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을 이기는 기도(11:1-13)

성공회를 전통적으로는  기도서 교회라고 부릅니다. 1549 토마스 크램머 켄터베리 대주교에 의해서  최초의 영어 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 만들어서  사람들이 누구든지 항상 기도할 있는 텍스트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공동문을 가지고  공동으로 또는 개인으로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공도문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성공회교인의 특징이라고 합니다. 그만큼 기도는 신앙생활에서  중요합니다.  바울은  쉬지말고 기도하라 교회에 적극 권하였습니다. 내가 하느님과 연결되는 길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존재를 느끼는 것은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길은 기도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게 어떻게 하느님과 기도할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주님 우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이에 주님께서 주의 기도문을 말씀하십니다. 기도문은 하느님과 교통하는 통로입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기도를 통한 많은 하느님과의 교통이 필요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의 타락은 모든 부분에 걸쳐서 말할 없을 정도가 되었습니다. 흔히 성경에서 인간의 타락으로 인한 심판을 이야기 우리는 소돔을 예로듭니다. 소돔과고모라가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까?

정답은 의인이 없어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주님게서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을 경고합니다. 그들이 하느님을 거부하고 가운데 있다라고 하십니다. 이들이  다른 타락으로 멸망의 자리에 선것이 아닙니다. 죄악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합니다. 문제는 그가운에 하느님의 의인이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주님 50명의 의인이 있으면 살려 주십시오, 45명만 있으면 살려주십시오, 40명만 10명만있어도 살려 주겠다라고 하느님게서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10명의 의인도 없어서 결국은 하느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였습니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는 한명의 의인도 없었습니다. 의인이 누구입니까?  의로운자 하느님과 교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과 기도하며 소통하는 사람을 말하는 겁니다. 진실로  기도하는 사람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나라를 살립니다. 기도하는 사람이 가정을 살립니다. 공동체를 살립니다. 하느님께 저와 여러분을 자리에 부르신 이유는 기도하라고 부르신겁니다. 하느님과 대화하라고 부르신겁니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고 딴짓을 하고 하느님의 관계를 소흘히 하면 그것이 죄입니다.  심판의 조건입니다.

흔히들 하느님 안믿으면 어때?라고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을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생각과 삶은  다를수 밖에 없습니다. 지금 시대의 타락과 폭력은  하느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서  저질러지는 무지의 결과입니다. 지금 저들에게 하느님에 대한 생각이 있는가?  

지금 여러분이 사는 세상을 보세요. 사람들이 무엇을 위해 삽니까? 하느님이 중요해야 합니다. 하느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이 존재합니다. 이것만은 변함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하느님 위에 두고 살아갑니다.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실 가장 먼저 한말씀이 무엇입니까? “아버지 이름이 거룩하게 하여 주십시오.” 가장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찾았습니다.  나의 소원이 아닙니다. 나의 목적이 우선이 아닙니다.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가  기도의 목적입니다.  주님게서 기도할 중언 부언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쓸모없는 소리를 하지 말라는 겁니다. 그럼 어떻게 기도합니까? “하느님 아버지 것이 가장 중요하고 이것이 전부입니다. 그러면 그다음에 내가 바라는 간절히 원하는 어려움들은 우리의 아버지게서 이미 아시고 들어주신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자세는 이렇습니다.

1, 하느님을 마주합니다.

먼저 하느님을 청하는 겁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곁에 계십니다. 그분을 안으로 모셔들이는 겁니다. 이것을 영접이라고 합니다. 내가 마음을 열고 하느님께서 자유롭게 들어 오셔서 나를 움직이도록 맡겨드리는 것입니다. 이런 기도를 퀘이커교인들이 잘합니다. 그들은 기도할때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께 맡겨드립니다. 마치 명상기도같습니다. 그러면 몸이 움직입니다.  마치 지진이 일어난 처럼 자유롭게 움직입니다. 그래서 이들을 퀘이커라고 부릅니다. 한국에서 유명한 분이  함석헌 선생입니다. 기독교 가운데 평화운동을 가장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퀘이커교도들입니다.

 기도는 몸으로 깊이 받아들여서 하는겁니다. 나를 온전하게 하느님께 내어들이고 의탁하는 행위가 온전한 기도입니다. 그런데 대부분 자기가 필요한것만 구하고 말아버립니다. 특히 오늘 성경에서 말씀을 가지고  잘못 가르치고 있습니다. “구하라 두드려라 그리하면 찾고 열릴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조건 원하는 것을 가지고  두드립니다. 무리하고 이기적인 소원을 가지고 기도합니다. 여러분 솔직히 사람들의 소원이라는 것이 하느님께서 보실때 별볼일 없는 것들이 대부분입니다. 예들들어 자녀를 성공시키는것 , 사업 잘되는 이것이 하느님나라를 이루는데 얼마나 도움이 되지요? 생각해 봅시다.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일입니까? 지난주에 김요한 신부님이 밀리언 집을 얻었는데 자기집이 아니니까 하느님게서 주신겁니다. 그분 개인에게 집이 필요합니까? 15명이 살려면 밀리언 집이 필요하지 않겠어요. 사람에게 그런 집이 무슨 소용이 있어요?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성경말씀을 오해하여 잘못된 것을 가지고 떼를쓰는 그런 믿음을 가지지  않기를 바랍니다.여러분이 하느님과 마주하면 모든것이 그분의 안에서 은혜롭게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2, 주는대로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하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를 구하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지는 것은 하느님의 은혜의 결과입니다.

