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중하는 (루가14:1-14)

주님의 말씀이 나의 발등상의 등불이 되어 나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소서

성서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을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어떻게 사는 것이  예수를 따르는 것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이  축복된 삶을 사는 방법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삶이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것입니다.그리스도인은  특별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그것에 맞는  기본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세가지를  반드시 실천해야 합니다.

1,   먼저  내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확인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누구인가?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듣는 사람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무엇보다도  우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로  스스로 결정했습니다. 그러므로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2, 예수 그리스도를  인정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떠한   환경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세주로 고백하고  분이 나를 도우시고 이끄신다는 사실에 대한 확신을  사는 것입니다. 이것이  흔들리면  그리스도인의 자격에 문제가 됩니다. 

3,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나를  항상 인도하시는 분을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것은 선언입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사는 것을  선포하는 것은 당연한것 아닙니까? 그리스도인의 선언은  드러나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을  어떤 이들은  생명을 걸고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확인하고 인정하고 선포하는    가지를 하며 사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이러한 삶의 고백과 실천으로 부터 드러납니다.

오늘 말씀은 두가지를 주님께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1, 겸손하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것이 센텐스입니다.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요?

인생을 전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싸워서 이기고 내것으로 만들고 내가 주도하려고 합니다. 결국은 자신을 높이고 알아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행동합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했지요.  남이 알아주기를 바라고  남에게 자랑하기를 바라고  심지어 마음속까지 들여다 보시는 하느님께도 그런 마음으로 살으니까,  예수께서 위선자라고까지 하십니다.그런데 그러면 그럴수록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표적이 되기가  쉽습니다. 부담스러워 합니다.  사람들은  나보다 낮은 사람, 겸손한 사람을  좋와합니다. 그런 사람이 편안 합니다.  예를들어, 찰리 채플린은 어떤 사람입니까?  영구나 맹구는 어떻습니까?  이들은 진짜 바보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을 즐겁게 주려고 스스로 망가지고  바보가 됩니다. 세상은 이들을 천재라고도 말합니다. 오히려 존경합니다. 같은 사람을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나에게 겸손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분이 30년을 부부가 살았는데 지금도 다투고 삽니다. 이유는 한가지입니다.  주도권 싸움입니다.  서로 머리가 되고, 잘났다고 하니까  싸웁니다. 누가 잘나면 다른쪽은 못나야 되잖어요.  사람이 모인 곳에서는 있어요 자기를 드러내고 인정받으려는 욕심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가정이나 공동체는 평안하지 않습니다. 서로 겸손함으로 사는 것이 은혜입니다.

 모두가 주도권을 내려놓고 겸손하라는 것이  주님의  가르침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 주시는 겁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이라는 사람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분은 능력도 있고 모든 것을 가지셨지만,   모든 것을   부족하고  못난 사람들을 위해서  사용하셨습니다. 것이 그분을 메시아, 그리스도 , 구세주라고 사람들이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겸손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에서 나오는 착한행위입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남을 선대하고 존중할 압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윗자리에 앉히는겁니다. 남을 존중하는 , 하느님을 존중하여 무릎을 끓고 기도하는 ,  이런 사람들이 모이면  세상이 평화롭게  되어지는 겁니다. 우리 공동체도 나를 죽이고 겸손하게 서로를 존중하는 사람들이 함께 해서  천국을  살아야 합니다.

내가 존중받으려면 먼저  남을 존중하십시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기본입니다.

2, 가난한 사람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네가 잔치를 베풀 때에는 오히려 가난한 이들 장애인들, 눈먼 이들을 초대하여라

주님의 관심은 항상  작은 사람들에게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스스로를 작고 보잘껏 없다고 인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자기를  불쌍하고 작은 사람으로 보거나 인정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 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가난한 사람들이  게으르고 잘못된 운명을 사는 아웃사이더로만 보일 뿐입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보면서  스스로  자만에 빠질 있습니다.  하느님은 가난한사람, 스스로 보잘것  없다라고 인정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그들이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절대적으로  필요로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당신을  존중하여 간절히 원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을  존귀하게 여기는 자들을  선대하신다고 했습니다.  그들에게 복음을 주시고 하느님나라를 선포하십니다.   그래서 산상복음이  복음의 핵심이 되는 겁니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다 하느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애통하는 사람은 복이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

온뉴한 자는 복이 있다.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다.

