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과 신앙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청문회 때문에  창조론이 새삼 논란이 되었다. 최근에 나온 말은 아니지만, 창조과학회가 주장하는  지구의 나이가 6000년이라는 내정자의 신앙에 대한 소신을 보면서 신앙과 이성,상식에 대한 생각을 보았다. 사실  지구의 역사가 6000년이라고 가정하면, 구석기 시대는 완전히 사라지고 신석기시대도 의미가 매우 약해진다. 그리고 과학적으로 규명되어진 모든 것들이 거짓이 되어 버린다.

  1610년경 갈릴레오는 지동설을 주장했다. 그동안 교회에서 믿고 가르쳤던 천동설을 뒤집는 엄청난 반란이었다. 이것으로 갈릴레오는 로마교황청으로 부터 유죄를 선고 받아 일생을 종교의 억압속에 살다 생애를 마감하였다. 그러나 로마 교황 요한 바우로 2세는 1992 갈릴레오를 복권하며 그동안 교황청이 잘못된 결정을 내렸다고 인정하였다. 이미 세상은 알고 있는 상식이요, 사람이 우주를 다니는 때에 뒤늦은 교회의 반성이었다. 21세기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거의 무한한 정보와 테크놀로지를 가지고 생활하고 있다. 이제는 누구나 스마트폰으로 모든 정보를 보고 스스로 합리적인 생각을 있다. 그만큼 이성적인 판단을  할수 있는 방법이 많아진 것이다. 과거에는 교회가 모든 지식을 독점해서 일반인들은 상식적인 조차도 교회에 의존했지만 지금은 달라졌다.  요즘  부부들은 아이들을 인터넷으로 키운다고 한다.  현대를 사는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고 분별할 있는 능력과 자율성이  커진것이 사실이고 인정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이성을 무시하고, 중세시대에  종교적인 권위를 지키기 위해 사실을 왜곡하고 억압했던 일들이, 오늘날에도 일어날 있다는 사실은 깨어서 경계해야 한다. 갈릴레오는 로마 교황청으로 부터 징계를 받고 복권이 되는데 350년이상이 걸렸다. 세상 어린아이들도  알고 있는 상식을 교회가 인정하는데 수백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놀랍지 않은가? 이것은 어리석은 일이었다. 지금도 신앙이라는 이름하에 비이성적인 일들이 21세기에도 일어나고 있다. 오로지 믿음만을 고집하며, 변화와 해석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또다시 수백년을 신앙이라는 이름하에  또다른 어리석은 일들을 저지를 있는 것이다. 주관적인 주장은 때로  보편적이지 않고 상식적인 설명이 불가능한것들이 많다. 그런면에서 사회나 국가의 공직을 수행할 사람이 보편적이지 않은 이론만을 따르고 주장 한다는 것은 적합하지 않아 보인다. 보편적인 지식과 상식에 대한 이성적인 이해없이, 다양한 인종과 문화와 종교들이 공존하고 있는 세상에 균형있는 평화를 이룰수 있을까? 살면서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편협할 있는가?이다. 교육을 받고 나이가 들수록 넓은 사고와 이해를 가져야 하는데, 나이가 들수록 또는 경직된 믿음과 사고로 인하여 답답해지는 것을 본다. 신앙을 갖거나 삶을 위한 수련을 하며, 생각 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상식을 넓히고, 다양한 세상을 향해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있는 이성을 키우는 것이 아닌가 싶다.  비이성에  자기만의 신념이 들어가면 누구도 말릴 없는 고집불통이 되어 이웃과 세상을 힘들게 한다.  이성은 하느님으로 부터 받은 귀한 선물이다. 상식적인 생각과 이성적인 믿음을 통해서 진리를 향해 사는 것이 참된 믿음이요, 가정과 사회와 세상을 평화롭게 만드는 종교의 참된 가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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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 닦으라


