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을 향한 공동체


함석헌 선생에 대해서는 제가 seminary에서 접하게 되었다. 성공회에는 별난 사람들이 많아서 기독교뿐 아니라 유불선에 대한 관심들이 많던 시절이었다. 민주화 투쟁이 극심하던 때여서 신비적인 보다는 현실적인 신학과 믿음에 대한 고민이 많았고, 해방신학과  우리의 민중신학을 공부하였다. 그때  유영모선생 이현필선생들에 대한 책들도 접하고 함석헌 선생도 접하게 되었다.  우리는 학교에서 6년간 공동체생활을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성무일과 등을 통해서 기도를 몸으로 익히고 수련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후 공동체에 대한 관심으로 살다가 나중에는 뉴질랜드의 프란치스코 성공회 수도원에 입회하게 되고 그때 본격적으로 공동체수련생활을 하게 되었다. 공동체에서 성서를 사는 지혜를  배우고, 하느님을 만나는 길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배우게 되었다. 나는 성직자의 관점에서 통일은 하늘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까지 인류의 역사는 분열과 파괴와 전쟁의 역사이다. 심지어 종교를 이용해서도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인류이다. 그러므로 인류의 자발적인 능력으로 평화와 통일의 역사가 만들어지기는 어렵다고 본다. 인류는 처절히 피를 흘려야 그나마 제한적이고 불완전한 통일을 만든다. 그러나 우리가 바라는 평화와 통일은  피흘리지 않고 온전한 평화통일을 이룩하는 것이지 않은가?       

통일을 해야 하는가? 이유가 분명해야 한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이라고 말하는데   소원이 되는가?  목적이 무엇인가?  경제적인 , 군사적인것, 역사적인것, 정치적인것 문화적인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긍극적인 것일까?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 근간이 되어야 것은 무엇인가? 저는 답을 드릴수 없다.  개인적으로 나는 서울에서 태어 났지만 원적이 평남 성천이다. 그곳에  고향이다. 그곳에 조상의 땅이 있고 선산이 있고, 뿌리가 있다.  그래서 절대적으로 통일을 원한다. 나는 명절이면 고향을 찾아가는 귀성객을 가장 부러워하며 살았다. 명절에 찾아 갈곳이 없다는 처럼 서글픈 일이 없다. 그래서 통일을 원했다. 가족과 혈육을 만나기 위한 보다 간절한 것이 어디있겠는가? 여기에는 이념도 환경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이북이 고향이 아닌분들이 통일을 소원하는지 궁금하다.   

 우리에게 있어서 통일은 민족공동체의 회복을 의미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이 공동체성을 회복하지 못하면 통일은 이루어지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경제적인 통일, 정치적인 통일, 사회적인 통일이 이루어지는 것은 온전한 통일이 아니다.  통일이라는  안에는 많은 것들이 포함되어 있어서 우리에게는 마치 재창조와 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다양하지만 그것들이 안에서 함께 공존하는 것이  될것이다. 통일이 된다면 우리들이 생각지도 못했던 일들이 많이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여하튼 엄청난 변화들이 한반도에서는  벌어질 것이다. 사람들에게 그것이 두려울수 있다. 엄청난 일도 작은 일로 부터 시작할 있다. 저는 그것을 공동체운동으로 부터 생각한다. 

 결혼은 남녀가 만나는 작은 공동체를 이루는 시작이다. 이것을 통해서 공동체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들이 모여서 다른 공동체를 만든다, 전혀 다른 사람들이 모여서 작은 공동체 통일을  연습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 삶이라는 것들을 못하고 산다. 분열의 상처가 우리에게는 너무 많다. 그리고 불신도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뉴질랜드에서 6개국사람들과 함께 살았었다각기 다른 언어 문화 백그라운드를 가지고 함게 사는 훈련을  것이다다르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인정하는 것이 쉬운일이 아니었다 경험으로 나는 적응력이 빠르다나를 주장하면 공동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나를 어느정도 부인하고 다른 것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있어야 조화로운 통일 공동체를 이룰수 있다. 다양하고 생각과 사상이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하느님 안에서 어울려 살수 있는가? 그리고 함께 행복할 있는가?  근본적으로는 분배의 문제이다. 대천덕 신부는 사회주의자라고 스스로 고백했다. 나눔의 사회를 원하였다.  대천덕신부의 비젼은 성서대로 살기를 실천하는 것이다. 이것을 살수 없다면 성서는 거짓말이고 예수는 헛것이다. 그는 모든것들이 서로가 나누어지지 않는다면 하느님 나라가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하느님 나라는 각기 다른 세상을 사는 사람들의  통일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남북의 통일도 나눔으로 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려면 먼저 나눔의 마음이 있어야 하고 나눔을  위한 인식의 변화가 우리 사회에 있어야 한다. 남북이 서로 나의 밥을 나누어 먹는다는 전제가 필요하다.  그런 마음이 없이 통일을 논할 없다. 꿈도 꾸지 말아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통일되면 횡재를 하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것 같다. 땅투기, 사업, 인건비 절약 등등 이것이 통일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 