이들이 모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여기에서  가난하다는 말은  파산당했다는 말입니다. 아무것도 없는 상태를 말합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것도  포함을  합니다.  이들에게  세상의 어려움이 얼마나 큽니까?  그들에게는 정의롭고 평등한 하느님의 나라가  너무도 간절하지요. 없고 부족하고 파산을 당하면  대부분 작아지고  겸손해 집니다.  세상은 이들을 멸시하고,   억압하고  고통을 주지만 하느님께서는 이들을 하느님의 잔치에 초대하셔서  세상에서는 얻을 없는 은혜와 축복을  베풀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겸손한 자에게 필요한겁니다. 겸손한 자에게 주어집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자녀는 세속적인 욕심과  자랑이  파산됬지만, 오히려  하느님의 은혜로  착한 사람으로  살아가는겁니다.  아직도  세상에서 자랑하고 싶은 욕망이 많고 그것으로   인생의 목적을  삼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하느님의 것을 누릴 자격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를 원하십니까?  겸손을 갖추십시오.

존중받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까?  먼저 하느님을 존중하고 이웃을 존중하십시오.

축복된 삷을 원하십니까?  세속의 욕망을 버리고 주님의  삶을  따라 사십시오.

그안에  여러분이  찾는 진정한  평화와 행복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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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교인 Pot Lock과 전통놀이


3월10일 주일 한인예배후 한미 교우들이 함께 모여 점심식사와


윷놀이 제기차기 등 전통놀이를 함께 하며 공동체 친교를 합니


다. 


장소: All saint's hall


시간: 오후 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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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행복(마태5:1-12)

산상설교는 마태와 루가복음에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복음의 핵심이 담겨있는 중요한 말씀입니다.  처음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이 참된행복에 대한 겁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긍극적인 관심은  행복에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의 Mission statement입니다. 말씀을 따라사는  사람을 예수의 제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공동체 모두가 예수의 참된 행복을 누리며 살기를 기도합니다.    

 마태복음은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라고 해서 마음이 가난하다는 것이 무엇인지?  해석을 필요로 합니다.  그러나 누가복음에는 마음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그냥 가난한 사람들아 너희는  행복하다 하느님 나라가 너희의 것이다. 그냥 우리가 아는  가난한 사람으로 정확합니다. 이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행복은 무엇인가요? 그런데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행복은 누구도 채울수가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마치 신기루같은 겁니다.  가난한 사람, 운명적인 일을 당해서 애통하는 사람,  주어진 불행을 어쩔수 없이 살수 밖에 없는 이유들이 모든 사람에게는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이 행복해질 방법을 세상에서 구할 수가 없습니다. 예를들어 구약에서 구체적인 약자라고 칭하는 과부, 고아 장애인, 이방인 minority 에게 주어진 운명을 행복하게 바꿀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면 죽을 때까지 불행하게 살아야 합니까?  

주님께서 참된 행복의 가치기준을 뒤집어 버리시는 겁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 슬퍼하는 사람은 행복하다, 온유한(착한) 사람은 행복하다,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은 행복하다.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 우리가 아는 상식적인 행복을 모두 뒤집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아는 불행한 것들을 모두 행복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이것들을 모두 참된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부자는 행복하다, 무엇이든 살수 있다, 힘있는 자는 행복하다 원하는 것을 얻을 것이다. 승리자는 행복하다 많은 것을 누릴 것이다. 배고픈 자는 행복하다 식당에서 배부르게 먹으면 것이다. 이것이 일반적인 행복 조건이 되겠지요. 그런데 늪에 빠지면 빠질수록 행복하지 않은겁니다. 여러분의 주위를 돌아보세요, 수많은 증거들이 있지않습니까?  

