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근본 이유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았고 사랑을 나누어 주어야 책임과 의무를 부여 받았다고 믿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것은 자신의 믿음의 분량을 판단하는 중요한 척도가 됩니다.

 

우리는 교회 안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말을 얼마나 많이 듣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오히려 사랑이란 단어에 오히려 무감해져 버린 것 같습니다.

부드러운 말투, 겸손한 태도, 남을 배려하는 마음, 선행 등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교회 공동체 안에서 중요한 덕목으로 요구됩니다.

.

성경에서는 단호하게 믿음의 형제들에게 서로 사랑하여라 하고 명령하고 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현재 우리들이 지니고 있는 기독교인 갖춰야할 덕목으로 이야기 되어지고 있는 것인가?

 

“옳은 일을 하지 않거나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로부터 난 자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식은 분명히 구별됩니다.요일3:10)

 

여기서 보면 사랑하지 않는 자는 하느님께 속하지 아니한 악마의 자녀라고 정도로 아주 중요한 문제로 말하고 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너무나 단순화시키고 문자적으로 이해를 해서 형제를 사랑한다는 증거로 인해서 자신이 하나님께 속했기 때문에 구원받은 자라는 확신을 갖게 되면 곤란한 일입니다.

단순 무식하게 서로 사랑하자라는 말이 있으니까 사랑하자라고 해서는 안되고 중요한 것은 과연 성경에서 말하는 사랑이라는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흔히들 교회 안에서 가르치고 알고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세상에 속한 사람, 다시 말해서 악마의 자녀들에게서도 얼마든지 있는 사랑의 수준으로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사랑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오직 하느님께 속한 자에게서만 보여지는 신자의 특징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날 교회 안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활동들은 성경이 말하는 사랑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이해하지 못하고 세상적인 수준에서 사랑을 말하고 가르친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약한 사람이나 양로원이나 홈리스들에게 구제를 하면서 사랑을 실천한다고 해서 과연 사랑하는 것이 되는가? 그렇게 하면 하느님께 속한 것이 인정되는가?

일본이 지진의 피해를 입었기에 그들을 돕기 위해서 구제헌금을 드린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되는가?  이웃이 서로 웃으면서 친하게 지내고 사이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사랑이라고 있느냐는 말이다.

과연 성경이 이러한 것을 사랑이라고 말하는 것일까?

 

성경의 모든 말씀이 무엇을 지향하는지에 대해서 깨달음이 없다면 성서 말씀의 명령들은 단순히 신자가 실천해야 덕목과 그리스도인의 윤리 정도로 이해하고 그것은 모든 종교가 경전을 통해서 설명하고 있는 인생의 도덕과 윤리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원수를 사랑하라 말씀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는 원수의 개념이 명확하게 드러나야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되어지는 것이다. 성경이 인간의 언어로 쓰여졌다고 해서 내용을 우리가 있거나 이해되는 것은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깨달아 알려주셔야만 제대로 수가 있는 것이다.

이웃을 몸과 사랑하라 말씀도 역시 이웃이라는 개념을 알아야  사랑하라는 말씀의 실체가 드러나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을 설교자가 교인들에게 설교를 통해서 선포해야만  알아들을 있는 말인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고전2:13-14)

 

그러므로 서로 사랑하라 말씀도 하나님께 속한 자만이 이해할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자에게는 미련하게 보이고 깨닫지도 못하는 것이 되는 것입니다.

만약에 오늘날 교회가 가르치고 실천하는 식의 사랑이라면 기부를 하거나 봉사를 하고,  자선사업을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 속하였다고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서로가 사이좋게 지내지 못했다고 해서, 싸우고 다퉜다고 해서 과연 그것을 사랑이 없는 것으로 말하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것으로 있을까?