오늘날 기독교가 나눔을 얼마나 믿고 확신하고 있는가?  하느님나라를 이룬다는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나 통일된 나라 세상을 이룬다는 것이나 같은 말이라고 본다. 이것이 이루어지는 것에 대한 신앙과 같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이 없다면 지금 세상을 미혹하는 타락된 종교와 무엇이 다른가?

결국은 나눔을 실천하는 사람들이  남북통일에 기여할 있다. 강원도 예수원 삼수령 목장에 통일학교를 세워서 통일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에게는 삶을 나누는 헌신을 교육하고 있다. 일찍이 세계교회들은 한국교회들은 통일에 나서지 말라고 했다. 분열과 자본주의 교회의 모습을 보이는 교회가 북한에 들어간다면 결과는 비참할 것이기 때문이다. 온전한 기독교가 북한에 세워지기를 바란다.    

퀘이커 공동체는 세계평화에 가장 많이 구체적으로 기여하고 있다. 이들의 평화센터가 활발한 활동을 세계적으로 펼치고 있다.공인된 교인은 세계적으로 33만밖에 안되지만 활동은 여타 기독교가  따를수 없을 정도로  위대하다. 지금 세계곳곳에서 평화,환경운동을 앞장서서 하는 사람이나 단체는 대부분 퀘이커쪽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고 보면 맞다. 현재  필라델리아의 펜들힐에 퀘이커 평화센터가 있다.그곳에는 세계사람들이모여서 참된평화를 배우고 간다. 이들은 공동체로서 연대하며 활동을 하고 있다.   부르더호프 공동체 또한 평화를 이루는 삶을 몸으로 사는 훈련을 하고 산다.  이들의 공통된  특징은 함께하는 공동체 의식이 강하다는 것이다. 요즘 같은 개인주의 사회에서 개인의 욕망을 버리고 공동의 선을 위해서 헌신하는 삶이 존경스럽지 않은가? 

이들은  목적의식을 가지고 공동체생활을 한다. 혹시 떨어져 있다고 해도 생활양식은 같다.세계 어느곳에 있어도 같은 방식으로 통일된 목적과 생활양식을 따른다. 스스로에 대한  훈련이 되어 있고 ,어느 누구와도 어울리는 생활을 훈련한다.

공동체는 전통적으로 세가지의  약속을 지킨다.   

1, 청빈의 (poverty, simple life)

자본주의는 인간의 모든 것을 파괴해 버렸다. 관계 ,환경, 정치 , 경제 결국 돈으로 모든 것을 하려는 사회구조는 인간성을 말살시켜 버린다. 지금 통일을 말하면서 경제적인 부흥을 목표로 한다면  안하는것이 낫겠다. 정의로운 나눔경제가 기본적으로 이루어지는 북유럽의 사회주의 제도가 좋겠다. 수도원이나 평화공동체는 그렇게 살고 있다. 개인의 욕심이 절제 되지 않으면 공동체는 깨어진다. 예수는 가난의 상징이다. 홈리스이다. 예수 믿고 부자되겠다는 사람들은 제정신이 아니다. 거지 예수에게서 무슨 돈을 구하는가? 사람이 돈으로 부터 해방되어야 평화를 누릴 수이다. 예수원같은 공동체는 개인 재산을 용납하지 않는다. 이것이 공동체의 기본이다. 넉넉히 가진 사람들은 너그럽게 돈을 풀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부터 통일은 시작된다.  