세상의 행복을 누리고 있는 사람은 굳이 하느님의 복이 간절하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누리는 복을 지키는 것과 복을 채워 달라고 욕심을 부릴 밖에는 없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를 따라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예수께 오는 사람들은 정말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마지막  간절함을 가지고  오는겁니다. 예수의 도움이 없으면 살수 없는 사람들이 생명을 걸고 오는 겁니다.  따라서 참된 행복은 사람들을 위한 축복입니다. 그러나 많은 부자가 제가 가진 것은 하느님의 것입니다.  저는 가난한 입니다. 저에게 행복을 베풀어 주십시오,” 하고 자기의 것을 나누며 사는 사람에게도  참된 행복을 누릴 자격이 있습니다.      

가난해서 하느님에게 먹을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  맛나를 주시지 않겠습니까? 특별히 마음이 가난하여 행복할 없는 사람들을 위해서 하느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그들에게 주시지 않겠습니까? 하느님나라는 없어도 , 없어도 , 능력이 부족해도, 장애가 있어도 행복을 누릴수 있는 나라입니다. 결국은 우리 모두가 바라는 정의로운 세상인 것이지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이 것입니다.

세월호 침몰처럼 자식를 잃은 부모에게 필요한것이 있습니까? , 권력, , 자동차, 부모의 마음을 위로하고 보상해 줄것은 세상에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들의 고통은 죽어도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이 그들을 보상을 줄수 있을까요?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사랑과 약속만이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실망 가운데 주님을 찾는 것입니다.그들은 기도합니다. “나는 자식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겨주십시오.”  

고난 가운데 인간이 있는 것은 이것밖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약한겁니다.  여러분께 예수의 기도를  권합니다. ”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를 통해서  주님  앞에서 가난한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마음이 가난해야  하느님의 나라를 찾습니다. 여러분 우리 공동체를 위해서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공동체 가족을 위해서 기도하세요. 사제를 위해서 기도하세요. 모든 욕망을 내려놓고 가난한 마음으로 기도하세요. 그러면 하느님게서  응답하십니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겁니다.

헨리 나우웬 신부님이  탈진하여 여행중에 로마에서 데레사 수녀님을 만났습니다.나우웬신부님은 데레사 수녀가 사람들과 대하면서 지치지 않고 함께 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곳에서  데레사 수녀에게 자신의 고민을 털어 놓습니다.” “저는 지금 하느님을 만날 없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보통 사람의 고백입니다. 세상에 이런 고민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이때 데레사 수녀가 말하기를 하루에 한시간씩 묵상기도를 하십시오.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오로지 그리스도앞에 내려놓고 묵상 하십시오, 그때에 거리낌이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것도 잘못된 것이 없느느겁니다. 그러면 모든 근심과 불안으로 부터 자유로울 있습니다. 마음대로 되는것은 없고 모든 것은 고통일 뿐입니다. 일을 하는 것은 나의 능력이 아닙니다. 주님의 은총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하늘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여러분이 하늘나라를 산다면 그것보다 행복한 일이 있겠어요? 먹지 않아도 배부르고 가지지 않아도 이미 받은 사람처럼 모든 것에 감사하고 만족할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으로 살고 싶지 않습니까?  여러분이 살아가는 목적이 진정 행복이라면 마음을 가난하게 비우세요. 헛된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을 바라보세요. 그러면  하느님은 가난한 마음을 가진 여러분에게 행복하게 살수 있는 마음을 주실 것입니다.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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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부르심 (루가 5:1-11)


주님께서 모든 사람을 차별없이 부르시지만 그를 따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시몬 베드로를 통해서 부르심을 따르는 자세를 묵상합시다.


1, 한계를 인정하는 사람을 부르십니다.