 

 

결국 성경에서 말하는 서로 사랑하라 말은 그런 세상적인 관점에서 보는 사랑의 실천이 아니라는 것을 있습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요일4:7)

 

바우로 사도는 하나님께 속한 자라면 서로 사랑하는 것이 당연한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사랑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자가 서로 만나는 것이라면 마땅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이것은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되어지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성품입니다. 성품이란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가 있다면 그리스도가 나타날 것이고 내 안에 악마가 있다면 악마가 드러날 것입니다. 성서에서는 이것을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사람들은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이 많습니다. 하느님에 대해서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요구만 내어 놓는다. 그러나 사실 사랑해 달라고 하는 것은 아직 하느님의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고(요일4:8) 말씀하고 있고,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면 하나님을 믿는 신자는 사랑을 믿는 자로 살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을 믿는다면 굳이 사랑해 달라는 요구가 필요 없습니다. 이미 사랑안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사랑을 벗어나 살지 않습니다. 어떤 일을 겪든 모든 것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되어지는 일들이다.  비록 고통과 어려운 일이라 할지라도 사랑 안에서 되어졌다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포도나무에 붙어 있는 가지들의 당연한 삶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하나님께 속한 자는 당연히 사랑 가운데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자는 사랑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랑을 받는 것에 관심을 갖을 밖에 없다.

 

교회 안에서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도 역시 서로가 사랑을 원하기 때문이다.

사랑은 인간적인 친분관계와 공동체의 결속력을 다지는데 필요한 사랑입니다.

그래야 내가 다니는 교회가 달라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그저 자기의 편안함을 위한 것이지 결코 성경이 말하는 사랑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이웃을 몸과 같이 사랑하는 말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예수님이 자신의 몸을 내어 주신 것을 생각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신 것입니다.

 

사랑을 하나님께 속한 것으로 말하는 것은 인간에게서는 그런 사랑이 나올 수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설령 자신이 타인을 위해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줄지라도 그것이 하나님께 의로운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사랑이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랑 앞에서 모두 부인되어져야 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서로 사랑하라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만 진짜 사랑입니다. 우리들의 사랑은 사랑 축에도 끼어들 없습니다라는 고백과 함께 예수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내가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내가 전하는 예수님을 이웃이 좋아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또한 타인을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타인이 사랑하는 예수님을 역시 사랑하는 것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러니 그리스도를 알지 못한 자가 어떻게 사랑할 있겠는가?

신자가 예수님의 사랑을 받은 자로서 예수님을 전하고 은혜와 사랑을 나누는 관계로 만나는 것이 친절함이요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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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화해 (루가 15:1-32)

화해(Reconciliation)라는 말을 깊이 곱씹어 보고 싶습니다.

  단어를 묵상하다보면 평화라는 말이 같이 나타납니다. 어쩌면 지금 우리는 화해가 없는 불행한 시대를 지금  살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합니다. 서로 존중하고 이해하는 보다는 나와 다르다는 것으로  거절하고 잘라버리는 것을 너무나 쉽게하는 것입니다. 사람간에 계층간에 인종간에 각자의 울타리를 만들고 안에서 자기만의 소리를 내고 다른 것에는  관심같지 않는 그런 모습들이 많습니다. 그래서 화해보다는 싸움을 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세상은 여러분에게 싸우고 투쟁하라고 말합니다. 서로 다투어서 승리하라고 말합니다. 결과는  상처와 불신입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방법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화해를 말씀하십니다. 모든 일도 화해를 통해서 해결하라고 성서를 통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사람과 화해하는 방법으로 화목제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람이 하느님께 이웃에게 죄를 지어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하려면 먼저   화해의 제물을 가지고 하느님 앞에 나오면 하느님께서 사람의 죄와 허물을 받아주시고 용서하셔서, 사람은 화해를 통한 평화를 얻습니다. 하느님 목적은 세상을 향한 심판이 아닙니다. 용서에 목적을 두고 있습니다.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제물로 삼아 우리와 화해를 이루셨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인간과 화해하셨습니다.”지금까지는 사람이 하느님께 화해제물을 드렸지만 일이 반복되고 죄가 사라지지 않으니까, 이제는 하느니께서 당신의 아들을 직접 제물로 드려서 인간에게 더이상 형식적인 제물이 필요없이 하느님의 제물을 믿는 자들에게 화해할 있는 길을 만들어 주신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사람들은 화해의 삶을 살고 싶습니다. 그런데 화해 방법을 잃어 버렸습니다. 화해의 기술을 가지고 있지를 못합니다. 지금 내가 사는 인생이 무언가 잘못되어서 실타래 처럼 얽혀있습니다. 어떻게 해결 하고 싶은데 방법을 찾을 없습니다. 혼란속에 뺘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평화가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에게서 찾아야 합니다. 오늘 말씀으로 들어가 보겠습니다.

