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성찰


가을은 사색의 계절이라고 했던가? 집을 떠나 짧은 여행을 하며 마음속에 뒹구는 상념들을 줏어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마음의 움직임을 바라보며, 마음이  향하는 곳을 볼수 있다면 한결 여유로운 삶을 누릴수 있지 않을까?

한때,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과 영성모임을 만들어, 조용한 곳을 찾아 여행한 일이 있었다. 천주교나 개신교의 수도원을  방문하고, 그곳에서 생활하는 분들과 한잔을  나누며, 세속의 옷을 잠시 벗는 기회를 갖었다. 일반적인 여행이기 보다는 마음을 정화하는 여행이라고 할까. 중요한 것은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 보고, 마음의 소리를 듣는것이다. 사람들은 남의 이야기에 기울이고, 남을 보고 판단하는 일은 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은 들여다 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자기를 모르고 살아가니 사는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때때로 사는것이  재미가 없단다. 그러나 시야를 돌려 자기를 보는 만으로도 생활의 느낌이 달라진다.  자아성찰을 하려면  말을 아껴야 된다. 말을 잠시  멈추기만 해도  변화가 느껴진다. 우리는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하고 산다. 그리고  말의 대부분은 좋은 보다는  남의 이야기나 세상의 사건들이다. 정작 나의 이야기는 기회도 없고,  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나를 알아야  나의 말을 할텐데 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며 사는 것이 별로 없는 것이다.  

뉴스에서 사람들이  저마다  외쳐대는 말을 듣다보면, 저것이 정상적인 사람인가? 의심이 들때가 있다. 요즘같은 혼란의 시기에  경쟁하듯  대중을 향해 선동하는 그들의  말에는 억지와 편협함이 가득하고  뻔히 눈에  보이는 거짓말도  너무나 쉽게 한다.  이런것에 사람들은  분노하고 서로 다툰다. 차라리   듣는것이 낫다. 차이는 있을지라도 사람들이 뱉어내는 말의 많은 부분이 상대에게 상처를 주거나 감정을 상하게 하는 말들이 많다. 이것으로 다툼이 생기는건 당연한 결과이다. 힘들게 살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불쾌한 말이 나온다. 그것은 결국 나에게 돌아와 아픔을 준다. 그러므로  입을 다물어 침묵을 지키는 것으로 평화를 얻을 있다. 침묵은 내면을 다스리기 위한 쉼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피정(Retreat) 떠난다.  피정은  말을 안하는 것이 기본이다.침묵으로 부터  평화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침묵을 하면 들리지 않던  소리가 들린다. 새소리가 들린다. 바람에 움직이는 나뭇잎의 흔들림이 들린다. 작은 풀벌레 소리가 들린다. 그러다 보면  마음의 소리도 듣게 된다.  멈추면 비로서 보이는것들이라는 글을 쓰신 혜민스님의  말씀처럼  그동안 지나친 소중한 것들을 보고 들을수 있다. 이것은 삶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던 내가 깨어나는 것이다. 우리의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만이 다가 아니다. 우리가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놓치는 신비로운 것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이것을 모르고 살아서 재미없는 것이 아닐까?  마음이 깨끗하면 하느님을 볼수 있다고 성서에 쓰여있다. 그만큼 마음을 돌보는 일은  또다른 세상을  살수 있는 소중한 작업이다. 우리 주위에는 아름다운 가을 길이 많다. 그곳으로 떠나보자, 나의 삶의 고민과 문제는 항상 생활속에 있다. 잠시 장소를 떠나 나의 마음의 길을 걸어보자. 그리고 내가 가야 곳을 희망의 눈으로 바라보고 , 마음에 담아보자. 비로서 내가 살아야 세상이 보일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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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