주께서 찾는 사람은 자기의 능력을 잘 아는 사람입니다. 시몬은 밤새워 그물을 던졌지만 한마리도 못잡고 그믈을 손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목수 출신인 예수게서 깊은 물에 그물을 던지라고 했을 때 자기가 해서 안되니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겁니다. 아마도 그가 조금이라도 고기를 잡았다면 순종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은 자기가 해볼만큼 다 해보고 안되었을때는 하느님께 맡길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나의 능력만 믿고 살면 여러가지로 함이듭니다. 

시몬은 주님의 말에 순종하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가득히 고기를 잡았습니다. 

2, 회개하는 사람을 주님은 찾습니다.

배에 가득한 고기를 보고 보통은 기뻐서 즐거워하며 도와준 분에게 인사를 하겠지요. 그러나 시몬은 주님게 무릎을 끓고 자기의 죄를 고백합니다. "저는 죄인이니 저를 떠나주십시오." 시몬은 엄청나게 잡힌 물고기를 보고 기뻐하기 보다는 이런 일을 주신 하느님의 존재를 먼저 생각하는 겁니다. 나에게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두려울수 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우리는 시몬처럼 쉴새없이 그물을 던지는 삶을 살고 있을 겁니다. 잡힐때도 있지만 때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는 삶을 늘 되풀이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 기도하며 매달리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그렇게 바라는 물고기를 주시지만 또다른 길을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를 사람 낚는 어부로 만들겠다. 시몬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갑니다. 그렇게 원하던 물고기를 포기하는겁니다. 

우리에게 정말로 필요하고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우리를 진정한 복된 삶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까? 주님은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선택하게 하십니다. 물고기를 잡고 살것인가? 사람을 낚는 삶을 살것인가? 

여러분의 선택이 구원의 삶으로 나타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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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합니다.



올해도 우리는 어두운 세상을 향해 빛과 구원의 희망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합니다. 


그 기쁨의 자리에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우리 St. John's Episcopal Church는 다양한 예배를 통해서 우리 이웃들과 함께 성탄예배를 드립니다.



24일 성탄이브 예배: 오후 3시: 본당과 강당에서 성탄행사

 

                           오후5시: 본당과 강당에서 성탄이브 예배


                           밤 7:30:  본당, 한미 연합성탄이브 대미사


                           밤 10시  : 본당 성탄 대미사


25일 성탄절 예배     오전10시: 본당 성탄절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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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루가 10:25-37)


착한 사마리아 사람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서서 예수의 속을 떠보려고 "선생님, 제가 무슨 일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겠읍니까?" 하고 물었다.

26    예수께서는 "율법서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으며 너는 그것을 어떻게 읽었느냐?" 하고 반문하셨다.

27     "'2)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힘을 다하고 네 생각을 다하여 주님이신 네 하느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 고 하였읍니다." 이 대답에

28    예수께서는 "옳은 대답이다. 그대로 실천하여라. 그러면 살 수 있다" 하고 말씀하셨다.

29    그러나 율법교사는 짐짓 제가 옳다는 것을 드러내려고 "그러면 누가 저의 이웃입니까?" 하고 물었다.

30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리고로 내려 가다가 강도들을 만났다. 강도들은 그 사람이 가진 것을 모조리 빼앗고 마구 두들겨서 반쯤 죽여 놓고 갔다.

31    마침 한 사제가 바로 그 길로 내려 가다가 그 사람을 보고는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2    또 레위 사람도 거기까지 왔다가 그 사람을 보고 피해서 지나가 버렸다.

33    그런데 길을 가던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그의 옆을 지나다가 그를 보고는 가엾은 마음이 들어

34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는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려가서 간호해 주었다.

35    다음 날 자기 주머니에서 돈 두 데나리온을 꺼내어 여관 주인에게 주면서 '저 사람을 잘 돌보아 주시오. 비용이 더 들면 돌아 오는 길에 갚아 드리겠소' 하며 부탁하고 떠났다.

36    자, 그러면 이 세 사람 중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준 사람은 누구였다고 생각하느냐?"

