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1:1-8  벧후 3:8-13

 

여러분은 하느님을 만난 느낌을 가지고 있나요?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이었는가? 하느님을 만난 사람, 하느님을 만나며 사는 사람은 인생이 행복하다.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인생의 답이 그분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곧 나를 아는 것이요. 나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고뇌로 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존재와 나 자신의 존재는 일치한다. 따라서 인생의 방황이나 의심이나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곧 번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밖에 없다. . 

     

사람들은 모든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사는 목적은 행복이다. 돈버는 것 자식 키우는 것, 활동하는 것, 공부하는 것, 신앙생활하는 것.하느님이 존재하는 것, 예수가 오신것) 그런데 행복한가요?

왜 안 그럴까요 이유는 행복의 중심에 온전하지 못한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내 중심으로 하니까,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지 않다. 우리들이 지금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렵고 하다면 지금 내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찾아서 몸부림치는데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 살지 않는 한 그 무엇으로 채운다해도 그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세례요한이 하느님을 만나며 사는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요한은 제사장 즈가리아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에는 신분도 있고 잘사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그런 가정에서 어려서 부터 종교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고 자랐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편안한 길을 버리고, 스스로 광야를 찾아갑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불행하고, 고통받는 생활이다. 그는 왜 광야생활을 선택했을까?

 여러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구약에서 부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공통된 행동들이 있는데, 홀로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 ? 우리들 생활은 복잡하고,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잊고산다. 이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하느님을 느끼기가 어렵다. 하느님 음성을 못듣는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피정, 묵상, 안식일, 기도 등의 행위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구체적인 일이다.) 따라서 광야에 나가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하느님은 선택한 자들은 광야로 부르셔서 당신을 드러내셔서 말씀하시고 듣게 하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애서 하느님을 만난다. 사울도 다메섹 길 즉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된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시나이반도의 광야를 보면 허허벌판이다.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느님만 의지해야 한다.

 

여러분 여기는 광야입니다. 고향을 떠난 삶은 광야이다. 그런데 사람이 많다보니 하느님을 의지 하기 보다는 사람들 끼리 의지하고 믿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이렇게 하면 광야생활은 실패한다. 하느님게서 광야로 부르신 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당신을 만나도록 , 듣도록 특별히 선택하신 것이다. ? 하느님을 정확하게 알도록 하시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허울을 다 벗게 만드는 곳이다.그러니 스스로는 부끄럽지만, 본질의 모습을 알게 된다.알고 보니 자신이 그리 대단치 않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 머리숙여 겸손히 바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느님은 존재하십니다

 

광야는 세가지의 행복을 준다.

1, 회개

요한이 가장 먼저 광야에서 선포한 것은 회개인데 그가 먼저 광야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벗어드린것이다. 그는 화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것을 허울을 다 벗어버린 자의 모습은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별것도 아닌 사람이 광야에서는 다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회개이다. 여러분 죄를 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아십니까? 죄가 보인다면 그는 거룩한 인생을 살수 있고 그것으로 인생의 고민을 안해도 됩니다. 회개는 죄가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죄가 보여야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보여야 딲습니다.    

 

2, 세례

세례는 축복이다. 세례는 하느님께 나를 등록하여 보여드리는 것이다. 광야에서 나와 하느님이 함께 만나는 자리가 곧 세례의 자리인것이다. 그래서 광야는 축복의 장소이다. 그래서 은자들이 광야에서 나오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 사해공동체는 매일 하루에 두번 세례를 재현했다. 성당입구에는 대부분 성수가 있는데 사람들은 들어오고 나갈때 성수를 적시며 세례의 은총을 기억한다세례는 거듭남의 증거이다.   

3, 꿈을 꾼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나라를 경험하며, 그 나라를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하게 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 왔다.광야를 지나면 가나안이 있다. 출애굽의 여정은 고난의 길이 아니라 꿈을 꾸는 과정이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의 글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꿈을 꿉니다. 몰입하면 꿈을 꿉니다. 꿈을 꾸면 언젠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졌을 때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꿈다운 꿈입니다.

여러분의 꿈을 꾸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인가를 베드로 후서에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은 한분이시고, 진리이다. 따라서 절대로 변함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만들어 버린다.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이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허황된 오해를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허황된 하느님이다. 광야의 경험이 없는 자들은 이렇듯 하느님을 가지고 우상놀이를 한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 백성이 하느님을 모르는도다.” 그들이 어리석은 우상에 빠져 있을 때 듣는 말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만나고 나면 정확한 디렉션을 받아 인생을 살기에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의 의미와 지금 가는 길의 방향,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의 변화되는 감을 가지고 살면 불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인생의 답이 없고 불안하니까. 행복이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만나 살기를 간구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 신학이 세워졌다. 민중신학, 복음신학, 성령신학 등 그런데 미국 이민사회 가운데 나온 신학이 광야신학이다.이민자들의 Identity를 신학자들이 성서에서 찾아보니 그 중심에 하느님의 의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인구가 200만이 넘었다고 본다. 2011미국에 한인들이 방문자를 합해서 대략 2157천 이라니 거의 비슷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나와 가나안 이라는 복된 땅을 목표로 가는 것이다. 이들의 출발은 이집트 탈출이었다. 2백만이 함께 떠났지만, 모세 만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나섰을 뿐 대부분은 그저 현실이 괴롭고 힘들고, 이집트 정세가 싫고,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냥 탈출해서 떠난 것이다. 어찌 시작되었든지 간에 모세와 한배를 타고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온갖 고생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산다. 그 가운데 일부는 왜 떠나왔는냐며 불평하고, 일부는 다시 돌아가고, 일부는 타락하고, 그러다 죽었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을 의지하고 확신을 가진 자들은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된다. 여러분 우리의 이민생활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이 광야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과 아닌 것의 결과는 이미 성경에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깨달아 사는 것이 지혜요 은총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장소이다. 하느님게서 이스라엘을 4개월이면 충분히 갈수 있는 가나안 길을 40년간 이끌고 다닌 이유는 과거의 그들의 종살이 하던 성품을 변화 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변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간들 이집트에서 살던 종의 성품이 그대로 있다면 이집트에 사나 가나안에 사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아직도 이 광야에서 살면서도 과거의 삶을 고집하고,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그렇게 살면 광야에서는 죽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부르셨고, 가나안의 행복을 약속하셨고, 무언가 미래의 역사적인 소명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을 알면 광야생활은 즐겁고 복된 것이다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광야에서 사는 겁니다. 이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하느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 답을 얻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나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광야에서 살아날 방법이나 요령은 없습니다하느님의 진리에 전적으로 맡겨질 때 비로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어 살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자유를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바라고

하느님게 진지하게 나의 문제를 물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답을 주십니다. 이곳이 광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응답을 듣는 기적같은 장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광야에 부름받은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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