2, 순명의 ( obedience)

이것은 서로에  대한 신뢰와 존중의 정신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를때 요구가 하나였다.” 버리고 나를 따르라이것에 동의하면 나와 함께 살수있다. 내가 비워지고 포기되어야 비로서 진리를 나눌수 있다. 그것이 예수 정신이다. 평화는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세워지는 것이다. 남북이 이야기 한다. 그런데 서로에 대한 신뢰가 없다. 상식적인 대화가 부족하다. 서로에 대한 믿음을 먼저 세워야 한다. 그래야 순명이라는 가치가 세워진다. 우리 워싱톤의 교민단체, 시민단체  보수와 진보 모두가  신뢰가 부족한것 같다. 그들만의  모임일 다른 사람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 누가 따르겠는가? 먼저 서로가  신뢰와 존중이 세워져야 한다.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고 한다. 그러면 통일운동 자격이 없다. 서로 만나라. 대화하라. 신뢰를 세우고 존중하라. 그리고 정직하라. 안에서 순명으로 리더들을  따라 행동하면 좋겠다.     

3,정결의 (chastity)    

수도회에서는 독신을 요구한다. 몸과 마음의 정결을 요구하는것니다. 사실은 마음이 정결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공동체는 자기를 성찰하는 삶을 살아야한다. 그것을 가장 우선한다. 내면에 하느님을 만나면 그분께서 나를 보여 주신다. 그것이 진아라고 나의 자아이다. 사람은 가면을 쓰고 산다. 잘난척, 아는척, 있는척, 온갖 헛것들을 뒤집어 쓰고 그것을 자기라고 거짓의 탈을 보여준다. 그래서 인간이 더러운 것이다. 어느 짐승이 인간처럼 거짓의 탈을 쓰고 사는가? 그런 거짓들이 모여서 무슨 평화를 이룰수 있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솔직히 진보단체를 보면  비판이 많다. 그런데 솔직히 그런 자격을 스스로 갖추고 있는지 반성해야 한다. 과거에 시민운동을 같이 사람들  모두가 자리씩 차지하고 재야를 떠났다. 그리고 지금은  비난받는 자리에 있다. 그들을 보고 누가 시민운동을 신뢰하겠는가? 우리는 온전하지 못하다. 그래서 스스로를 성찰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그래야 조금은 나아지지 않겠는가?

제가 수도공동체의 기본을 알려드렸는데 이것은 수도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하느님나라 평화로운 세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사람들이 가져야 기본적인  생활을 2000년동안 이어오고 있는 기독교 전통이다.       

함석헌 선생님은 수도자로 사신분이다. 평생을 수도생활하셨다. 그래야 평화운동을 할수 있기 때문이다. 나를 비우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수 있다. 그들에게서  씨알이 자라난다. 함선생님이 말씀하신 씨알 사상을 성서에 비추어 보면 그씨알은 반드시 썩어야 한다. 그리고 열매를 맺어서 삼십배 육십배 백배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것은 진리이다.  어느 천년된 무덤에서 씨앗종자들를 발견하는데 그것을 신기하다고 한다. 그런데 그씨앗은 역사적 가치는 있지만 할짓은 제대로 못한것이다. 썩어서 죽어야 하는데 말라서 죽어버린것이다. 우리는 썩고 있는가? 아니면 말라가고 있는가? 스스로의 가치를 점검해야 한다.

통일운동은 썩어서 열매맺는 운동이다. 그런 씨알들이 모여서 그런 마음으로 해야 비로서 가치있는 일이 되고 열매가 맺혀질 것이다.   

통일운동은 평화운동이다 우리 민족의 미래가 달려있다. 이것은 한반도에  하느님나라를  완성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활동가들은 공동체 정신으로  살아야 한다. 그만큼 중요하고, 절대적인 일이다. 우리 민족공동체의 운명은 통일에 달려있다. 그래서 우리들이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대의를 위해서는  개인적인 욕망이 앞서서는 안된다.  서로가  성찰이 있어야 한다.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너그러움과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았으면 한다.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 이런 희생 없이 어떻게 통일운동을 것이고 평화운동을 하는가 ? 예수정신을 가지지 않으면 어렵다.개인적인 화해도 못하면서 무슨 민족화해를 이루겠는가? 민족화해와 평화통일은 종교심 같은 신념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분명한 신앙을 가지고 하면 된다. 함석헌 선생은 예수 정신을 민족정신으로 해석하신 분이다. 그래서 씨알 사람들이 하느님의 마음으로 채워져야 민족이 살아난다고  설파하신 것이다.     