37    율법교사가 "그 사람에게 사랑을 베푼 사람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예수께서는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누구나 영생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죽음을 피할 수 있는 길이 있다면 그렇게 살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한 율법교사가 예수를 찾아 그 길을 묻습니다. 그는 율법을 정확하게 알고, 하느님게서 율법을 통해서 우리에게 주시려는 목적을 잘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정성을 다해서 사랑학고 그와같은 마음으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는 것입니다. 사랑의 삶이 우리에게 영생의 기쁨을 줄수 있다는 말입니다. 세상의모든 것은 사라진다해도 하느님의 사랑은 결코 없어지지 않고 영원한 것입니다. 이에 율법교사는 그러면 우리의 이웃이 누구입니까? 라고 물으며 이웃에 대한 정의를 주님께 묻습니다. 주님게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를 통해서 진정한 이웃의 모습을 우리에게 알여 줍니다. 이웃이란 남의 고난을 보고 그냥 지나치지 않고 내 일처럼 돌보아 주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역사적으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반목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항상 이웃에서 함게 살아가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사마리아인은 불행을 당한 사람에게 자기의 시간과 정성과 돈을 다들여 그를 돕습니다. 여기에는 인종이나, 계급이나. 종교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이 불쌍한사람을 돕는 것입니다. 이러한 마음을 하느님게서 모든 사람에게 주셨습니다. 그것을 측은지심이라 합니다. 이 말은 본래 맹자가 한 말인데 어려운 이웃을 보고 불쌍한 마음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그는 불쌍한 사람을 돕지 않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고까지 했습니다. 하느님게서는 누구든지 사람에게는 이런 측은지심의 사랑의 마음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곧 하느님의 마음입니다. 그래서 당신의 아들 예수를 이 세상에 제물로 우리들을 위해 보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사랑으로 이해 할수 밖에 없습니다. 율법교사는 사마리아 사람이 진정한 이웃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러자 주님게서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라는 말씀으로 그에게 답을 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들 세상에는 불쌍하지만 여러가지 이유를 들러서 돕지 않는 일들이 많습니다. 지금 멕시코 국경에는 중미의 가난하고 억압받는 사람들이 살려다라고 도움의 손길을 내닐밀어 미국을 바라보고 있습니다만 미국정부는 이들을 돕지 않겠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미국이 스스로 하느님의 사람이기를 부인하는 행동입니다. 영생의 축복을 거부하는 행동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윌에게 보내 주시는 이유는 그들을 통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시려는 하느님의 목적이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불쌍한 이들을 버리는 일은 곧 하느님을 버리는 일입니다. 하느님을 버린다는 것은 죽음의 길에 들어서는 것입니다. 이것은 매우 불행일입니다. 그래서 롱 아일랜드의 성공회 주교님은 교인들을 이끌고 

 멕시코 국경에 가서 그들을 돕울 수 있는 일을 찾아 돕고자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자비가 그들을 통해서 미국을 정부를 회개 시키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어려운 형제를 행동으로 돕는 것이 곧 하느님게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명령입니다. 왜냐하면 이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나라가 세워지고 하느님의 나라는 어두움의 권세를 몰아내어 결국은 승리의 하느님 나라를 이루어 갈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나의 주위를 돌아 보십시오. 내가 돕지 않으면 안으면 안되는 그 일과 그 사람을 위해서 나를 봉헌 하십시오. 그것이 우리를 영생의 삶으로 축복할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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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교회에서 장소를 제공하여 일반인들이 모여 독서모임을 하고 있다. 그들은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도 않다. 모두가 각자의 직업을 가지고 열심히 살기에 책 한장을 읽을 기회를 갖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 책을 읽지 않는 민족에게 희망이 없다는 말은 누구나 아는 상식일테지만 현대인의 삶은 독서를 못하게 하는 구조적인 게으름에 빠져있는 것 같다.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의 독서량은 연평균 9.1권 미국은 77권 일본이 72권으로 나와있다. 결국 국민의 수준을 독서량으로 가늠해 볼수 밖에 없다. 우리와 경쟁하는 일본보다 형편없이 독서를 하지 않는 우리들의 자화상을 보면서 슬퍼지기까지 한다. 사실 일년에 책을 한권도 읽지않는 사람도 주위에서는 쉽게 찾아 볼수 있다. 그래서 독서모임을 시작하였다. 수요일 이른 아침 오전 6시30분이다. 모두가 잠들어 있을 시간에 나와서 자신들이 읽은 책을 말하고 서로같이 읽은 책에서 얻은 지식과 지혜를 나눈다. 두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지 느끼지 못할 정도이다. 모두가 자기의 진솔한 마음을 담아서 말하고 싶어한다. 사실 사회에서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할수 없다. 모두가 살기 위해서 하는 지나가는 말들 뿐이다. 그래서 책을 읽다보면 자기를 들여다 볼수 있는 시간을 갖게 된다. 생각없이 말하고, 생각없이 행동했던 것들이 조금은 깊어지는 것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때 만큼은 순수해 지는것 같다. 

