겸손한 자의 기도(루가18:9-14)

한자로 겸손이라 함은 자신을 누르고 다른 사람 앞에서 물러난다주제넘게 남에게 참견하지 않는 다는 뜻이 됩니다. 자기가 알고 경험한 것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여 나를 누르고 참는 것입니다. 대단한 수양이지요. 사실은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도 단편적인 것입니다.  성서에서의 겸손은 땅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땅에 맞추어 내린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신  존재 앞에 나가서 나의 비천함과 나약함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또는 자신이 거룩함 앞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어서 땅을 바라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거룩함 앞에서 얼굴을 들수 없을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시덤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을 모세는 여호와를 보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감추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겸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이런 현존의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영적인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를 질문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성찰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오랜동안 성찰하는 문화가 없어졌습니다. 기도하며 떼쓰고 얻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찬양하고 즐기고 좋와하는 문화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나를 성찰하는 문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는것입니다. 성찰하면 당연히 겸손해집니다.

바리사이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와서 기도합니다. 세리는 자기의 공로를 자랑합니다. 나는 십일조도 바칩니다. 율법을 따라서 온전한 생활을 합니다. 부정하게 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십시오. 당당하게 하느님게 요구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내면의 죄와  본질은 숨기고 드러나는 것을 가지고 인정받고 그것으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구합니다. 기도할때 은밀히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기도를 합니다. (대개 예배에 대표기도를 합니다. 그때 기도 내용은 하느님게 드리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듯이 합니다.)

반면에 소위 죄인이라는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땅에 머리를 대고 기도합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소리도 크게 내지를 못하고 그저 가슴을 치며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애통해 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짧은 기도 밖에는 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만 해도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접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요?

 성당과 예배당의 차이를 저는 봅니다. 예배당은 회중이 공동으로 모여서 항상 북적거립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 대부분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개인적인 공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성당에는 대부분 작은 기도처나 묵상공간이 있습니다.(감실) 그곳에서 스스로 주님과 대화하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겁니다. 사실은 이것이 가장 은밀하면서 가장 정직한 자리이며 주님과 마주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자리입니다. 여럽 사람들 앞에 대중기도하면서 솔직하게 말할 없어요.   은밀한 주님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서 비로서 겸손한 성품을 찾을 있습니다. 두사람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누구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 인정을 받았는가? 묻습니다.  세리의 기도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기도는 오로지  하나입니다.”주여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아시니 불쌍히 안아 주세요 라는 나를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나를 경영하고 나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랑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기도해서 얻어냈다라고 하는 것은 교만한 겁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에도 은혜를 주시는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땅에 스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겸손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주인이시지만 그분은 겸손하십니다. 필요하면 세상을 위하여 땅으로 겸손히 내려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십니다. 사람마다 하느님에 대한 의견이 다르겠지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본질은 겸손일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을 보고 인간이 겸손을 배우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단히 가르치려고 합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특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데 열심을 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바리사이인 같은 교만이 세상을 혼란과 부정함으로 인도해 갑니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많이 빠져듭니다. 그리고 함께 침몰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열을 알아도 하나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몸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겸손함을 살고, 청빈함을 살고, 세속적인 것보다 하느님의 은혜를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고 나를 성찰하며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낯추면 높아지리라 말씀은 탈무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교훈입니다. 유대교인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궂이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이미 우리들의  상식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를 성찰하며 기도하십시오. 오늘 받은 축복과 은혜을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은혜와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자신에게 부끄러워 하십시오. 그래야 성숙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는 자랑하지 않아도 남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고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고 떠들면 은혜는 사라지고 교만이 되어 버립니다.