너희가 악할지라도 자녀에게 좋은 것들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느님께서 주시는 은혜는 바로 성령입니다. 하느님의 영을 선물로 받은 사람은 그의 삶의 목적이 분명합니다.모든 것을 하느님의 나라 평화를 이루는 삶으로 바뀝니다. 그가 말하는 그가 살아가는 모든 것이 평화를 만들어냅니다. 이것을 하느님게서는 여러분의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주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느님과 끊임없이 소통하십시오. 그러기 위하여 간구하고 기도하십시오. 하느님의 이름으로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의를 위하여 기도하십시오.

여러분은 하느님께  부름받은 의로운 사람으로 생활하여 가정이나 공동체나 어디에서든지 구원의 도구로 쓰임받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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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손한 자의 기도(루가18:9-14)

한자로 겸손이라 함은 자신을 누르고 다른 사람 앞에서 물러난다주제넘게 남에게 참견하지 않는 다는 뜻이 됩니다. 자기가 알고 경험한 것을 참는다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그러나 나를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존중하여 나를 누르고 참는 것입니다. 대단한 수양이지요. 사실은 내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것도 단편적인 것입니다.  성서에서의 겸손은 땅을 본다는 의미입니다.” 나를 땅에 맞추어 내린다는 말입니다. 거룩하신  존재 앞에 나가서 나의 비천함과 나약함을 깨달았을 때의 느낌,또는 자신이 거룩함 앞에서 부끄러워 얼굴을 들수 없어서 땅을 바라보는 상태를 말합니다. 베드로가 주님의 거룩함 앞에서 얼굴을 들수 없을 주님의 발앞에 엎드려 주님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은 자신의 모습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가시덤불 속에서 하느님을 만났을 모세는 여호와를 보는 것이 두려워 얼굴을 감추었다라고 했습니다. 이런 태도가 겸손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기독교에서 말하는 겸손은 자신의 가치를 아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어떤 사람인가? 하느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 이런 현존의 질문을 끊임없이 하는 것이 영적인 질문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서 나를 질문합니다. 그리고 자신을 성찰합니다. 기독교 안에서 오랜동안 성찰하는 문화가 없어졌습니다. 기도하며 떼쓰고 얻고 만족하고 기뻐하고 자랑하고 찬양하고 즐기고 좋와하는 문화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하느님 앞에서 나를 성찰하는 문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러니 하느님을 두려워 하는 마음이 없는것입니다. 성찰하면 당연히 겸손해집니다.

바리사이인과 세리가 함께 성전에 와서 기도합니다. 세리는 자기의 공로를 자랑합니다. 나는 십일조도 바칩니다. 율법을 따라서 온전한 생활을 합니다. 부정하게 살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세리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러니 나의 의로움을 인정해 주십시오. 당당하게 하느님게 요구합니다. 이런 교인들이 많습니다. 자기의 내면의 죄와  본질은 숨기고 드러나는 것을 가지고 인정받고 그것으로 자기의 믿음을 확인해 달라고 하느님께 요구합니다. 기도할때 은밀히 주님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바리새인의 기도는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기도를 합니다. (대개 예배에 대표기도를 합니다. 그때 기도 내용은 하느님게 드리기 보다는 사람들에게 설교하듯이 합니다.)

반면에 소위 죄인이라는 세리는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합니다. 그러니 땅에 머리를 대고 기도합니다. 스스로 죄인이라 소리도 크게 내지를 못하고 그저 가슴을 치며 스스로 하느님 앞에서 애통해 합니다. 그의 기도는 하느님, 죄많은 저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짧은 기도 밖에는 하지 못하는 겁니다. 이것이 예수 기도입니다. “하느님의 아들 주예수 그리스도여 죄인을 불쌍히 여기소서 기도만 해도 효과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많이 접하는 기도는 어떤 기도인가요?

 성당과 예배당의 차이를 저는 봅니다. 예배당은 회중이 공동으로 모여서 항상 북적거립니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공간이 대부분입니다. 하느님을 만나는 개인적인 공간이 부족합니다.  그런데 성당에는 대부분 작은 기도처나 묵상공간이 있습니다.(감실) 그곳에서 스스로 주님과 대화하는 성찰의 시간을 갖는겁니다. 사실은 이것이 가장 은밀하면서 가장 정직한 자리이며 주님과 마주하고 자기 자신을 성찰하는 자리입니다. 여럽 사람들 앞에 대중기도하면서 솔직하게 말할 없어요.   은밀한 주님과의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주님 앞에서 비로서 겸손한 성품을 찾을 있습니다. 두사람의 기도를 들으신 주님께서 누구의 기도가 하느님 앞에 인정을 받았는가? 묻습니다.  세리의 기도라고 말을 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기도는 오로지  하나입니다.”주여 죄인을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안에 모든 것이 들어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에게 나의 모든 것을 아시니 불쌍히 안아 주세요 라는 나를 의탁하는 기도입니다. 내가 나를 경영하고 나를 스스로 인정하고 자랑하는 것은 교만입니다. 내가 하느님께 기도해서 얻어냈다라고 하는 것은 교만한 겁니다. 나에게는 아무런 공로가 없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은혜만 있을 뿐입니다. 세리는 자기가 죄인임에도 은혜를 주시는 하느님 앞에 부끄러워서 얼굴을 땅에 대고 기도하는 겁니다. 이것이 겸손입니다.