결국 통일은  개개인의  많은 각성으로 부터 출발해야 한다. 그래야 통일공동체가 분열과 다툼이 없이 갈수 있다. 우리들 스스로  작은 통일도 이루지 못하고 우리 안에서 평화가 없으면서 무슨 통일을 이룰수 있겠는가?  우리의 소원이 통일이라면 일은 개인을 위한 일이 될수는 없다. 우리 민족 공동체가 함께 하고 누려야 소명인 것이다. 일을 여러분들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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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소한의 만족


미국가정을 방문하였다. 집이 제법 크고 아름답게 가꾸어 놓았다.  넓은 거실 몇곳에는 부부의 취향이 묻어나는 가구들이 가득하여 마치 가구 전시장에 있는 느낌이었다. 집에서 17년을 살았는데 아이들이 자라서 이제는 작은 곳으로 이사를 생각하고 있단다. 자녀들이 장성한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말이다. 2008 미국에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가 일어난 집에 대한 인기가 줄고, 작은 집에 대한 선호가  커졌다고 한다. 기회에 사람들의 의식도 바뀌어지기 시작하였다.  요즘들어   미니멀리즘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미니멀 라이프 , 최소한으로 살기 라는 말이다. 생활을 간편하게 줄이고, 소비도 줄여서  작지만 풍요롭게  사는 운동으로 2000년대에 들어서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특히 운동은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선진국을 중심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어떻게 보면 물질과 자본에 짓눌린 빡빡한 생활로 부터 박탈당한 시간과 여유로움을 찾고 싶어하는 시대의  변화라고 할수 있다.  그동안 인류의 삶은 큰것을 지향하였다. 모든 것을 크고 거대한 것으로 만들고 세우는 일에 몰두해서 인류 문화유산들은 대부분 거대한 구조물로 이루어져 있다. 개인들의 삶도 큰것을 지향하였다. 세월이 흐르면 것이 오히려 애물단지가 되어버린다.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  때로는   것에 집착하던 사람들이  경제적 한파에 의하여 순간에 무너지는 경험을 하면서,  비로서 것이 반드시 좋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이런 상황속에서 적은 것을 통한  행복을 생각하게 되었다. 언제까지나 것을 얻고자 인생을 허비하기에는 우리의 인생이 너무도   짧기 때문이다.  적은 것을 가지고 현재를 알차게  살수 있다는 생각이 미니멀 라이프 운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과거에 이미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그런 삶을  살아왔지만  시대의 욕망을 멈추게 할수는 없었다.  현실적으로  젊은 세대들의 불안한 취업환경은 오랜동안 일인 시대를 살아야 하고, 가족도 예전과 다르게 단촐해 진것도 미니멀 라이프의  동기가 것이 사실이다. 사람들의 삶이 환경적으로 변화된 것이  사회적 트렌드를 만든 것이다. 사실 사람들은 너무 많은 것에 욕심을 낸다. 없어도 될것을 없어서는 안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가정마다 버리지 못하고 쌓아 놓은 물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이것만 나누어도 세상은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미국의 소비주의가 사람들에게 죽도록 일만 하도록 만드는 마약같은 것이라고 경고한 말이 기억난다. 없어도 삶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도, 없으면 안될 같은 착각을 만들어 내는 광고 효과 때문이다. 순간적인 충동과 유행을 따르는 삶이 지나친 소비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지나친 소비를 위해서 과도한 노동을 하는것은 인생을 피폐하게 만들고 삶의 기쁨을 빼앗는다.  소득은 소비의 욕구를 절대로 충족 시킬수 없기  때문이다.