기억하세요. 하느님게서 받으신 기도가 누구의 기도인지? 어떤 태도의 기도인지를 기억하고 스스로 자기를 성찰하고 주님 앞에서 바르게 서는 태도를 배우고 익히시기를 바랍니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광야를 살자  (0) 2019.02.26
고난을 이기는 기도  (0) 2019.02.26
감사하라  (0) 2019.02.26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9.02.26
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  (0) 2019.02.20

감사하라(시편 50:14-23)

오늘의 시편말씀

사람이 하느님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감사하는 마음 가운데 하느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저는 미국의 명절 감사절을 생각하기 보다는  여러분의 삶에서의 감사함을 찾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 가운데 은혜가 있고 감사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갑니다. 그만큼 감사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분의 삶에 감사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감사는 습관입니다.  감사할 아는 자녀는 훌륭하게 자랍니다.  그것이 자녀들을 성공한 인생으로 만듭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부모가 어떤말을하고 어떤 습관을 가지고 사느냐를 따라 똑같이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녀들을 원하십시니까? 감사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세요. 

수도원과 감옥은 매우 흡사합니다. 다르다면 감옥은 원하지 않아서 있는 것이고 수도원은 스스로 갖혀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하느님께 감사함으로 일생을 기도하며 사는 곳이고 감옥은 죄를 지었지만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수도원은 천국같다고 말하지만  감옥은 지옥같다고 말을 합니다. 결국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는 감사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매사에 불평을 하며 삽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분명히  행복을 누립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불평하는 사람은 은혜를 얻지 못하지만, 작은 일에도 감동받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경험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렇듯 신앙의 기본은 감사입니다.

남들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적은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감사를 느끼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도 고난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을 끼쁘게 하는 감사의 생활을 있습니까?

1, 원망을 하지 않는다.

사람의 체질은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가진 죄의 본성이 불만족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망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구원하셔서 광야로 갔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향해 가면서도 불평을 그치지 않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지만 이집트에서 먹던 부추와 마늘과 양파를 찾습니다. 하느님게서 기적으로 40년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먹이셨지만 그러한 기적적인 공급에 대해서 감사하기 보다는  끊입없이 불평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우리 세상을 보십시오.    온통 불만 투성이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통 불평이 많습니다. 하느님게서 세상의 모든것을 축복해서 주셨지만 하느님이 나에게 준것이 무엇인가?라고 불평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도  넘치는 것을 받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병의 권위자인 브렌드 박사는 고통을 만드신 하느님 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고통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신경이 죽어서 손을 뜨거운 곳에 넣어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몸은 고통을 느낍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고통을 느끼고 아픔을 느낄때 그것이 내가 살아있음으로 겪을 있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아픔이 있으면 그것은 치유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나의 눈으로 볼때는 불평이 되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때는  축복을 베풀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불평으로 삶을 죽이기 보다는 감사함으로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2, 환란중에 감사합니다.

환경이 좋고 될때는 누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에서 감사하는 것은 믿음으로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기에  감사를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여호사밧은 하느님을 섬기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민족인 모압과 암몬이 유대땅을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겪에  됩니다. 이때 왕은 모든 백성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 금식하며 부르짓기 시작합니다. 전쟁에 나갈때 찬양대를 앞세워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게서 이들을 도와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고  나라를 보존할 있었습니다. 먼저 기도와 감사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가난해서 신문을 팔며 공부를 했는데 한번은 열차에서 실험을 하다가 불을 내번하여 차장이 그를 열차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때 그는 귀를 다쳐서 장애인이 됩니다. 이후 에디슨은 고백하기를 자신의 귀에  딴소리 들리지 않아서 연구하는게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감사입니다. 어떤 환경도 하느님의 주권아래에 있으며 그러므로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우리는 능히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이겨 낼수 있음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3, 모든 일에 감사합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뜻입니다.”(살전5:16) 주님의 명령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챤의  기본 생활입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이와같은 현상이 반드시 일어나고,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사는 사람은 인생이  기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쁨은 기도로  응답하게 되고 기도로 충만한 삶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로 이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서도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아들을 잃고 고통을 겪었지만 회개하며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욥은 환경에 의하여 모든 재산을 잃고 가족도 잃는 불행 가운데 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함으로  예전보다 많은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감사는 하느님께  회개하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하는 세상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야 위무입니다. 왜냐하며 이것이 하느님게서 바라시는 우리를 향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기며 사는 것이 불행입니다. 하느니므이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느님의  일이 일어나고 은혜의 열매가 열립니다.

