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꽃보다 아름다워


내가 마음에 두고 부르는 노래가 안치환의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라는 곡이다. 어두운 시절을 힘들게 살던 사람들에게 사람의 가치를 표현해준 노래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아름답고 귀한 존재이다.  사람은 어떠한 이유로도 억압하거나 무시하거나, 가벼이 여겨져서는 안된다. 그런데  지금 세상은 사람을 경시하고 홀대하는 일들을 만들고 있다. 서울 어느 동네에서는 장애인 학교를 세우면 집값이 떨어지고 주거환경이 나빠진다고 반대하는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물론 그들도 나름 정당한 권리를 가지고 반대를 하겠지만, 세상에 사람의 인권과 생명보다 앞서는 권리라는 것이 무엇인가는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잠재적 장애인이다. 나이들고 몸이 약해지면 자연스럽게  장애인이 된다. 다만 어떤 사람은 태어나서 부터 아니면 사고로 장애를 먼저 겪을 뿐이다. 특히 어린 장애아들을 위한 교육과 돌봄은 사회에서 가장 먼저 배려해야 의무이다. 이것을 잘하는 사회가 선진국이고 사회이다. 얼마전 본당 장의자를 일부 치우고  휠체어를 위한 공간을 편하게 만들기 위한 작업을 하였다. 너무 오래된 건물이라 본래 장애인을 위한 공간이 없어서 고민했는데 숙원사업을 마친것이다. 한사람을 위해서라도 무언가를 배려하는 것이 진정으로 사람사는 공동체이다.  

사회에서 시급으로 사람을 계산하는 현실을 경험할때면 천민 자본주의가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비인간적인 제도라는 생각을 떨칠 없다. 사람은 돈만으로 따지고 평가 할수 있는 허접한 존재가 아니다. 한시간의 생명을 몇푼으로 가치를 따질 있는가?  인간의 삶을 돈으로만 환산하는 처럼 잔혹한 일은 없는 것같다. 사람을 하느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어진 천하보다도 귀한 존재라고 성서에서 규정하고 있지만, 현실 세상은 전혀 다르게 사람을 대한다. 이런 구조에 모두가 매몰되어 살면 인간성을 사라지고, 돈만 남게 된다. 모든 사람을 돈으로 보고 사람의 가치를 따지게 되니, 아름답고 진실한 인간관계를 찾아보기 어려운 불행한 시대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천당과 지옥을  죽어서 간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살아서 얼마든지 경험할 있다. 사람의 가치가 존중받고 서로가 신뢰를 사는 곳이라면 그곳은 천국같은 곳이요. 그러나 불신으로 가득차고 사람의 가치를 돈으로만 따져 묻는 이기적인 사회라면 그곳이 지옥이 된다. 이것을 만들고 결정하는 것은 사람이다. 혼자 살기 위해서 남의 불행과 어려움을 외면하고 살면서 불안한 사회를 조장하는 것은 스스로 지옥을 사는 것이 것이다. UN에서 트럼프는 전세계 사람들을 향해서 오로지 미국만을 지키기 위해서 싸우겠다고 선언하였다. 따라서 한반도에서도 전쟁을 일으킬 수도 있단다. 미국을 위해서, 대한민국에 사는 우리 가족들이 희생을 당해도 상관 없다는 말인가? 정상적인 사람이 할수 없는 말이다.  사람 생명에 대한 관심과 배려를 찾을수 없는 것보다 악한 것은 없다. 따라서 우리 사회는 경제와 돈보다 먼저 사람이 우선해야 한다.  한가위 추석이다. 국민을 이용하여 거짓과 선동을 일삼는 것들에 흔들이지 말고, 가족과 이웃들과 어울려 서로의 이야기에 기울이며, 삶을 함께 나누고 사람에게 관심 갖기를 바란다.  아름답게 집을 치장하고 좋은 차를 탄다 해도 이웃의 눈물과 고통이 있는 우리는 행복한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꽃보다 아름답다. 당신도 꽃보다 아름답다. 그러니 서로를 함부로 대하지 말자. 그래야  행복한 세상을 함께 누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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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별을 잘하자



한번의 선택이 십년을 좌우합니다라는 카피가 한동안 유행했었다.  우리 생활속에서  선택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선택으로 나타난 결과에  따라  사람의  인생이  바꾸어 질수도 있다 . 그래서 선택 이전에  분별이 중요하다.  지금 처럼 선과 악의 분별이 어려운 시대에    분별력을 가지고 시대를 읽는 능력은  더없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속한 성공회에서는 성직 청원자가 생기면   분별심사를  몇년 동안 걸쳐야  성직과정에  들어 갈수있다. 그만큼  분별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본인은 스스로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고 부족한 부분을 채우는 일을 하게 된다. 나라의  대통령을 뽑거나  어떤 공동체의 리더를 세우는 일도 성숙한 사람들의 분별로 이루어진다면 세상은 좋와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우리 스스로  좋은 선택을 있는 분별력을 키우는 것은 중요하다. 무엇을 평가하고 상황을 보는 시각은 사람마다 다를 있다. 그러나  기본이  충실한  상식을 가지고 생각하고 나눈다면  얼마든지  최선의 선택을 있다고 본다.  다양한  지식을 배우고, 능력을 키우기 위해 교육을 받는다. 그렇게 교육을  받았다고 해서 분별력 있는 인재가 만들어 지지는 않는 같다. 세간에  논란을 일으키는 인물들을  보면 그들이 학식과 재능이 부족해 보이지 않는다. 문제는, 사람을 생각하고 세상을 위하는 분별력과 상식이  부족하다는데에  있다. 돈으로만 사람의 가치를 판단하고 , 잘못된 차별 같은 것들이   분별력을 흐리게 만드는 요인이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허세와 거짓을 통해서 세상의  분별력을 흐트리려고 하는 전략을 구사하기도 한다. 이런 세태들로 인하여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은 아닐까?