1,  내가 잘못됐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은 무한합니다. 그래서 아들이 원하는대로 재산을 나누어 주었습니다. 재산을 가지고 자기가 성공해 보겠다고 스스로 생각한 아들은 받은 재산을 자기 생각대로 하다가 결국에 방탕한 생활에 빠져서 알거지가 되었습니다. 인생을 실패한 아들에게 먹을 것을 주거나 동정을 베푸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제야 정신이 아들은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 아버지 집에는 양식이 많아서 많은 일군들이 먹고도 남는데 나는 여기서 굶어 죽는구나그가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의 집을 생각할 때까지 그가 받은 고통은 죽음에 가까웠습니다. 죽음의 두려움 속에서 회개가 나옵니다.”어서 아버지께 돌아가자 아버지 제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새로운 출발은 나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으로 부터 시작합니다. 내가 아직도 있다는  생각과 아집에 사로잡혀서  해보겠다고 하는 새출발은 되지 않습니다. 평생 다져온 생각과 자존심을 포기하는 것이 절대로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버려야 비로서 하느님 아버지가 생각나고 보이는 겁니다. 하느님께서는 모든 것을 가지고 계십니다. 내것만 내려놓으면 그것을 누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는 탕자입니다. 그것이 인정이 되어야 하느님을 찾게되는겁니다. 새로운 출발이 되는겁니다. 아직도 내가 탕자인줄을 모르고 잘하고 사는 효자인줄 착각하고 사는 인생의 변화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2, 주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회개하고 돌아오는 아들을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떠나 보낸후 항상 그자리에서서 문을 항상 열어놓고 그를 기다렸습니다. 그가 흥하던지 망하던지 상관없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원하고 있었습니다. 아들이 어떤 짓을 하더라도 아버지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이것이 주님의 모습입니다. 주님이 우리에게 죄를 짓지 않습니다. 사람이 죄를 짓고 사람이 주님을 떠나고 사람이 타락하고 스스로 절망합니다.그리고 자신의 죄로 인한 결과임에도 오히려 주님을 원망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항상 똑같이 자리에 계십니다. 사랑은 잘먹고 잘살고 평안할 때는 드러나지 않습니다.  고통과 절망과 어려움에 빠져서 누구도 도와주지 않을   품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새롭게 출발할 있는겁니다. 소위 일탈하는 청소년들은  부모로 부터  잘못을 질타당하고 심지어 폭행을 당해서 돌아갈 곳이 없어서 그렇게 된것입니다. 그들은 돌아갈 아버지 집이 없습니다.  가고 싶어도 용서하고 사랑해 주고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것입니다. 그래서 방황하며 사는겁니다. 우리들도 인생에 방황이 있습니다. 우리가 곳은 주님이 기다리시는 그곳 밖에는 없습니다. 믿음으로 돌아가야합니다.

 

 

 