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身齊家 治國平天下) 중국의 고전 예기에 나오는 말로써 혼란한 시기에 중국에서 서로 잘났다는 인물들이 나와 우후죽순격으로 권력을 잡으려 하니, 이에 먼저 자기의 인품을 닦고,  가정을 이루고 나라를 다스려야 비로서 세상에 평화를 이룰수 있다는 말이다.  사람이란 인격을  갖추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다. 사람으로서 갖추어야 인격이 부족한데 돈과 권력이 있다고  리더가 되는 처럼  세상에 불행한 일은 없다. 인류역사는 그런 자들로 인하여 문명이 파괴되었고 분쟁이 일어났다. 사람보다 돈과 권력이 우선하니 행태가 걱정이다.  우리 사회가 언제부터인가 인간의  도리와  분별력을  잃어버린 사람들로 인하여  온갖 추문에 휩싸여 있다. 성추행과 뇌물과 부정한  일들로 인하여 손가락질을 받는다. 나이와 배움도 소용이 없다. 제법 유명하다는 사람들이  비상식적인  못된 짓들에 연루되어 속속 드러나고 있다. 물론 과거에도 있어 일이였지만, 약자들의  울부짖음은 항상 권력에 묻혀버리고, 그들은 다시 부활하며 기세를 날리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달라졌다. 아니 달라져야만 한다. 이것이 정상적인 세상으로 가는 길이다. 너무 오랜세월 왜곡된 의식속에 갖혀 살았기에 이제는 그것을 벗고 정상적인 인간성 회복운동에 나서야 할것이다.    

어느  집성촌에서 경험한 일이다. 마을이 집안이라 유교적인 위계가  있던 마을이었다. 그런데 마을이 개발되고 갑자기 값이 올라 졸지에 부자가 사람들이 생겨나고 개발이익에 눈을   젊은층이 늘어나기 시작하면서, 나이들어 재테크에  밝지않은 어른들은 자연스럽게 소외 되었다. 어느덧 재력없는 어른들은 세상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 취급을 받게 되었다. 마을의  발전을 보면서, 개발로 인한 인간성의  타락도   있었다. 경제적 능력이 없으면 어른취급도 못받는다는 어르신들의 넉두리가 현실이 되었다. 예전에는 어른이 있고,  인품만으로 충분히 존경받았다. 그리고 그분들의 인격을  따라 배우려는 마음들이 많았다. 지금의 교육 목표는 무엇인가? 자녀들 교육에도 인성을 키우는 보다는  잘버는 능력을 키우는데 집중 되어있고, 그것을 세상에서는 성공이라고 말한다. 남을 돕고 함께 살아가는 것이 좋은 세상이라는 가르침을  통해서,  봉사하고 어려운 이웃들을 돕는 실천이 있어야  살만한 세상인 것이다. 오늘날 우리들의 일그러진  사회상속에는 바른 인성교육과 실천을 제대로 하지 못한 우리 모두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먼저 자녀부터 올바른 인성을 위해서 부모가 바른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한다. 가장 나쁜 교육 가운데 하나는 부모가 잘못 살면서 자녀에게 너는 나같은 인생을 살지 말라 가르치는 것이다.자신의 인격을 바르게 세우려고 노력하며  올바르게 사는 모습을 보여 주려 하지않고 잘못된 삶을 닮지 말라고만 하는 것은 부모의 자질 문제이다.  

요즘 교회에서 중독치유에 대한 모임을 한다.미국 사회에서 만연하는 알콜과 마약과 여러가지 현대사회에서 얻어지는 중독들을 논하면서 결국은 부모와  가정생활로 부터 후손들의 중독성이 습득된다는 말을 들었다. 한사람의 잘못된 인격이 가족에게 유전처럼 전해 지는 것이 무서운일이 아닐수 없다. 현대 사회는 편리함과 더불어 인간성을 파괴시키는 많은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들로 인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희망을 잃고 살아가고 있다. 지금 사회적으로 논란이 되는   사람들이 배움이 부족하고 똑똑하지 않아서 그런 어리석은 죄악에 빠져 있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스스로 인격장애를  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자기에게 이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 조차도 모르고 산다. 깨어서 나를 제대로 볼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들이 종교나 각자의  노력으로  수덕(修德)생활을 하는 것은 재물의 복과 성공을 목적이 아니다. 나의 인성을 바르게 하기 위한 노력이다. 우리가 아는 성인(聖人)들이나 존경하는 분들의 인격을 배우며 나의 거울로 삼는 사람들이 많을 수록  세상은 안전하고 평화로워질 것이다. 우리는 어느 정도는 수도자(修道者)같은 자세로 자기를 돌아보고 인격을 닦는 일에  게을리 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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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직자들의 행진