나는 어릴적에 톨스토이의 책을 보면서 인간의 삶을 많이 생각하고 배웠다. 그래서 아직도 그때 느꼈던 생각들을 잊을 수가 없다. 책이 주는 영향이 그만큼 큰것이다. 독서모임에서 내가 과거에 읽었던 좋은 책들을 다시 보고 싶어서 찾아보니 대부분이 절판이 되어 찾을수가 없었다. 그래서 요즘 나오는 신간 베스트셀러들을 가지고 공동독서를 하고 있다. 예전에는 책들이 내용으로만 가득했는데 요즘은 내용은 가벼워지고 그림이 많고 편집상 여백이 많아진것을 본다. 아마도 독자들의 세대가 달라져서 그렇게 한듯 싶다. 어떤책들은 내용보다는 표지에 공을 드린것 같아서 아쉽다.  

종교인들 가운데는 자기종교의 경전만을 고집하고 일반 서적을 읽지 않는 사람들도 보았다. 그러면 편협한 생각에 빠져들기 쉽다. 다양한 독서를 통해서 자기의 상식과 생각을 넓히고 종교적인 심성을 잘 키워야 다른 사람들과 대화가 부드러워지고 이해가 넓어진다. 아니면 나의 편협함에만 빠져있기 쉽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지만 새로운 지식과 생각을 나눌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큰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매주 한번 만나는 독서의 동지들과 함께 한 주간이 즐거워지는건 덤으로 얻어지는 행복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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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scovery weekend 2019



St.John's 교회에서는 청소년을 위한 많은 프로그램이 있고, 그들의 신앙 성장을 위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매년 1월 봄방학에는 2박3일동안 교회에서 숙식을 같이 하며  서로를 알고 하느님을 경험하는 수련회를 갖는데 매년 약 100여명의 학생들이 참여


하여 많은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찬양과 기도와 성경공부를 통해서 우리 자녀들이 신앙을 배우는데 좋습니다. 


특별히 교회에서 많은 봉사자들과 지도자들이 청소년들을 지도하고 돌보기에 안전한 모임이 되고 있습니다. 


다음 주 12월2일까지 접수를 마감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교회 웹사이트를 보면 알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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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절

강림절 , 대강절Advent , 待臨節

요약 예수 그리스도 탄생일 전 4주 동안의 기독교 절기. 3~4세기 갈리아와 스페인 지역에서 시작하여 6세기에 이르러 로마 교회의 교회력에 포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뻐하고 재림을 기다리는 데 의미가 있다. 중세에는 고행, 금식, 금욕이 주된 내용이기도 했으나, 종교 개혁 이후 근대에 이르러 기쁨의 절기라는 본래의 의미를 되찾았다.