3, 화해제물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갑돌이와 갑순이가 살았는데 갑돌이가 기념일을 잊어버려서 갑순이가 화가 났습니다. 그러자 갑돌이는 장미 백송이를 들고 가니 갑순이가 화가 풀려서 화해가 되었다. 화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제물이 있어야 합니다. 탕자는 아버지께 죄를 지었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 가는데 망했기 때문에 아무것도 가져갈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아버지는 아들을 보자마자 끌어안고 입히고  반지를 끼워주고 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배플어 주었습니다. 무엇이 아버지를 감동시켰습니까? 빈손으로 망해서 거지가 되어 아들 자체입니다. 어느 부모는 돈을 가져와야 환영합니다 출세하고 공부를 잘해야만 받아들입니다. 부모의 자랑이 되어야만 자식같이 생각합니다. 이것은 참부모가 아닙니다. 자격이 없는 부모입니다. 하느님게서 원하시는 화해 제물은 바로 우리 자신입니다. 여러분의 돈이나 정성이나, 봉사는 부수적인 것입니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느님께 돌아와 사는 것이 주님게서 원하시는 참된 제물입니다. 내가 온전한 하느님의 제물이 되면 제물 가운데 하느님의 모든 축복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오늘 미사 가운데 하느님게서 원하시는 가장 소중한 봉헌물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신앙고백은 이것입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자기를 화목제물로 바치셨다. 우리는 예수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삶의 고백을 통해서 온전한 화해를 하느님과 이루게 되었다.” 그러므로 내가 제물이 되어야 합니다. 내가 바쳐져야 합니다. 내가 하느님 앞에 서야 합니다. 제물을 주님께서 기쁘게 받으시고 축복하십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축복을 누리며 사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죄를 묻지 않으시고 그리스도를 내세워 우리를 당신과 화해하게 주셨습니다.그리고 화해의 이치를 우리에게 맡겨 전하게 하셨습니다.”바울 성인은 이어서 말합니다.”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합니다. 하느님과 화해 하십시오.” 여러분 말씀을 어떻게 들으십니까?   어리석은 사람들은 하느님과 대적해서 삽니다. 그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입니다. 내가 죄를 짓고 잘못해서 탕자같이 된것을 하느님을 원망하는한 우리는 새로운 출발을 없습니다. 그러나 나의 잘못이며 내가 하느님을 떠나 인간적으로 잘못 판단하고 결정한 것으로 인하여 일어난 모든 나의 일들을 회개하고 하느님 아버지에게 돌아 간다면, 하느님은 나를 받아주시고 새로운 출발을 만들어 주실 것을 오늘 말씀은 분명하게 약속하고 계십니다.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하느님과 화해하는 삶을 사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을 하느님께 드리십시오 그것이 축복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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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존재론(마태5:13-20)

용서라는  말은  종교적인 언어만은 아닙니다. 모든 인간이 풀어야 중요한 관제입니다. 그런데   교인은 당연히  무조건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들로  보고 그렇지 않으면 욕을 먹습니다.   또한 교인들은 착한일만 해야 한다고 하고 비난이나 저항을 안하고 순종해야 된다고도 합니다. 이런것들이 그리스도인의 존재일까?  각자의 취향일 있지만  이렇게 규정짖는것이 맞는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존재는 범위에서 규정지어져야 됩니다. 오늘 복음은 주님께서 그리스도인이 어떤 존재여야 하는지 존재와 가치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을 향해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어라하십니다. 삶에서 필요한 것이 많지만 두가지는 없어서는 안될 중요한 요소들입니다. 이것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사람은 반드시 세상에서 필요한 존재라는 말씀을 하는겁니다.

1, 소금,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함께 읽는다)

우리는 바닷물에서 소금을 얻지만,  유대인 지역은  석탄처럼 소금을 산에서 캐는 암염을  먹습니다. 그래서 유대땅에는 소금이 돌처럼 굴러다닙니다. 집에서 암염을 사용하다가 떨어뜨리면 이것이 굴러 다니면서 사람들의 발에 차이고 밟히는 상황이 생기는겁니다. 소금이지만 어떤것은 음식에 사용되지만  땅바닥떨어지면 돌처럼 보입니다. 돌처럼  무시당하는겁니다. 소금 그릇에 담겨 있지 않으면 그냥 돌처럼 보입니다. 존재가 없는겁니다.