버지니아 샬롯츠빌에서 백인우월주의자들의 테러로 인하여 무고한 사람이 목숨을 잃고 19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현장에  주교들과 사제들과 이웃 교회의 성직자들이 길에 나와 손을 맞잡고 이들을 막아서는 모습이 메스컴에 등장하는 보면서, 이것이 평화를 위해 교회가 존재하는 당연한 이유라고 생각했다. 나만 안전하고 복받고 살면 뭐하는가? 불의를 막지 않고, 이웃이 겪는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교회로서 부끄러운 일이다. 지금 미국교회와 기독교인들이 양심을 가지고  행동만해도 이같은 비극은 벌어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땅에는 누군가를 미워하고 차별하는 극단적인 혐오집단이 존재하고 있고, 그들이 우리와 같은 사회에 살고 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그리고 인종주의 미국 대통령이 수치스럽고,  민주주의와 인권의 가치를 남에게 말하는 미국에서 이러한 일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인종주의가 문제가 되는 것은 같은 인간을 피부색과 문화, 종교, 사회적인 분류를 통해서 인간을 나누고 편견을 만들어 내는데 있다. 이것으로 부터 차별이 생기고 인간에 대한 편견이 시작되는 것이다. 인종주의에 대한 자각이 없는, 우리 사회의 편견과 문제는 크게 자리하고 있다. 우리들이 현실에 대한 인식을 이번 기회에 진지하게  생각했으면 좋겠다.  대대로 신실한 기독교 집안의 여자가  뜻을 품고 아프리카로 선교하러 떠났다. 그녀의 열정은 아프리카 현지에서 인정을 받았고, 나중에는 현지 남성을 만나 결혼까지 하여  남편은 목사가 되고, 여인은 성공적인 선교 목적을 이루었다. 세월이 흐르고  그들이 자녀들과 함께  한국을 방문했다. 그러나 가족들은 이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선교는 좋지만 결혼은 안된다는 인종주의 때문이었다. 결국 하느님의 보편적인 사랑을 말하면서도 인종주의를 극복하지 못하는 경우이다. 미국에서 일어나는 인종갈등도 있지만 사실 우리 사회에는 온갖 차별들로 인하여 갈등하고 있다. 사람사는 어디를 가도 텃세가 있다. 그래서 나는 미국 정착이 어렵다고 호소하는 분들에게 텃세를 인정하고 인내하며 그들에게 닥아 가라고 충고한다. 어디를 가나 텃세로 차별을 받는 것이 세상이다.  요즘 도시인들의 귀농이 늘어나면서 농촌도 이방인과의  갈등이 많다는 말을 들었다. 결국 사람이 사는 모든곳에서 어떠한 이유로도 차별하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자기와 조금만 달라도 견디지 못하고 공격하는 것이 인간의 본성인가? 한때 켄터키의 보수적인 백인들의 작은타운에서 살았다. 식당에 가면  외계인을 대하듯 나를 신기하게 주시하는 백인들도 있었다. 그들 가운데는 평생 자기 동네를 벗어나 본적이 없는 사람들도 의외로 많았다.  이들을 보수적인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같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가 알지 못하는 사람과  인종에 대해서 경계하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다. 단지 내가 모른다는 이유 때문이다.   

우리들은 한국에서는 생각해 보지도 않았던 인종주의라는 문제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어떻게 문제를 보고 답을 찾는것이 쉽지않다. 이러한 미국에서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극복할 것인가?  우리는 인종주의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야 시점에 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서로에게 가까이 닥아가서 친구가 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한인들이 인종주의 말들을 하면서 상대를 폄하하는 말을 들으면 불편하다. 그들을 상대로 먹고 살고 있으면서 그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보면서 얻을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와 많이 다르지만 그들도 같은 사람이다. 인종주의 갈등으로 부터 해방되려면 우리 스스로 편견을  버리고 서로를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진심있는 사랑의 마음이 많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이민자들과 소수민들이 있음으로 사회에 도움이 되고 축복이 된다는 사실을 미국민에게 확인시켜 주어야  한다. 세상의 텃세를 어느정도 감당할 용기와 더불어, 내가 사는 사회 공동체의  평화를 만들어 가는 일에  우리들의 희생과 노력이 따라야 한다. 이것이 인종주의를 완화시키고 더불어 사는 세상을 만드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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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아 기억하라


