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인의 존재론(마태5:13-20)

용서라는  말은  종교적인 언어만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풀어야 중요한 관제입니다. 그런데   교인은 당연히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로  보고 그렇지 않으면 욕을 먹습니다.   또한 교인들은 착한일만 해야 한다고 하고 비난이나 저항을 안하고 순종해야 된다고도 합니다. 이런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일까?  각자의 취향일 있지만  이렇게 규정짖는것이 맞는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범위에서 규정지어져야 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존재와 가치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라하십니다. 삶에서 필요한 것이 많지만 두가지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은 반드시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말씀을 하는겁니다.

1,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함께 읽는다)

우리는 바닷물에서 소금을 얻지만,  유대인 지역은  석탄처럼 소금을 산에서 캐는 암염을  먹습니다. 그래서 유대땅에는 소금이 돌처럼 굴러다닙니다. 집에서 암염을 사용하다가 떨어뜨리면 이것이 굴러 다니면서 사람들의 발에 차이고 밟히는 상황이 생기는겁니다. 소금이지만 어떤것은 음식에 사용되지만  땅바닥떨어지면 돌처럼 보입니다. 돌처럼  무시당하는겁니다. 소금 그릇에 담겨 있지 않으면 그냥 돌처럼 보입니다. 존재가 없는겁니다.

사람으로서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무시당하는겁니다. 이것 때문에 살인도 일어납니다.  부부 사이에 무시하면 살수 없습니다.  멸시를 당하게 되면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세상에 살면서 자기  역할을 못하면 무시 당합니다. 그러면 살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존재감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죽은 겁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면서  내가 어떤 생각과 행위를 통해서 나의 존재를 드러내야  내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가치를 사는 것인데 세상 사람과 전혀 구별이 없다면 회의가 오게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가? 내가 교회를 다니는가?

그래서 우리는 입으로 몸으로 하느님을 표현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맛이 나는겁니다. 우리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세상이 맛이 나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맛이 점점 떨어져 간다면  무시당하고 발로 차이게 되는겁니다. 이런 수모가 어디있어요? 정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과일이 맛이 안나면 먹지 않고 버린다)

 사람도 맛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밥맛이 없다고 해요. 어떤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은 밥맛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누가 좋은 사람일까요? 여러분은 누군가 밥맛을 내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밥맛나게 하는 분이었습니다. 신명을 불러 일으킵니다. 병자를 일어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어둠에 갖힌 자를 가운데 세웁니다.  그래서 잔치가 벌어진것이지요. 주님께서 맛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맛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정말 예수처럼 살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맛을 내며 살고 있는지요? 생각해 봅시다.

2,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16절을 함게)

빛이 하는 중요한  역할은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빛이 나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촟불을 들고 노래합니다.”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 빛은 어떻게 생겨납니까?  무엇이든 자기를 녹여야 안에서  빛이 나옵니다. 나무 ,배터리, 어떤 물질이 죽어야 그곳에서 빛이 나옵니다.  빛이 되려면 나를 태워야 합니다. 안그러면 빛이 나오지 않습니다. Sacrifice  빛은 스스로 빛이 되지 않고 다른 존재를 비추어야 비로서 빛이라는 존재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보게되는 것은 다른 것을 통해서 나타남으로 비로서 보는겁니다.

 

소금과 빛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무언가를 위해서 존재한다는겁니다.

이것은 우분투 정신입니다. 남아프리카의 반투어에서  평화사상을 담고 있는 아프리카 언어입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존재한다혼자가 아니라 서로를 위하여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생명으로 빛나게 하는 것이 우분투 정신입니다. 우리에게서 내가 상대방을 위해 빛을 비추지 않으면 나는  생명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를 살리기 위해 사는 것이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비추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 인간은 그래야 하는데 사실을 잃어 버리고 살기에, 예수께서 오셔서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럼 소금이 맛을 내고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라목적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내가 녹아서 맛을 낼때 내가  희생하여 빛을 밝힐 사람들은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는겁니다. 여러분 어머니의 모성애에서 하느님을 보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헌신에서 하느닙의 사랑을 느끼지 않습니까?  모두에게서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을 만나는 겁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다면 세상은 하느님을 몰랐을 겁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보이지 않았어요. 하느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가 것입니다. 살아서 그리스도가 되지 않았어요, 죽어서 그리스도가 되신겁니다. 그를 보고 하느님이 사랑이시구나 하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것입니다. 구약시대까지만해도 사람들은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자로만 알았는데 비로서 하느님이 구원자의 사랑을 가지신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부모에 대해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어떤 사건을 통해서 압니다.

레아는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한번도 안아주지도 않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는데 한가지 사건으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고 있어요.한번 어플때 등에 업고 정신없이 달려간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안겁니다.