사람으로서  누구나 싫어하는 것이 무시당하는겁니다. 이것 때문에 살인도 일어납니다.  부부 사이에 무시하면 살수 없습니다.  멸시를 당하게 되면 죽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면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부모로서  자식으로서  세상에 살면서 자기  역할을 못하면 무시 당합니다. 그러면 살고 싶지 않은 것이지요. 그리스도인이 자기의 존재감을 모르면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죽은 겁니다. 내가 하느님의 사람으로 살면서  내가 어떤 생각과 행위를 통해서 나의 존재를 드러내야  내가 하느님의 사람으로서  가치를 사는 것인데 세상 사람과 전혀 구별이 없다면 회의가 오게 되는 겁니다. 내가 예수를 믿는가? 내가 교회를 다니는가?

그래서 우리는 입으로 몸으로 하느님을 표현하고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맛이 나는겁니다. 우리는 삶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로 인하여 세상이 맛이 나야 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그리스도인들로 인하여 맛이 점점 떨어져 간다면  무시당하고 발로 차이게 되는겁니다. 이런 수모가 어디있어요? 정말 부끄러워해야 합니다. (과일이 맛이 안나면 먹지 않고 버린다)

 사람도 맛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을 보고 밥맛이 없다고 해요. 어떤 사람을 보면  기분이 좋은 밥맛나는 사람이 있다고 해요. 누가 좋은 사람일까요? 여러분은 누군가 밥맛을 내게 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는 밥맛나게 하는 분이었습니다. 신명을 불러 일으킵니다. 병자를 일어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어둠에 갖힌 자를 가운데 세웁니다.  그래서 잔치가 벌어진것이지요. 주님께서 맛이 없는 사람들을 불러 맛있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십니다. 정말 예수처럼 살면 그렇게 됩니다. 여러분은 얼마나 맛을 내며 살고 있는지요? 생각해 봅시다.

2, 빛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16절을 함게)

빛이 하는 중요한  역할은 보게 하는 겁니다.  그래서 빛이 나타나면 모든 것이 드러납니다. 사람들이 촟불을 들고 노래합니다.”어둠은 빛을 이길수 없다 빛은 어떻게 생겨납니까?  무엇이든 자기를 녹여야 안에서  빛이 나옵니다. 나무 ,배터리, 어떤 물질이 죽어야 그곳에서 빛이 나옵니다.  빛이 되려면 나를 태워야 합니다. 안그러면 빛이 나오지 않습니다. Sacrifice  빛은 스스로 빛이 되지 않고 다른 존재를 비추어야 비로서 빛이라는 존재가 나타납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보게되는 것은 다른 것을 통해서 나타남으로 비로서 보는겁니다.

 

소금과 빛은 공통점이 있습니다. 자기를 위해서 존재하지 않고 무언가를 위해서 존재한다는겁니다.

이것은 우분투 정신입니다. 남아프리카의 반투어에서  평화사상을 담고 있는 아프리카 언어입니다. “나는 너를 위하여 존재한다혼자가 아니라 서로를 위하여 받아들이고 공동체를  생명으로 빛나게 하는 것이 우분투 정신입니다. 우리에게서 내가 상대방을 위해 빛을 비추지 않으면 나는  생명이 없는 죽은 사람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 상대를 살리기 위해 사는 것이  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빛이 되어 상대를 비추어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내가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런 사람이어야 한다. 아니 인간은 그래야 하는데 사실을 잃어 버리고 살기에, 예수께서 오셔서  인간의 도리를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그럼 소금이 맛을 내고 빛이 어둠을 밝히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하늘에 계신 하느님을 찬양하게 하여라목적이 하느님을 찬양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다시말해서 내가 녹아서 맛을 낼때 내가  희생하여 빛을 밝힐 사람들은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는겁니다. 여러분 어머니의 모성애에서 하느님을 보지 않습니까? 아버지의 헌신에서 하느닙의 사랑을 느끼지 않습니까?  모두에게서 우리는 거룩한 하느님을 만나는 겁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죽지 않았다면 세상은 하느님을 몰랐을 겁니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자기를 보이지 않았어요. 하느님의 거룩함과 사랑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래서 예수가 그리스도가 것입니다. 살아서 그리스도가 되지 않았어요, 죽어서 그리스도가 되신겁니다. 그를 보고 하느님이 사랑이시구나 하는 사실을 사람들이 알게 것입니다. 구약시대까지만해도 사람들은 하느님을 무서운 심판자로만 알았는데 비로서 하느님이 구원자의 사랑을 가지신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부모에 대해서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어떻게 압니까? 어떤 사건을 통해서 압니다.