지금은 사순절이라고 해서 부활절까지 40일간 자기를 돌아보고 수련하는 시기로 삼고 있다. 사순절 시작 첫 수요일을 재의 수요일이라고 해서 머리에 재를 바르며인생아 기억하라 너는 흙으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라는 축복기도를  받는다. 그날은 많은 미국인들이 이마에 시커먼 재를 바르고 하루 종일 돌아 다니는 것을 볼수 있는데, 자기의 존재를 깊이 인식하는 기회로 삼는 것이다. 나도 그날 길에 나가 사람들에게 직접 재를 발라주고 축복을 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반가운 마음으로 찾아와 자기에게 이런 축복의 기회를 준것을 감사하다고 인사를 하였다.

요즘 처럼 삶을 바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자기를 돌아 볼 시간이 많지 않다. 사실 무엇을 위해서 살아가는지 알지도 못하고, 허상의 현실을 쫓아 무작정 뛰어가는 삶이 너무나 많다. 정작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을 주인처럼 살기 보다는 일용품 처럼 가볍게 소모되는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다. 인생을 품위있게 살수는 없을까? 사람의 가치나 인생의 무게가 너무 가벼워진것 같아서 아쉽다 .

플로리다의 고등학교에서 일어난 총기학살로 또다시 17명의 희생자를 내었지만 이 나라 대통령이나 정치인들은 총기 규제를 하려는 생각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다. 급기야 청소년들이  일어나 이들에게  항의하고 있다. 세속의 특권층으로 살고있는 그들에게 매일 죽어가는 민중들의 생명은 전혀 관심밖의 일인 것이다.오로지 정치 자금을 받아 권력을 유지하고 총기단체의 이익과 사업을 보호하는데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이런 사회적 불의와 악행은 결국 인간에 대한 자기 성찰과 반성이 없는 결과이므로 크게 놀랄것이 없다.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는 것은 이성적인 판단과 자기의 행동을 반추하고 그것을 반성할 줄 아는 능력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없다면 그것은 사람의 탈을 쓴 괴물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현실에서 온갖 괴물들이 돈과 권력을 갖고 세상을 괴롭히는 시대를 살기에 백성들은 심히 고생이 크다. 정말 이들에게인생아 기억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인간의 본질에 대한 깨우침이 절실하다.

누구나 괴물이 되기 쉬운 세상이다. 사람이 사람이기를 포기 할수 있는 유혹들이 너무 많다.스스로  사람답게 인격을 지키며 사는것이 그만큼 어려운 사회이다. 정상적인 이성과 판단을 갖고 상식적인 결정을 하고 산다면 세상이 이렇게 나쁘지는 않을 것 아닌가?

사람이 변화하기는 세상이 바뀌는 것 보다 더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한 사람이 변화하면 세상에 큰 변화를 줄수 있다. 사실 우리에게는 새롭게 변화된 사람이 필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때가 되면 재가 되어 소멸한다. 이것을 진지하게 받아들이고 사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대부분은 영원히 갈것 같은 착각속에 또다른 내일을 준비한다. 그러나 내일을 산다는 보장을 누가 할수 있는가? 요즘은 주위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 하나 둘씩 때가 되어 사라진다. 올때는 순서가 있지만 돌아 가는 길에는 순서가 없다. 그런 존재의 소멸을 깨달아야 변화된 삶을 살수 있다. 인생은 결코 길지 않다. 누구도 주어진 인생을 단 하루라도 늘릴수 없다.

“사람아 기억하라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이것이 진리이다.

그러니 너무 욕심을 품고 살지 말아라. 모든 다툼과 불행이 그것으로 시작된다. 주어진 것에 감사하자, 조금은 부족한 가운데 살아야 작은 은혜에도 감동하게 된다. 나이가 들어도 욕심이 줄지 않고 놀부같은 심보를 지니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인생을 모르고 사는 사람이라고 봐야 한다.. 부디 세상에 반딧불 같은 희망이라도 비추는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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