하느님게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땅에 스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느님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직접 보여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본질은 겸손입니다. 하느님은 창조주이시며 우주의 주인이시지만 그분은 겸손하십니다. 필요하면 세상을 위하여 땅으로 겸손히 내려와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우리의 죄를 대속하십니다. 사람마다 하느님에 대한 의견이 다르겠지만 예수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하느님의 본질은 겸손일수 밖에는 없습니다. 주님을 보고 인간이 겸손을 배우고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부단히 가르치려고 합니다. 하나를 알면 열을 가르치려고 합니다. 특히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가르치는데 열심을 냅니다. 이것 때문에 사람들이 죽어갑니다. 바리사이인 같은 교만이 세상을 혼란과 부정함으로 인도해 갑니다. 이런 곳에 사람들이 많이 빠져듭니다. 그리고 함께 침몰합니다. 겸손한 사람은 열을 알아도 하나를  말하지 않습니다. 아는 것을 몸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겸손함을 살고, 청빈함을 살고, 세속적인 것보다 하느님의 은혜를 사랑합니다. 다른 사람의 말이나 눈을 의식하지 않습니다. 항상 하느님의 눈을 의식하고 나를 성찰하며 살아갑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면 낮아지고 자기를 낯추면 높아지리라 말씀은 탈무드의 가르침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교훈입니다. 유대교인에게는 일반적인 상식입니다. 궂이 주님의 말씀이 아니라도 이미 우리들의  상식 가운데 주님의 말씀이 많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을 자랑하지 마십시오. 하느님 앞에서 겸손하게 나를 성찰하며 기도하십시오. 오늘 받은 축복과 은혜을 너무 자랑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은혜와 축복을 받기에 부족한  자신에게 부끄러워 하십시오. 그래야 성숙한 주님의 자녀입니다. 여러분이 받은 은혜는 자랑하지 않아도 남들이 여러분의 삶을 보고 인정해 줍니다. 그런데 그것을 자랑하고 떠들면 은혜는 사라지고 교만이 되어 버립니다.

기억하세요. 하느님게서 받으신 기도가 누구의 기도인지? 어떤 태도의 기도인지를 기억하고 스스로 자기를 성찰하고 주님 앞에서 바르게 서는 태도를 배우고 익히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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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하라(시편 50:14-23)

오늘의 시편말씀

사람이 하느님게 바칠 제물은 감사하는 마음이라감사하는 마음 가운데 하느님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도  추수감사절을  맞이하면서 저는 미국의 명절 감사절을 생각하기 보다는  여러분의 삶에서의 감사함을 찾는 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 가운데 은혜가 있고 감사함으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갑니다. 그만큼 감사는 중요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여러분의 삶에 감사를 가지고 살아가는가?   감사는 습관입니다.  감사할 아는 자녀는 훌륭하게 자랍니다.  그것이 자녀들을 성공한 인생으로 만듭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부모가 어떤말을하고 어떤 습관을 가지고 사느냐를 따라 똑같이 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자녀들을 원하십시니까? 감사한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게 하세요. 

수도원과 감옥은 매우 흡사합니다. 다르다면 감옥은 원하지 않아서 있는 것이고 수도원은 스스로 갖혀 사는 것입니다. 수도원은 하느님께 감사함으로 일생을 기도하며 사는 곳이고 감옥은 죄를 지었지만 불평하고 원망하는 사람들이 사는 곳입니다. 수도원은 천국같다고 말하지만  감옥은 지옥같다고 말을 합니다. 결국 수도원과 감옥의 차이는 감사함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의 차이라고 볼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매사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사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매사에 불평을 하며 삽니다.  감사하며 사는 사람이 분명히  행복을 누립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불평하는 사람은 은혜를 얻지 못하지만, 작은 일에도 감동받고 감사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을 많이 경험하는 것을 볼수 있습니다. 이렇듯 신앙의 기본은 감사입니다.

남들은 보지 못하고 지나치는 적은 것을 통해서 하느님의 감사를 느끼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행복합니다. 그래서 세상을  살아도 고난을  느끼지 않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하느님을 끼쁘게 하는 감사의 생활을 있습니까?

1, 원망을 하지 않는다.

사람의 체질은 원망과 불평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아담이 가진 죄의 본성이 불만족과 불평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원망이 몸에 배어있습니다.

이스라엘을 보십시오. 하느님께서 구원하셔서 광야로 갔습니다. 그들은 구원을 향해 가면서도 불평을 그치지 않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 먹을 것이 없다고 불평, 지도자를 원망하고 하느님을 원망합니다. 하느님께서 만나를 내려 주셨지만 이집트에서 먹던 부추와 마늘과 양파를 찾습니다. 하느님게서 기적으로 40년동안 이스라엘 민족을 먹이셨지만 그러한 기적적인 공급에 대해서 감사하기 보다는  끊입없이 불평을 하였습니다.

여러분이 사는 우리 세상을 보십시오.    온통 불만 투성이입니다. 세상에 대해서 사회에 대해서 종교에 대해서 환경에 대해서  다른 사람들에 대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통 불평이 많습니다. 하느님게서 세상의 모든것을 축복해서 주셨지만 하느님이 나에게 준것이 무엇인가?라고 불평합니다.

여러분 우리들이 가지고 누리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너무나 많은 은혜를 받고 살지 않습니까? 우리 자신도  넘치는 것을 받고 살고 있지 않습니까?

나병의 권위자인 브렌드 박사는 고통을 만드신 하느님 이라는 책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그는 나병환자들을 돌보면서 고통이 느끼지 못하는 것은 죽음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나병환자들은 신경이 죽어서 손을 뜨거운 곳에 넣어도 느끼지 못합니다. 그것은 죽음을 의미합니다. 살아있는 몸은 고통을 느낍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고통을 느끼고 아픔을 느낄때 그것이 내가 살아있음으로 겪을 있는 은혜라는 사실을 깨닫기 바랍니다. 아픔이 있으면 그것은 치유될 있는 것입니다. 고통이 나의 눈으로 볼때는 불평이 되지만 하느님의 눈으로 볼때는  축복을 베풀 조건이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원망과 불평으로 삶을 죽이기 보다는 감사함으로 축복을 누리기를 바랍니다.