소금과 빛은 그냥 존재로서 자기의  자리에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사용하시고 소금으로 빛으로 사용하셔서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속으로 점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일어날 때입니다. 나를 녹여서 맛을 때입니다. 나를 사용하여 빛을 밝힐 때가 것입니다. 하느님게서 이날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숙제로 주신 것입니다. 그의 부르심에 당당히 서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살리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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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섬김 (마르코9:30-3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야 한다.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섬김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한 세상은 서로 섬기는 세상입니다. 대접받으려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사회는 불행합니다.  자기 능력과 위치에서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받들어 준다면 사회는  행복한 사회일겁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보여주신 모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의 능력을 보고  주님을 왕으로 받들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섬김을 하려고 왔다 스스로의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사람 그것이  크리스챤입니다.  주교들의 옷을 보면 붉은 피의 색깔입니다. 이것은 죽도록 섬기다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제들이 검정색  옷을 입는 것도 죽은 자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모든 교우들이  죽기를  결심하고 죽도록 낮아져 산다면  공동체는  행복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모두가 섬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90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성당에서 영국여왕을 직접 만났다.  영국왕실에 대한 부정적인 것도 있지만  영국인들에게  엘리자벳2세는  실제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엘리사벳 2세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벳 2 여왕이  왕위계승자로써   공주였던 20세에  그녀는 아버지 왕에게 요청해서 2차대전 중에  군복무를 자청하여  트럭운전병으로 복무하였다. 트럭 바퀴를 수리하고 탄약을 운송하고 흙바닥에서 뒹굴며 일반인들과 똑같이, 아니 열심히 일을 하는 그녀를 보고 영국인들은 국가에 대한 봉사를 명예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차기 여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여성 왕족 가운데 엘리사벳2세가  유일하게 훈련을 받고  일반인과 동등하게 전쟁에 참여한 인물로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이후 엘리자벳 2세의 자녀들도 군복무를 하고 손자들도 나라에 대한 봉사를 당연하게 여기고 전쟁에도 솔선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으로 영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블리스 노블리제 입니다. 국가의 리더가 스스로  낮아짐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  리더로서 인정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리더들은 그러한 정신을 실천하지 않기에 국민들로 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동원 목사는 대형교회를 두개나 세운 소위 성공적인  목회자이다. 그는 5 먼저 은퇴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원하는  집과 은퇴금을 전혀  받지 않았다. 스스로  살만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에게  우리가 어떻게 부활할 있는가? 라고 질문했습니다.

부활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리더가 죽어야 리더쉽이 살고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역설적이지만  주님의 복음은 언제나 역설을 통해서 진리를 말합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실천하고 전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청정한 삶을 보여 주었고 세상에서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스스로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존경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은 첫째가 되려고 욕심을 부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스스로 내려 앉아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은 희망을 갖습니다.  

오늘 성경은 누가  진정으로 높으냐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사람만 모이면 줄서기를  합니다. 누군가 첫째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지요.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가다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것을 눈치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나의 존재가 드러나고 사는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남을 부리고 마음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나  권력으로 남을 밑에 둘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위해 인생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주님은 이것을 잘못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존재할까요. 이것을 야고보서 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욕심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모든 욕심이 불화와 불행의 근원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욕심입니다.  잘먹으려는 ,  잘살려는것, 무언가 잘하려는 것에  욕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사실 욕심은  열등감의  실체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가운데 남보다 못하고 스스로 불행했다고 여기는 것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요즘 세상의 지도자들이  욕심때문에 타락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많은 경우에  인생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출세함으로  잘못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래서   인생에 한이 없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한이나 욕심들이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  한이 있는 사람은  기회가 되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풀이를 하려고 욕심을 가지면  불행해 집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나님께서 맛나를 먹여주시는데 하루치만 모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상을 모으면 그것은 썩어서 못먹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함없이 이어집니다.      

       

2.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겸손함은 순결한 마음에서  나옵니다.자기를  지나치게  자랑하는 사람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대단하고 좋은 사람은 그렇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미 내안에 만족이 있고 삶의 가치를 충분히 누리기 때문에 남의 평가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살아지는 겁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아 주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하셨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살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어리고 작고 약한 것을 보고 무시하는 사람은  순수하지 못한겁니다. 욕심이 가득하면 그런것이 안보이고 교만해져서 자기 욕심만 주장하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소위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 어린아이 처럼 순수함과 겸손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고 여린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함께 합니다.

프란시스 교종을 보면 어린아이들과 아주 놉니다. 이것이 그의 심성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에 무슨 욕심이 있고 교만이  자리 하겠습니까?  