레아는 아버지가 자기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압니다. 한번도 안아주지도 않았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지도 않았는데 한가지 사건으로 아버지가 나를 사랑하신다고 믿고 있어요.한번 어플때 등에 업고 정신없이 달려간 아버지에게서 사랑을 안겁니다.

소금과 빛은 그냥 존재로서 자기의  자리에 있으면 되는 겁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사용하시고 소금으로 빛으로 사용하셔서 우리 모두를 이롭게 하는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어둠속으로 점점 들어간다고 합니다. 이제 여러분들이 일어날 때입니다. 나를 녹여서 맛을 때입니다. 나를 사용하여 빛을 밝힐 때가 것입니다. 하느님게서 이날을  당신의 자녀들에게 숙제로 주신 것입니다. 그의 부르심에 당당히 서시기 바랍니다.

죽으면 살리라는 말씀처럼 우리는 살아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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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섬김 (마르코9:30-37)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야 한다.  오늘 말씀의 주제입니다.섬김에 대한 생각을 함께  나누고자 합니다.

행복한 세상은 서로 섬기는 세상입니다. 대접받으려는 사람이 많으면 많을 수록 사회는 불행합니다.  자기 능력과 위치에서  자기를 낮추고  서로를 받들어 준다면 사회는  행복한 사회일겁니다. 주님께서 세상에 보여주신 모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그의 능력을 보고  주님을 왕으로 받들려는 사람들에게 나는 섬김을 받으러 온것이 아니라 섬김을 하려고 왔다 스스로의  가치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섬기는 사람 그것이  크리스챤입니다.  주교들의 옷을 보면 붉은 피의 색깔입니다. 이것은 죽도록 섬기다가 죽는다는 의미입니다. 사제들이 검정색  옷을 입는 것도 죽은 자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모든 교우들이  죽기를  결심하고 죽도록 낮아져 산다면  공동체는  행복할  것입니다.   이렇게 교회는 모두가 섬김의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1990 뉴질랜드 오클랜드 대성당에서 영국여왕을 직접 만났다.  영국왕실에 대한 부정적인 것도 있지만  영국인들에게  엘리자벳2세는  실제적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엘리사벳 2세에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엘리자벳 2 여왕이  왕위계승자로써   공주였던 20세에  그녀는 아버지 왕에게 요청해서 2차대전 중에  군복무를 자청하여  트럭운전병으로 복무하였다. 트럭 바퀴를 수리하고 탄약을 운송하고 흙바닥에서 뒹굴며 일반인들과 똑같이, 아니 열심히 일을 하는 그녀를 보고 영국인들은 국가에 대한 봉사를 명예롭게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녀를  차기 여왕으로  인정하였습니다. 여성 왕족 가운데 엘리사벳2세가  유일하게 훈련을 받고  일반인과 동등하게 전쟁에 참여한 인물로 역사에 남아있습니다. 이후 엘리자벳 2세의 자녀들도 군복무를 하고 손자들도 나라에 대한 봉사를 당연하게 여기고 전쟁에도 솔선해서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것으로 영국인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오블리스 노블리제 입니다. 국가의 리더가 스스로  낮아짐으로 국민의 존경을 받고  리더로서 인정받는 것입니다. 오늘날 한국의 리더들은 그러한 정신을 실천하지 않기에 국민들로 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이동원 목사는 대형교회를 두개나 세운 소위 성공적인  목회자이다. 그는 5 먼저 은퇴를 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목사들이 원하는  집과 은퇴금을 전혀  받지 않았다. 스스로  살만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으로 그는 한국교회에서 존경받는 목회자가  되었다.  그에게  우리가 어떻게 부활할 있는가? 라고 질문했습니다.