2, 환란중에 감사합니다.

환경이 좋고 될때는 누구나 감사합니다. 그러나 고통과 어려움 가운데에서 감사하는 것은 믿음으로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이기에  감사를 있어야 합니다.

구약시대 여호사밧은 하느님을 섬기며 나라를 부강하게 만든 왕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방민족인 모압과 암몬이 유대땅을 쳐들어와서 어려움을 겪에  됩니다. 이때 왕은 모든 백성과 함께 하느님께 나아가 금식하며 부르짓기 시작합니다. 전쟁에 나갈때 찬양대를 앞세워 하느님께 감사하는 노래를 부르게 하였습니다. 하느님게서 이들을 도와서 전쟁을 승리로 이끄시고  나라를 보존할 있었습니다. 먼저 기도와 감사함이 우선되어야 합니다.

토마스 에디슨은 가난해서 신문을 팔며 공부를 했는데 한번은 열차에서 실험을 하다가 불을 내번하여 차장이 그를 열차밖으로 던져버렸습니다. 이때 그는 귀를 다쳐서 장애인이 됩니다. 이후 에디슨은 고백하기를 자신의 귀에  딴소리 들리지 않아서 연구하는게 도움이 되었다고 합니다.

믿음은 감사입니다. 어떤 환경도 하느님의 주권아래에 있으며 그러므로 어떤 고통과 어려움도 우리는 능히 주님과 함께 함으로 이겨 낼수 있음을 믿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3, 모든 일에 감사합시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말고 기도하라 모든 일에 감사하라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뜻입니다.”(살전5:16) 주님의 명령문입니다.

이것이 그리스챤의  기본 생활입니다.  하느님의  성령께서  도우심으로 이와같은 현상이 반드시 일어나고, 우리들의 삶을 이끌어 주십니다. 하느님의  은혜를 받아 사는 사람은 인생이  기쁠 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기쁨은 기도로  응답하게 되고 기도로 충만한 삶은 모든 일에 감사하는 생활로 이어지게 된다는 말입니다. 가운데 하나라도 빠지는 것이 없습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는 말은 어떠한 경우에도 감사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서도 하느님께 감사했습니다. 다윗은 자신의 죄로 인하여 아들을 잃고 고통을 겪었지만 회개하며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했습니다. 욥은 환경에 의하여 모든 재산을 잃고 가족도 잃는 불행 가운데 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함으로  예전보다 많은 축복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감사하는 자의 모습입니다.  감사는 하느님께  회개하는 사람이 하는 겁니다.

모든 일에 감사하라 주님의 명령입니다. 하느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통치하는 세상을 인정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해야 위무입니다. 왜냐하며 이것이 하느님게서 바라시는 우리를 향한 뜻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어기며 사는 것이 불행입니다. 하느니므이 뜻을 따라 순종하는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느님의  일이 일어나고 은혜의 열매가 열립니다.

여러분 불평하고 원망하는 마음에는 절대로 기쁨과 축복의 열매가 없습니다. 부부간에 가족간에 이웃간에도 원망과 불평과 시기가 있으면 그것은 불행한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모두 행복하게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며 살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그러므로 어떠한 처지와 환경과 상황에서도 감사한 마음을 지키십시오. 사람을 보고 환경을 보고 자신을 보고 감사한것은 잠시이고 사라집니다.  반드시  사랑이신 하느님을 보고 감사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심령이 더욱 풍성해지고 기쁨과 기도와 감사함으로 채워질 것입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느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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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동을 주는 사람



나이가 들면 눈물이 많아진다는 말을 한다. 그만큼 마음이 약해진 탓일 것이다.과거에 남자는 일생동안 번만 눈물을 보여야 한다고 강요 받아왔다. 그런데 말이 맞지 않는 같다.요즘들어 고국에 대한 기사를 보면서 울컥하여 눈물이 때가 많아졌다. 특별히 대통령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 많은 감동을 받는다. 그것이 연출이라해도 보기 좋다.그런데 진심이 느껴진다.언제부터인가 공직자들이 국민을 대하는 태도가 흉악스러워졌다. 심지어 국민들은 돼지라는 막말까지 들어야 했다. 우리들이 주는 세금으로 풍요와 온갖 특혜를 누리며 사는 자들의 오만함을 보면서 실망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요즘 대통령이 어렵고 소외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사람들을 정중하게 대하는 태도를 보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감동을 받는다. 이유는 단 하나,사람대접을 하는구나 하는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사람위에 사람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사람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짓누르고 있는지 모두가  경험하고 있다. 그래서 나온 말이 갑을 관계이다. 대부분은 을의 자리에 있다. 모든 을의 사람들은 갑이 되기 위해 일생을 허덕이다가 세상을 떠난다. 사실은 누구도 진정한 갑이 될수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산다. 그런데도 어설픈 갑이라도 되보려는 것은 사람의 욕심일 뿐이다. 이런 삭막한 시대에 대통령이 낮은 자세로 섬김의 모습을 보이니 국민들이 감동을 받는 것이다. 미국의 트럼프는 자신의 온 가족을 데리고 갑의 최고봉에 올라 앉아 사람들에게 온갖 실망을 주고 있는 것을 보면 인간의 근본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생각케 된다. 이런 사람은 세상을 감동시킬 수 없기에 지도자로서의 자격이 없다.