나는  분별의  능력을 키우기 위해, 일상속에서 교육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일방적으로 판단하고 선입견을 갖게하는 것이아니라, 바른 상식을 키우고, 스스로 선한 목표를 위한 분별을  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먼저 자기를 아는 것을 법을 배워야 한다. 분별력이 떨어지는 것은 지나친 욕심때문에  겸손하지 않고, 남을  존중할줄 모르는 교만한 마음으로 부터 나온다.  내가 사는 것이, 무엇을 위한 것이고 이것으로 우리 모두가  행복할 있는지를 먼저 생각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스스로 결정한  일에 대해서  분명한 책임을  갖는 것이다. 우리는 선택해서 지금의 자리를 만들었고,  열심히 살고 있다. 이민을 온것도  나의 선택이다.그러니 이곳에서 더불어  행복하게 살아야 책임이 있다.  무언가 잘못했다고  깨달으면 그것도 배운것이다. 분별의 능력은 실패와 성공을 통해서  얻어지는 지혜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긍정적인 마음으로 모든 것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잘못하면 편협하고 주관적인  판단에  머물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앙심을 갖는 것도 상식적인  분별력을 위한 자기 수련이 필요하다. 자칫 자기의 신앙심으로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한다면  또한 분별없는 신앙이 되어,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성숙한 상식을 통해서  정상적인 소통이 이루어진다. 소통이 되어야 세상이  행복하다. 우리 사회가 분별의  지혜를 통해서 나은 공동체를 이루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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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려하며 산다는 것


자공이라는 제자가 공자에게 물었다.“일생을 두고 가장 중요하게 행해야 할 것을 한 마디로 하면 무엇일까요?공자는 “그것은 서()”라고 답을 했다.

‘용서할 서()’ 자, 글자를 풀어 보면 ‘같을 여()’ 자에 ‘마음 심()’으로 다른 사람의 생각과 함께한다는 뜻이다. 한마디로 ‘서()는 내가 하고 싶지 않은 것을 남한테 안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도  "너희는 남에게서 바라는 대로 남에게 해주어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다."라는 말씀으로 서로에 대한 배려를 가르치고 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가르침은 다르지 않다. 

 매주일 열린예배를 드린다. 젊은 미국부모들이 어린 자녀들을 데리고 함께 한다. 많은 아이들이 모이기에 자칫 소란스러워져서 참여하는 다른 사람들을 방해할 있을 같지만 아무런 문제가 없다. 설교시간에도 아이들은 앞에 나와  조용히 듣고 자리로 돌아간다. 부모들이 자녀들을 얼마나 다루는지 모른다. 조금이라도 사람들에게 방해가 되면 아이를 데리고 밖으로 나간다. 어려서부터 자녀들에게 공동체에 대한 배려를 몸으로 가르친다. 자녀와 내것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남들을 생각하고 배려하는 마음과 태도를 갖는것이 중요하다. 지금은 자녀가 귀한 시대이다.그만큼 아이들이 소중하다. 그렇다고 남에게 자식을 나처럼 달라는 것은 무리이다. 엄마가 묻는다.” 사람들이 아이를 예뻐하지 않지요?” 딱한 일이다. 타인을 방해하고 무례해도 아이 부모는 무조건  관대하다. 그래서 아이가 사랑받도록 먼저 예의를 가르치세요라고 권고해 주었다. 남들은 괴롭다. 앞에서는 웃지만, 마음은 불편하다. 현실을 부모가 전혀 모른다. 아이 보다도 부모가 문제이다. 어른은 분별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아이들은 분별을 배울수 없다.   자녀라도 무엇을 잘못하고 남에게 불편을 주는지 알게 하는것이 현명한 어른이다. 생각해보면 우리는 남을 배려하라는 말에 인색한것 같다. 혼란한 경쟁 사회에서 살아온 탓일까? 서로에 대한 배려보다는  어떻게든 이기고 보자는 독자 생존력만 배우고 가르치는 같다. 고등학교시절 어느 선생님께서 너희들 공부 안하면 저런  사람처럼 낙오자가 된다.”라는 말을 들으면서 사회의 약자들을 향한 배려를 교육현장에서도 제대로 배우지를 못했다. “나만 편하고 잘되면 되지 남들은 상관없다.”라는 생각처럼 어리석은 것이 없다. 이웃은 나의 거울이다.  살면서 남을 위한 배려를 귀하게 여기고 칭찬해 주는 일들을 주위에서 본다. 수년전 켄터키 시골의 여학생이 불편하게 혼자사는 할머니의  차를 수년동안 세차를 해주고 돌보아준 때문에 예일대학에 입학 허가를 받은 일이 있었다. 보상을 바라고 일이 아니었지만, 남을 배려하는 사람을 사회가 인정 해준 것이다. 자녀들에게 배려와 봉사를 가르치고 더불어 살기를 교육하기 보다는 성적위주의 교육에만 올인하는 것을 보면서 한국교육에 희망이 없어서 이민을 왔다는 말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 먼저 어른들이 서로를 배려하고 돕고 사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면 자녀들도 이것을 배우며 성장하게 것이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는것이 배려이다. 내것이 귀하면 남의 것도 귀한법이다. 내가 인정받고 존중받으려면 먼저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이  아닐까? 5월은 가정의 달이다. 먼저 가정에서부터 배려를 가르치고 실천하자. 그러면 세상은 좀더 평안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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