2017년821 전국에서  성직자들 3천여명이  워싱톤, 마틴루터 기념관앞 광장에 모여 미국의 정의를 위한 행진을 하였다. 자리에는 모든 종교 성직자들이 함께 하였다.  평화를 이루고 정의를 세우는 일에는 모두가 마음인 것이다. 나도 아침부터 우리교회의  성직자들과  함께  좋은  날씨를 만끽하며 기분좋은 출발을 하였다.  메트로역에 정차할때 마다 모르는 성직자들을 만났지만, 서로 인사를 나누며 즐거운 담소를 이어갔다. 심지어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분들도 있었다. 내게는 특별한 행사였지만 , 미국인들에게는 일상처럼 가볍게 느껴졌다.  때로 사람들로 부터   성직자들이 사회문제에 참여하느냐? 질문을 받는다. 그러면 나는 참여를 하면 안되냐? 되묻는다. 우리 모두는 지금 사는 나라의  국민이다. 나라의 국민으로  세금을 내고 살면서 , 국가나 사회가  잘못된다면  국민의 권리를 가지고 의견을 표현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땅의 삶을 버리고, 천상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다. 성직자는 양심을 가지고 시대에 대해서 바른 말을 하고 그것을 가르쳐야 책임이 있는 사람이다.

 한국에서 성직자에 대한 징세가 논란이 되었지만  23018년부터는 성직자도 새금을 낸다니 다행이다.  오랜동안  제기 되었지만,  일부 종교계의  반대로 실행을 못했다.  국민이라면 누구라도 예외없이 세금을 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미국은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세금을 낸다. 그래야 성직자도 국가에 대해서 말하고 저항하고 권리를 주장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이로써 미국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전국의 성직자들이  모인 것이다. 한시간의 거리를  행진하면서 만나는 사람들마다 서로를 격려하며 우리가 하는 행진이  나라를 변화하는데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먼길을 걸어도 좋겠다고 말을 한다. 어떤 목사님은 이민자 사역을 하시는데, 신시내티에서 일부러 오늘 하루를 위해 오셨단다.  행진을 마무리 하는 자리에서  반갑게  한인 여성목회자들을 만났다.  한분은 장로교. 한분은 감리교목사님이셨는데  두분 미국교회를  담당 하시는 분들이었다. 사실  이런 자리에 한인교회나 이민자, 소수민족 성직자들의  참여가 별로 없는 것이 많이 아쉽다. 이것이 미국인들만의 관심이며 그들만의 일인가?  우리가  속해서 살아가는 나라의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함께 기도하고 행진하는 일이  작은것 같지만,  워싱톤 한가운데에서 일어나는 이들의 움직임은 전국민에게 멧세지를 전하는 것이다.   세상을 불안하게 하고 미국사회를 분열과 불의로 이끌고 가는  트럼프를 향해서  전국에서 모인 성직자들이 정의를 세울것을 경고하는 것은 성직자로서 당연한 직무라고 생각한다.  성직자는 자신의 종교안에서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일하도록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믿는다. 따라서 이러한 일을 교회가 지원하고 관심갖었으면 좋겠다. 특별히  이민교회들의 참여와 목소리는 사회에 이방인들의  존재감을 알릴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미국민들이 중심이 되서 땅에 정의를 지키고 이민자들과  소수민들의 인권을 위해서 나서는 길에 우리들이 함께 한다면 자리는 더욱 빛날것이고, 실질적인 관심을 얻게 것이다.   교회가 나만을 위한 소원을 이루는 공동체가 되기 보다는 땅의 모든 민족들과 연합해서 정의와 평화를 이루어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로 확대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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