일생을 의미있게 잘사는 것이 무엇일까?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실 가정에서 서로에게 감동을 준다면 부부와 자녀관계는 좋을 밖에 없을 이다. 우리 세대만해도 감동을 보고 자라지 못해서 마음은 있지만 행동으로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럴때 마다 많이 아쉽고 속이 상한다. 그때 말을 못하고, 표현을 하지 않았을까? 그때 사람에게 그렇게 했으면 얼마나 좋와했을까? 라는 아쉬움이 기억속에 남아있다. 교육이 무엇인가? 사람을 사람답게 만들고, 행복하게 사는 것을 배우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결국 사람에 대한 이해를 바르게 하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 되어야 할 것이다. 오래전 뉴질랜드에서 사제품을 받을 그곳 동료사제가 손수 바느질해서 만들어준 빨간색 제의용 스톨을 사용할 때마다 그 분의 마음을 되새기게 된다. 어느날은 시계줄을 바꾸려고 갔는데,볼품없이 시계를 보고 주인께서 같은 것으로 바꾸어 주겠다고 했을때 의아했지만 진심을 알고 새것으로 교환받은 적이 있다. 그리 비싼 시계가 아니어서 부담은 적었지만 감사함으로 시계를 볼때마다 그분을 위해서 마음으로 기도할 밖에 없었던 기억도 있다. 감동이란 살아야 하는지 가치를 알게 주는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감동을 주는 사람들과 같은 시대를 사는 처럼 즐거운 일이 어디있을까? 내가 진심을 다하여 상대방이 감동을 받을 있다면 사람의 가치를 표현하며 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수께서도 나는 섬김을 받으려고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고 왔다는 말씀을 실천함으로 온 세상을 감동시키셨다.부디 겸손히 섬기는 사람들로 인하여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살기좋은 세상이 되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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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s Hopkins University campus ministry




이 바나바스 신부는 매주 목요일이나 다른날 일주일에 한번씩 John's Hopkins


대학 캠퍼스에서 한인학생들을 위한 기도와 신앙의 도움을 주는 시간을 갖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학생들은 함게 이야기를 나누고 상담과 기도를 할수 있습니다. 


또한 성공회 교회와 연결하여 신앙생활을 할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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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마르코13:1-8)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드리는 주일입니다. 1년 동안 나의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때로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 때마다 손을 잡아주시고 일으켜주신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디슨이 메릴랜드 출생이다. 그의 말 가운데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성공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는 큰 오해가 있었다.

1%의 하느님의 도우심이 사실은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는 말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복음말씀으로 돌아갑니다.    

과거부터 이스라엘에는 종말에 대한 사상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없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이 같은 믿음은 그들이 겪은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번 나라를 잃고 수많은 세월을 살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을 경험하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묵시문학이라는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가 대표적이고, 신약의 요한계시록이 있는데 오늘 복음마르코 13장은 소묵시록이라고 해서 중요한 묵시복음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심판이 있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이라는 멧세지가 신앙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도 예루살렘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언자 마호멧이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의 성전은 흔적도 없고 이슬람의 황금사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유적인 통곡의 벽에 서서 기도를 드리며 예루살렘 성전의 부활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의외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우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곳곳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서로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을 나오면서 제자가 감탄하며 이 성전이 영원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성전의 돌들이 하나도 제자리에 없을 것이며 흔적도 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아니 그 당시에 보면 반역죄에 걸릴 위험한 예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유다전쟁으로 성전이 피괴됨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역사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매우 두려운 현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은 지금도 매일 벌어집니다. 즉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우리가 믿는 중심 축들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9.11 테러가 일어나던 2001 8월말에 저는 그 무역센터 빌딩을 올라가서 미국의 힘과 능력을 실감하면서 빌딩구경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빌딩은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이 건물이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단 0.1%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후 보름이 지나 한국에서 저는 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시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무서운 재앙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전쟁이나 다른 이유로 멸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거대한 빌딩은 일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은 그 때를 지나 새로운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역사입니다.

수없이 무너집니다. 영원할 것 같은 모든 환경들이 결국은 무너집니다. 결국 여러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재앙으로나 전쟁으로나 항상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러한 일들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만 머무르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좌절하지 않고 감사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에게는 온갖 일들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감당해야 살수 있습니다. 성 바울로는 사역을 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말합니다.”내가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주께서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셔서 당신을 섬기는 직분을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비록 나에게는 어려움이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기에 감사합니다. 고난은 오히려 나에게 능력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절망과 좌절을 하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넘어선 승리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바울로 성인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함과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물질적으로도 곤핍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을 일도 여러번 당하였습니다. 그리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의 고난이나 어려움들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만남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만남은 불안하고, 고통을 주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서 절망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어떤 만남은 같은 상황에서도 기쁨을 줍니다. 희망을 줍니다. 어려움을 이길 능력을 줍니다. 사람을 만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우리 주님을 만나면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즉 종말적인 세상을 넘어 새하늘과 새땅을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처음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버지니아의 윌리엄스타운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늘날 이민자처럼 사회에 대한 실망을 안고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때도 그들은 성공회사제를 모시고 와서 먼저 성당을 마을 가운데 세우고 정착을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두려운 미지의 세계를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살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미지의 땅에 온 그들은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저는 처음 설교에서 우리는 광야에 초대되어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는 우리가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지식이나, 능력이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하여 살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종말을 사는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깨달을 자리에 부름받은 선택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의 새로운 출발은 실패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성인 바우로가 가르치신 대로 항상 감사하십시오. 무조건 감사하십시오. 고생할 몸이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고민할 수 있는 정신이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때로는 다투며, 고생을 나누는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홈 리스에게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시고 감사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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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되려면(루가 14:25-33)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 되기를 원하세요? 예수의 삶을 살기를 원하세요? 예수님 처럼 되기를 원하세요?  쉽지 않은 답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면서도 실상은 내가 ? 무엇을 위해서 예수를 선택하였는지 확실한 목표가 없어요. 그러면  흔들립니다. 마음대로 믿고,  내가 믿고 싶고 것만 믿고 삽니다. 결국은 내가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진리가 자리하지를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변함없는 하느님이 안에 살아계셔서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라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구티에레즈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5복음이 있다고 합니다. 사복음서외에 내가 복음이 있어서 오히려 그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보다는 내가 경험하고 내가 알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믿고 산다면 예수의 제자는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이 이번에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성인이 예는 일찍이 없었다고 합니다. 대개는 세기가 지나고 나서 그의 공덕과 전설적인  신앙의 기적을 통해서 성인으로 추대를 하는데 별세한지 오래지 않은 분을 성인으로  인정 한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여인이  일찍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수녀가 되어 일생을 가난하고 병든 인도 캘커타의 빈민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고단한 삶을 따라서 함께 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지어  몰려들었습니다. 데레사 수녀처럼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한번 살겠다는 겁니다. 분은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비난과 관계의 어려움, 시기 질투 여러분과 똑같은  어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지식으로 남들에게 가르침을 줄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데레사 수녀를 보고  용기를 얻어  예수의 길을 가게 되는겁니다. 사람이 한다면 나도 할수 있다. 그들이 saint라면 우리도 saint 있는겁니다.   