대림절(Advent)
대림절(Advent)

대림절의 상징물인 대림환(Advent Wreath)

ⓒ Micha L. Rieser | CC BY-SA

의미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다리는 시기를 뜻하는, 가톨릭과 기독교 등 범 기독교의 절기. 대림절은 예수 성탄 전 4주간을 말하며, 옛날에는 강림절(降臨節)이라고도 불렸다. 영어로 대림절을 뜻하는 ‘Advent’는 ‘오다’라는 의미인 라틴어 ‘Adventus’에 기원을 두고 있다. 서방교회의 대림절 첫날은 성 안드레아 축일(11월 30일)에서 가장 가까운 일요일이며, 동방교회에서는 좀 더 빠른 11월 중순부터 이 절기가 시작된다. 대림절의 첫날부터 교회력(敎會曆)의 새해가 시작한다.

역사

대림절이 언제부터 지켜졌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3~4세기 무렵, 지금의 프랑스인 갈리아와 스페인 지역에서 성탄절을 앞둔 3~6주 동안 성탄절을 준비하면서 고행과 금식을 실천하는 관례가 있었다. 5세기 중반에 이르러, 투르의 페르페투스 주교가 성 마르티노 축일이었던 11월 11일부터 성탄 전까지 40일 동안 단식과 고행을 행하는 절기를 공식화했다. 유럽 여러 지역에서 행해지던 이러한 전례를 바탕으로 567년의 공의회에서 대림절에 대해 논의했고, 그레고리오 교황(재위: 590~604) 시대에 이르러 교회력에 공식적으로 인정되면서 4주간의 절기로 정착되었다.

대림절이 교회 안에서 공식적인 절기로 인정된 초기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희망과 기쁨 속에서 기다리는 기간이었으나, 중세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인간을 위한 심판의 날이 될 것으로 생각하여 공포와 속죄를 위한 절기로 간주되기도 했다. 종교 개혁 후, 근대에 이르러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재림을 기리는 기쁨의 절기라는 본래의 의미를 회복했다. 가톨릭에서는 1917년 이후 대림절 동안 단식이나 금욕의 의무를 두지 않고 있다.

상징물

교회 예전에서 대림절을 상징하는 색깔은 자주색이며, 교회에 따라 자주색, 연자주색, 분홍색, 흰색의 초를 주일마다 순서대로 밝혀서 대림절 4주의 의미를 상징하기도 하고, 이 초를 푸른 나뭇가지로 엮어 둥글게 만든 대림환으로 교회를 장식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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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scopal Asiamerica Ministry 모임


9월27일-10월1일까지 Honolulu에서 미국전역의 아시안 교회의 성직자와 평신도 청년 대표들이 모여서 3년에 한번 열리는 전체 회의가 있었습니다. 
특별히 첫날 개회미사에서는 미국의 Michael Curry 의장 주교께서 열정적인 설교를 통해서 아시안들을 격려를 해 주셨습니다. 
이번에는 한국, 중국, 일본, 미국, 라오스, 인도, 미얀마 등의 교우들이 함께 모여 전도와 화해, 환경과 한반도의 평화를 위한 주제발표와 분과 모임이 있었습니다. 약 3백여명이 모인 가운데 모두가 열정적으로 참여를 하였고 한국을 대표해서는 30여명이 참여 하였습니다. 특별히 서울교구 주교와 대전교구 주교께서 함께 참여하요 자리를 빛내 주었습니다. 미국에서 아시안들이 어떻게 전도하고 공동체를 소개하고 각 나라 민족들이 미국에서 하고 있는 교회의 일들을 소개하였습니다. 
 또한 마지막날에는 각나라의 문화를 소개하는 발표가 있었는데 한국에서는 모두가 한복을 아름답게 입고 전통 가락의 아리랑과 오소서 라는 국악리듬의 성가를 다함께 불러서 환호를 받았습니다. 
본 모임은 매 3년마다 열리며 각 나라별 모임을 여러지역에서 매년 모여서 서로의 선교활동을 보고하고 격려하는 모임을 하게 됩니다. 성공회는 어느나라나 민족이라도 한 전통을 공유하고 있어서 가족과 같은 분위기를 가지고 있습니다. 
2019년에는 한국교회 모임이 시카고에서 10월에 열릴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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