 나의 목적이 우선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가  기도의 목적입니다.  주님게서 기도할 중언 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쓸모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느님 아버지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내가 바라는 간절히 원하는 어려움들은 우리의 아버지게서 이미 아시고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자세는 이렇습니다.

1,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청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곁에 계십니다. 그분을 안으로 모셔들이는 겁니다. 이것을 영접이라고 합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들어 오셔서 나를 움직이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퀘이커교인들이 잘합니다. 그들은 기도할때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마치 명상기도같습니다. 그러면 몸이 움직입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퀘이커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분이  함석헌 선생입니다. 기독교 가운데 평화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퀘이커교도들입니다.

 기도는 몸으로 깊이 받아들여서 하는겁니다. 나를 온전하게 하느님께 내어들이고 의탁하는 행위가 온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가 필요한것만 구하고 말아버립니다. 특히 오늘 성경에서 말씀을 가지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하라 두드려라 그리하면 찾고 열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조건 원하는 것을 가지고  두드립니다. 무리하고 이기적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솔직히 사람들의 소원이라는 것이 하느님께서 보실때 별볼일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예들들어 자녀를 성공시키는것 , 사업 잘되는 이것이 하느님나라를 이루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지요? 생각해 봅시다.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지난주에 김요한 신부님이 밀리언 집을 얻었는데 자기집이 아니니까 하느님게서 주신겁니다. 그분 개인에게 집이 필요합니까? 15명이 살려면 밀리언 집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사람에게 그런 집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경말씀을 오해하여 잘못된 것을 가지고 떼를쓰는 그런 믿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여러분이 하느님과 마주하면 모든것이 그분의 안에서 은혜롭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 주는대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바로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의 삶의 목적이 분명합니다.모든 것을 하느님의 나라 평화를 이루는 삶으로 바뀝니다. 그가 말하는 그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평화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하느님게서는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끊임없이 소통하십시오. 그러기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께  부름받은 의로운 사람으로 생활하여 가정이나 공동체나 어디에서든지 구원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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