1, “누구든지 자기 자신마저 부인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수 없다.”

여러분 나를 부인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무엇을 부인한다는 것인가요?

 신앙의  출발은 내가 누구인가?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삽니다. 대부분 자기의 본질은 모릅니다. 껍데기만 압니다. 껌데기들은 수시로 떨어져 나가고 변화합니다. 이름도 바뀝니다. 모양도 바뀝니다. 성품이나, 습관과 상황도 빠뀌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런나를 나라고 주장하고 믿고 사는것이 사람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부인하라는 말은 본질이 아닌 거짓된 자아를 부인하고 미워하라는 말입니다. 나의 본질이 아닌것 나의 본성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형상이 아닌것은  하느님에게 속한 진리의 내가 아니기에 그것을 휘둘리고 그것에 속상하고 살지말고 그것을 미워하고 버려서 ”(진아) 찾아서  평안하게 살아라 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자아를 자기인줄 알고 삽니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이어서  또다른 거짓을 낳는겁니다. 그런 인생은  모두가 거짓으로 똘똘 뭉쳐서 나를 옭아매어버립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미워하고 부인하고  나를 가지고 따르라이말입니다. 여러분 나라는  존재는 대단하지 않아요 우주의 먼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먼지같은 존재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사실 알게되면  가치는  달라집니다. 데레사 수녀의 훌륭함은 그분은 참나 하느님의 작품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종이 한장 차이일뿐입니다.

거짓을 사는 사람은 사람을 바꿉니다. 어느정도 알고 나면 자기가 드러나니까 불편합니다. 그러면 상대를 바꿉니다. 이런 인생을 계속살게 되는 것이지요.

2, “너희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여러분 예수 믿는데 걸림돌이 무엇인가요? 버릴것을  버리기 때문이지요. 집착이라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 자식에 대한 집착, 일에 대한 집착, 등등  무언가에 집착하면 주님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의 말씀만이,  하느님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러분을 살릴수 있어요. 하느님외의 모든것은  나와 일시적인 인연을 맺을 뿐입니다. 때가되면 사라집니다. 떠나갑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집착하고 잡고 있는 그것들 가운데 영원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요? 그런데 그것에다 모든 것을 쏟는다면  그것은  후회하게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진것을 모두 버리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진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알기에 방해되는 모든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축복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푸르고 싱싱하게 자란다고 시편에서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를 사는 사람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빌레몬서에서 소개하는 오네시모라는 바울의 제자가 있는데 그는 본래 노예였는데 바울이 감옥에 있을때 함께 하다가 예수님을  믿어 제자가 사람입니다.   노예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죽을 때까지  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하기 싫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집착으로 사는 사람은 노예로 산다고 있습니다.  집착이라는 욕망이 이끄는대로 사는 것은 노예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이제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버리고 하느님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신분을 바꾸게 됩니다. 그런 오네시모를 바울은 나의 심장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   심장같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이런 하느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느님의 심장을 가진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먼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제자로 서의 삶을 분명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때  여러분은  참된 진리의 축복을 살게 되고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넘쳐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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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성일 (all saint,s day)

제성일은 본래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이후 7세기부터 서방교회에서 제상일을 지키게 됩니다. 제성일은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성인의 날을 가지키 않은 성인들에 대한 기념을 하는 날입니다. 

성인이란 누구인가?

성인(聖人)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보통 성인이라고 말하면, 도무지 결점을 찾을 수 없고,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어 교회 안에서 평생을 살며, 금욕적인 삶을 통하여 열심히 고통 받을 기회를 찾아다니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매달리고, 황홀경을 경험하고, 손발에 오상(五傷)이 나타나며, 기적을 일으켰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기도하며, 세상과 사람들을 떠나 고독 속에서 하느님만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읽었던 성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러했고, 교회는 다른 성인을 애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찍 성인이 되기를 포기합니다.