여러분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에는 절대로 기쁨과 축복의 열매가 없습니다. 부부간에 가족간에 이웃간에도 원망과 불평과 시기가 있으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행복하게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와 환경과 상황에서도 감사한 마음을 지키십시오. 사람을 보고 환경을 보고 자신을 보고 감사한것은 잠시이고 사라집니다.  반드시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더욱 풍성해지고 기쁨과 기도와 감사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아멘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고난을 이기는 기도  (0) 2019.02.26
감사한 자의 기도  (0) 2019.02.26
감동을 주는 사람  (0) 2019.02.26
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  (0) 2019.02.20
제자가 되려면  (0) 2019.02.20

감동을 주는 사람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마음이 약해진 탓일 것이다.과거에 남자는 일생동안 번만 눈물을 보여야 한다고 강요 받아왔다. 그런데 말이 맞지 않는 같다.요즘들어 고국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울컥하여 눈물이 때가 많아졌다. 특별히 대통령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것이 연출이라해도 보기 좋다.그런데 진심이 느껴진다.언제부터인가 공직자들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흉악스러워졌다. 심지어 국민들은 돼지라는 막말까지 들어야 했다. 우리들이 주는 세금으로 풍요와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사는 자들의 오만함을 보면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 대통령이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받는다. 이유는 단 하나,사람대접을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위에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사람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짓누르고 있는지 모두가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갑을 관계이다. 대부분은 을의 자리에 있다. 모든 을의 사람들은 갑이 되기 위해 일생을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난다. 사실은 누구도 진정한 갑이 될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그런데도 어설픈 갑이라도 되보려는 것은 사람의 욕심일 뿐이다. 이런 삭막한 시대에 대통령이 낮은 자세로 섬김의 모습을 보이니 국민들이 감동을 받는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는 자신의 온 가족을 데리고 갑의 최고봉에 올라 앉아 사람들에게 온갖 실망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근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케 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감동시킬 수 없기에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일생을 의미있게 잘사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가정에서 서로에게 감동을 준다면 부부와 자녀관계는 좋을 밖에 없을 이다. 우리 세대만해도 감동을 보고 자라지 못해서 마음은 있지만 행동으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때 마다 많이 아쉽고 속이 상한다. 그때 말을 못하고,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그때 사람에게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와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기억속에 남아있다. 교육이 무엇인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래전 뉴질랜드에서 사제품을 받을 그곳 동료사제가 손수 바느질해서 만들어준 빨간색 제의용 스톨을 사용할 때마다 그 분의 마음을 되새기게 된다. 어느날은 시계줄을 바꾸려고 갔는데,볼품없이 시계를 보고 주인께서 같은 것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을때 의아했지만 진심을 알고 새것으로 교환받은 적이 있다. 그리 비싼 시계가 아니어서 부담은 적었지만 감사함으로 시계를 볼때마다 그분을 위해서 마음으로 기도할 밖에 없었던 기억도 있다. 감동이란 살아야 하는지 가치를 알게 주는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사는 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있을까? 내가 진심을 다하여 상대방이 감동을 받을 있다면 사람의 가치를 표현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도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는 말씀을 실천함으로 온 세상을 감동시키셨다.부디 겸손히 섬기는 사람들로 인하여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살기좋은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설교 말씀'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감사한 자의 기도  (0) 2019.02.26
감사하라  (0) 2019.02.26
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  (0) 2019.02.20
제자가 되려면  (0) 2019.02.20
제성일  (0) 2019.02.20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