불교계의 거목 성철스님을  생전에 만나려면  3천배를 해야 만나주었답니다.  욕심을 내려놓게하는 그분의 방법이지요.  그런데 어린아이들과는 장난을 치며 가까이 놀았습니다. 어느날은 눈에 멍이들었는데 아니가 때려서 그랬답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분의 순수한 모습을 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본질입니다. 겸손함으로 남을 섬길 있고 사랑할 있고 인정할 있는겁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하십시오. 없다고 무시하거나 약하다고 멸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게 하십니다.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하여  모두가 은혜롭운 삶을 누릴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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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생명의 빵 (요한 6:24-35)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빵으로 5천명을 먹이신 나눔의 기적일 일어난 후에 제자들과 만나서 하신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은 군중들은 직접 그들이 체험한 놀라운 기적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적의 빵을 먹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 이후로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더 현실적으로 좋와졌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왕이 되면 우리들의 먹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하는 마음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열악한 정치와 수탈의 경제상황에서 백성들의 소망은 예수에게 급속히 집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려우니 한국이나 미국이다 선거를 앞두고 찾는 지도자는 먹는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누구든지 경제 문제만 해결하면 누구든지 좋다, 그것이 늘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후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일어납니다.   

여러분 신앙체험은 신비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먹었는데, 신비롭게도, 그것이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나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나누어 먹었을 뿐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면 그것이 기적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잊고 살 뿐입니다.

 그런 것 없이 우리는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게서 여러분에게 주신 생명의 빵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수도원생활 할 때 일입니다. 형제들은 매주일 모여서 생활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데 어느날 결정하기를 매주 수요일 저녁은 빵과 스프만으로 먹고 남은 돈으로 홈리스를 돕자고 했습니다. 그후 매주 수요일은 남은 빵과 스프만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사실 수도원에서는 저녁 한끼만 제대로 먹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희생하는 저녁을 먹으며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우리 형제들 8명 정도가 식사를 했지만 기분은 오천명이 함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의 빵을 나눔으로 오는 행복을 느껴 본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이런 행복을 만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서에서 빵이 나오면 우리는 두가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1,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2백만이라는 사람이 광야에서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의 빵을 먹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어른들이 6,25나 고난의 시기에 하는 이야기의 중심은 그때 무엇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먹을 것으로 나의 목숨을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먹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조상이 광야 40년동안 오로지 하느님이 내려주신 빵으로 기적적인 삶을 살았던 그 사실을 통하여 오늘도 하느님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먹이신 하느님, 그는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이 어떤 사람들인데 무조건 믿지 않습니다.

아주 지독할 정도로 하느님을 확인해서 믿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똑 같은 빵을 먹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고 어떤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같은 은총을 받아 살았지만 누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았고 누구는 그저 한끼의 빵으로만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 하십니다.”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신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여러분 빵을 먹으며 그것을 주신 하느님의 손길을 보시기 바랍니다.

빵 맛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식사기도를 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이 밥의 주인이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구나 같은 환경에서 먹고 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면서도 짜증을 내면서,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달에 만불은 번다 그러면서 흑인을 짐승이라고 하며 산다.차에는 묵주를 걸어 놓고 다닌다)

한 이디오피아 이민자는 gas ststion에서 일하는데 늘 보면 성서를 수시로 보면서 행복한 미소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먹고 죽을 빵을 먹고 살지만, 다른 사람은 생명의 빵을 먹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까?

 

   

2, 오병이어의 빵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먹는 문제를 중요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배고픔을 위해서 축복을 하십니다. 광야에서 주님과 함게 빵을 나눈 사람들은 빵만 먹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려면 기적으로 빵만 만들어 먹이면 됩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광야의 빵은 그런 빵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매일 같이 내리는 빵을 받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적의 빵이 아니라 서로 나눔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직접 체험케 해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말씀하십니다.”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와있다.”

이 나라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천명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으로 입으로 확인하고 갔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원리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 똑같이 밥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그 뜻이 전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격주로 우리 교회에서 저녁기도를 하고 음식을 나눕니다.

저는 이날 저녁이 매우 특별합니다. 개인적으로 감동이 옵니다. 단순히 모여서 밥을 한끼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특별한 만찬입니다. 호텔에서 먹는 것 보다도, 큰 부풰에 가는 것 보다도 더 훌륭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특별한 만찬의 전통이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우리들의 외롭고 힘든 이웃들이 함께 초대 되어 감동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사는 기쁨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이런 주님을 믿으면 살만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누가 생명의 빵이 되어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걱정, 근심없는 인생으로 인도하겠습니까?

한끼를 먹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내가 고생하여 얻었다는 것 보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양식으로 내게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먹으면, 그 인생의 가치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 나라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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