교인들은 이런 이유로 크리스챤이 되는 것도 일찍이 포기하기도 합니다.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닮을 수 있어? 예수의 가르침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축복에만 매달려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룩한 공간을 찾아 다닙니다. 성인은 공간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거룩한 공간에 있어야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그 공간을 축성(祝聖)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쫓겨나셨고, 성전을 뒤엎었으며, 유다의 사제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성자들은 사막으로 나갔고, 그 사막에서 나타난 분이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일상의 거룩함

 

 

 

고통으로 따지자면, 수도원은 오히려 안전지대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 모를 고난이 닥쳐오기 십상입니다. 오만 잡다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악취를 견뎌야 하고, 생계를 돌보기 위해 전쟁터 같은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는 순간, 세상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집니다. 내 한 몸도 버거운데, 자녀가 생기면 내 사랑이 그 아이들의 운명을 감당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힘겨워서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그 어떤 사랑이 나를 휘어잡으면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연민으로 세상의 고통을 기꺼이 지고 가게 됩니다. 내 아이의 입을 위하여 내 몫의 빵을 떼어 놓을 때 우리는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셈입니다. 삶의 고단한 현장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 때문에 박해 받는 것이 수행이 됩니다.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집 앞에 서 있는 걸인에게 밥 한 그릇을 나누어 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행복합니다.

참다운 성인은 세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평범한 농부이며 주부이며 의사이며 학자이며 노동자입니다. 그는 노숙자이며 교사이며 때로 버림받은 이의 모습입니다. 성인은 꼭 수도복이나 수단을 입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헐렁한 점퍼 차림과 낡은 구두 아래 숨어 있는 성인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들이며, 주변을 따뜻하게 데우는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성인이란 “그들의 고행과 환시와 행적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선함에 대한 탁월한 역량” 때문에 성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길에서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를 만날 때마다 큰 기쁨이 솟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전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주님, 저런 분과 한 하늘 아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1, 가난한 이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 성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행복이란 정확하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면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때에는 거룩한 역설에 따라 한 가지 필요한 것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지복(至福)을 누린 성인들이 발견한 그 한 가지는 항상 같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진주를 발견한 농부가 집과 재산을 다 팔아 진주가 묻힌 밭을 샀다는 성경의 이야기처럼,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성인은 그리스도와 길동무가 되는 사람이고, 동지요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운명을 나누어 갖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것이 곧 수도자가 되겠다고 작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리를 옮길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 사람을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환경은 물리적으로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지만, 그 사람의 혼이 새로워지고, 환경을 바라보고 대하는 그이의 안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로수를 만지면서도 수액을 따라 지금도 흐르고 있을 창조의 기운을 느끼고, 하늘의 별을 보다가 갑자기 속으로 흐르는 감사의 눈물을 깨닫게 되고, 가난한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부유하나 겸손하고 궁핍하나 당당해집니다. 손끝이 따뜻하고 섬세해지며, 입술이 부드럽고 친절해집니다. 힘써 일하며 즐거이 찬양합니다

2,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예전에 레오나르도 보프가 썼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란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신비가들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배회하거나 아예 세상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고난과 아픔에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신비가’라고 부른 이유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봐야, 성령의 빛이 비추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인으로 선택되어지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자격을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것이 성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는 이유는 성인의 삶을 배우고 고백해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인의 삶을 살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삶을 실천하여 삶으로 성인으로 하루 하루를 복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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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가치 (요한 2:13-22)

사순절 셋째 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눈때문에 두주간 교회가 클로즈를 하여서 사순절 시작을 제대로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각자 기도하시면서 주님의 뜻을 지키고 삶을 살펴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라면 몸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순절에 훈련을 통하여 나름대로 지켜야 것과 버려야 할것들을 찾아서 40일동안 한다면 그것이 몸에 익어서   신앙생활에 습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습관이 있어야 거룩한 생활이 만들어지고 거룩한 생활이 여러분의 삶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거룩함은 하느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결을 의미하고 깨끗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함은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깨끗함을 원합니다.  깨끗함이라는 것은 거룩함과 영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주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악령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무덤에서 살던 사람은 아주 더러운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게서 그안에 있던 악령을 쫓아내자 그는 깨끗하고 얌전하게 변하여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겉모습과 생활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같은 모습은 우리 주위에도 많습니다. 몸에 지나치게 문신을 하고 피어싱을 하여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사람들을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것을 개성이나 자유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한번 우리들의 사진들을 들추어 보면 우리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겉모습에 나타납니다. 방황하고 혼란스러웠던 때와 정결하게 살던 때의 사진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유월절에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예배 장소요, 성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도하러 가보니 성전마당에는 제물을 파는 장삿꾼들과 짐승들, 그리고 환전상들과 장삿꾼들이 가득하였고, 기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입구에는 은행에서 나와서 각종 헌금을 접수하고 있고 교회에서는  바자회를 한다고 장터를 만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둘러 엎으며 소리쳤습니다. “이것을 걷어치워라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이것이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집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깨끗게 하신겁니다. 세속에 오염되고 잘못되어진 하느님의 집을 본래의 목적으로 깨끗이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게 나아와 제사드리고, 새로운 삶을 만드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서 하나하나 고치다 보니 어느덧 하느님은 사라지고 사람의 일만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마비되고 사람들은 성전에서 선포되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더이상 들을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성전은 허물어 버리라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게 하지 않는 성전은 시장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더이상 기도할 마음이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있던 캔터키 교회는 밤이면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 와서 잠을 잡니다. 겨울에는 난방이 되고 여름에는 냉방이 되니까 머물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아침기도를 가서 놀랜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성당문을 걸어 잠근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열려 있습니다. 가끔은 노숙자가 주일미사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요즘 미국의 어느 교회도 건물을 열고 노숙자들이 밤이면 와서 쉴수 있도록 하고 그들을 위해 아침에는 식사를 준비해 주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집이라면 누구든지, 언제나 들어갈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교회는 들어 없습니다.   기능을 상실한 것이지요. 우리 교회는 그나마 채플이 열려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많이 열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이 세속화된 성전을 정화하여  하느님의  집으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일이  일어나야 교회가 정화되고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교회와 교인들은 분명히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린토 전서 3장에는 너희의 몸이 성전이라 그러므로 너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느님게서 멸하시니 거룩하게 지키라고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의 성전이 깨끗치 못하면 결국 그들이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전이 되어 성전에 들어가야 비로서 그곳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는 먼저 자신을 준비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나는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면 안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체가 정화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더럽고 오염된 영혼이라도 성령안에서 필터링을 하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모두 정화를 위하여 준비된 영혼들입니다. 그런 깨끗한 마음들이 모여서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작은 공동체는 소중한 옹달샘같습니다. 아직 맑습니다.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사랑과 순결한 마음을 주님과 함게 만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오늘 구약말씀에서는 십계명이라는 귀한 율법을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가운데 하느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간을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하심과 은혜로 살아   사람만이 거룩한 주일을 지킬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소망하는 깨끗한 마음들이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 주일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드리는 생활을 습관으로 하십시오. 그런 마음 가운데 세상을 이겨내는 깨끗한 마음이 자라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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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의 사명 (마가 1:29-39)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인지,  사람을 위한 일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잘못된 결과를 만들수 있습니다. 롯데 앞에서 소리를 높여 전도하는 사람을 봅니다. 용기에 놀라면서도 한편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합니다.  전도자의 입에서는 성경말씀을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소음으로 들립니다. 이것도 소통을 못하는 결과입니다.  불통의  문제는  남을 배려할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전도를 가르치면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하라는 말을  독선적으로 이해해서 전도를 못한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가 흥성할 때가 있었습니다.  20세기 기독교는  거칠것 없이 부흥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땅에 꽂기만 하면  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고속으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시기에는 길에서 누구나 소리를 내었고 사람들은  반응하였습니다.  시대에 기독교는 오만하였습니다.  그때의 습관을 가지고  21세기에 전도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매우 다양한 시대입니다. 사회나 개인도 다양해졌고 정보도 많아졌습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무례하다고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이제는  전도를 예의있고 품위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느님도  대접받습니다. 앞으로는 싸구려 복음교회는 사라질겁니다.  고품질의  교회만이  복음을 전할 자격이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전도에 대한 주님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는 두가지의 전도가  나타납니다.