 미니멀 라이프는 소비지향적인 삶의 양식을 바꾸어서 적은 것을 샘물처럼 귀하게 사용하며  행복을 사는 것이다. 이것은 자원을 아끼고 환경을 보호하는 일에도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하느님게서 지어주신 풍요로운 자연환경 속에서 얻어지는 것만 가지고도 인간은 얼마든지 만족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삶은 단순해지고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할 있다. 많이 갖는 것이 좋은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지고 있는 것이라도 사용하고 함께 나누는  나눔의 삶이 어느때 보다 절실한 시대를 우리는 살고 있다. 적은 것에  감사하고 그것을 사용하여 만족하며 즐거움을 누릴 있는 사람은 복된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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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중받는 부모


나는 조부모님에 대한 기억이 없다. 그래서 항상 조부모님은 어떤 분일까 ? 하는 생각을 하면서 살았다.이제 어느덧 자신이 그분들의  자리를 넘보는 나이가 되어, 어른으로써의 삶을 준비하고 있다. 그러나 여러곳에서 나타나는  세대간의 갈등을 보며  어른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도  가족이나 이웃들을 너그러운 마음으로  대하고 시대의 흐름을 따라 살면 최소한  꼰대(?) 소리는 피할 있을 같고,   젊은이들과 더불어  소통도 가능할 같은 생각이 든다. 그래서 어른으로써 사는 생각을 몇자 적어본다.

 유교의  () 사상은 인간의 기본적인 존중의 관계를 의미하고 기독교를 비롯한 대부분의 종교에서도 가족과 이웃간의 예의는 중요하게 가르치고 있다.사실 효는 어른만  대접 하는 것이아니라, 세대간의 존중이 안에 깔려있다. 오래전  강화도에서 사목을 할때,  마을 종가집에 효자문이 세워져 있었다. 그때는   자녀들이 대단하구나 하고 생각했는데 지나고 보니 집안 어른들이 훌륭하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효자문을 어른들이 세워준 것이기 때문이다.  자녀가 아무리 효심이 지극해도 부모의 사랑과 헌신을 따를 없다. 그래서 효자녀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지혜로운 어른들이 자녀들의 정성에 답하여 효자문을 세워 감사를 표하는 것이다. 실제로 어느 집에 아들 내외가 시아버지와 치매에 걸린 시어머님과 함께 살았다. 치매환자가 계시니  집안 분위기가 평안할리 없고, 남편이  병든 아내의 수발을 드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아버지는 사람들을 만나면  아들 내외를 칭찬하고 자랑스러워 하였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녀들의 도움이 크다는 것이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며느리가 사주었다고 자랑하고 아들 내외를 향한  감사를 표현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결국 소문이 퍼져,  지역에서  아들, 며느리에게 효자 효부상을 주었다. 부모님 덕분에 그들은 명예를 얻게 된것이다. 상을 받은 이들이 부모에게 어떻게 하며 살았을까?  결과적으로 효자녀는 지혜롭고 훌륭한 부모가 만들어 주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이들어 불평만하고, 고집을 부리다, 자녀들과 불화하며 사는 사람들을  본다. 똑똑한 어른은 많은데 지혜로운 어른은 없다는 말이 있다. 미국에 사는 자녀들은 교육도 받고 소통이 되니,  세상의  정보가 훨씬 많고 사회를 안다. 그런데도 한국에서 예전에 살아온 세월을 말하고, 경험을 내세워 말만 들으라는 어른들이 있다. 소통이 안되면 젊은이들은 어른의 곁을 떠난다. 자녀나 젊은이들에게 답답한  꼰대(?) 노릇을 하면  끼워주지 않는다. 그래서 나이가 들수록 말은 줄여야 하고 듣기를 많이 해야 한다.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명심하고 살아야 한다. 그래서 다양한 책을 보고 새로운 상식을 넓히고 자아 성찰에 많은 노력을 해야 한다.젊은이들 하는 것이 마음에 안든다고 나서지 말자. 우리도 그렇게 실수하고 넘어지며  지금까지 잘살았다. 그것이 청춘이요, 성숙의 과정이다. 어른들은 어린 세대를 너그럽게 대하고  칭찬하고 아껴주는 것으로 존중을 받는다. 그러며  젊은이들이 스스로 다가와  지혜를 구할 것이다. 때를 인내로써 기다리자. 이것이 서로 존중하며 긴나긴 노후를 행복하게 더불어 살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생각한다. 우리의 자녀들을 모두 효자녀로 만들어 보자. 그것은 우리가 하기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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