1, 예수님의  전도입니다.

주님께서는  현장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전도방법은 함께  하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아프고 힘들다고 주님을 원하시면  주님은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누구의 청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전도를 제자들도 옆에서 배웠습니다.  예수께서 떠난후  복음은  제자들에 의해서  세상에 선포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반을 생활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삶을 직접 배웠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병을 고치고 더러운  영을 쫒아내는 자리에 제자들과 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함께 발견하고 치유의 방법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면 나가서 나와 같이 하라고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내십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는 항상 어렵고 고통받고 힘든자들과 함게 하면서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복음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행위와 함게 했습니다. 서로 다른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전통을 교회는 간직하고 세상의 문제와 고민들로 부터  함께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말씀으로 복음으로  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할 있는 응답인지를 진지하게  찾는 것입니다.

2, 바울로의 전도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될수 없습니다.”

사실 바울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경험이 없습니다.  그는 극적으로 예수의 영을 만나 스스로 깨어지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의  전도는 제자들의 전도와는 차이가   있겠지요. 오늘날  개신교회는 사도 바울로의 전도를  많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실 바울로의 전도로 인해서 세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바울로가 원치는 않았지만   주님같은 예언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도 믿음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같은 삶으로  전도자의 사명을 이어갔습니다.  바울로는 복음이 자기의 자랑이 될수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것은 말씀으로 변화되고  회복되어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전도자들은 복음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주님을 언급하지만 이미 안에는 자기가 주님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이   하느님의 말씀이 나의 자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이고 나도 아래에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말을 바구면 전도는 겸손히 하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말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복음으로 소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맞추어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원래 바울로는 고집이 전통적인 유대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섬길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복음전도자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게서는 인간과 소통하시려고 땅으로 내려 오셨지요.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늘의 것이지만  세상속에서 누구나 나누고 가질 있는 하느님의  축복언어인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자기 잇속을 채우거나,  딴짓을 한다면  이것은 수치스러운 행위입니다.  것입니다.

나눔의 운동이 성공회에서  35년전에 시작이 되었다. 초창기에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과 사는데 일용직 노동자들과 술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것이 시작이었다.그당시 이것은 교회 선교방법이 아니었고 교회들로 부터 비난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지금은 당당히 교회가 되어  주님들이 복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다. 주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당신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셨던  전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생명이라도 구원할 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서 그들과 같이 하겠다는 바울로의 전도방법과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성공회는 21세기 교회라고 소개합니다. 21세기 사회의  많은 문제와 이슈를   교회에 담아서 이야기를 하고 실험하는 열린교회입니다.  서로가 다른 생각과 문화와 언어 들이 있어도 그것을 존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다양함을 인정하는 정신이 있어서 누구도 누구를 심판하 않습니다. 안에서 저는  무언가를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나 바울로 사도의 공통점은 2000년전 옛날에  21세기 살고 있는 교회나 사람들도  뛰어 넘지 못하는  장벽을  두려움 없이 허물고 의연히 전도하는 모습을  다시 조명해야  것입니다.  주님게서 하셨는데 우리가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전도는 사랑으로 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앙행위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에게 향기가 되어 실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 치유가 되고, 분쟁과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와 화해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능력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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