부활하려면 먼저 죽어야 한다. 리더가 죽어야 리더쉽이 살고 교회가 죽어야 예수가 산다. 역설적이지만  주님의 복음은 언제나 역설을 통해서 진리를 말합니다.   

법정스님은 무소유를 실천하고 전함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청정한 삶을 보여 주었고 세상에서의 욕망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스스로 보여 주었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존경합니다.  

결국 세상에서 인정받는 사람들은 첫째가 되려고 욕심을 부린 사람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만한 능력이 있음에도 스스로 내려 앉아서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진심으로  존경하고 인정합니다. 그런 사람들로 인하여  세상은 희망을 갖습니다.  

오늘 성경은 누가  진정으로 높으냐를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듯이 사람만 모이면 줄서기를  합니다. 누군가 첫째로 인정받으려는 것이지요. 예수의 제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이 주님과 함께  가다가 서로 다투었습니다. 이것을 눈치챈 예수께서 그들을 불러 말씀하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 모든 사람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야  나의 존재가 드러나고 사는 즐거움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남보다 많은 것을 가지고 있으면 그것으로 남을 부리고 마음대로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나  권력으로 남을 밑에 둘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것을 위해 인생을 열심히 살아갑니다.  주님은 이것을 잘못사는  것이라고 말하는 겁니다.

그러면 사람에게는 이런 어리석음이 존재할까요. 이것을 야고보서 에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1.        욕심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욕심을 내다가 얻지 못하면 살인을 하고 남을 시기하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싸우고 분쟁을 일으킵니다.”

모든 욕심이 불화와 불행의 근원입니다. 모든 악의 근원은 욕심입니다.  잘먹으려는 ,  잘살려는것, 무언가 잘하려는 것에  욕심이 있으면 안됩니다.  사실 욕심은  열등감의  실체입니다.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가운데 남보다 못하고 스스로 불행했다고 여기는 것을 채우려는 욕망으로 부터  시작됩니다.  

요즘 세상의 지도자들이  욕심때문에 타락하는 것을 많이 봅니다.  많은 경우에  인생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열등감을 벗어나지 못하고 출세함으로  잘못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 그래서   인생에 한이 없어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통해서  한이나 욕심들이 녹아 없어져야 합니다.  돈이나  명예나 권력에  한이 있는 사람은  기회가 되면 욕심을  채우려고 합니다. 풀이를 하려고 욕심을 가지면  불행해 집니다. 

이스라엘이 출애굽 하나님께서 맛나를 먹여주시는데 하루치만 모으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이상을 모으면 그것은 썩어서 못먹게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훈련시키신 것입니다.  욕심을 버리는 것이 하나님과 함께 사는 길입니다. 욕심이 없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부족함없이 이어집니다.      

       

2.       겸손해야 합니다.

주님 앞에서 스스로 낮추십시오, 그러면 주님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

겸손함은 순결한 마음에서  나옵니다.자기를  지나치게  자랑하는 사람치고  정상적인  사람이 없습니다. 정말 대단하고 좋은 사람은 그렇게 드러내지 않습니다. 이미 내안에 만족이 있고 삶의 가치를 충분히 누리기 때문에 남의 평가를 두려워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겸손하게 살아지는 겁니다.

주님께서 어린아이를 안아 주시면서 누구든지 이런  어린아이를 받아들이는 것이 하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라고하셨습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을 가지고 살수 있는 사람은 온전한 복을 누리는 사람입니다. 어리고 작고 약한 것을 보고 무시하는 사람은  순수하지 못한겁니다. 욕심이 가득하면 그런것이 안보이고 교만해져서 자기 욕심만 주장하고 자랑합니다.  이것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소위 훌륭한 사람들을 보면 어린아이 처럼 순수함과 겸손을 가지고 생활합니다. 그리고 단순하고 여린 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 안에 하나님의 마음이 함께 합니다.

프란시스 교종을 보면 어린아이들과 아주 놉니다. 이것이 그의 심성입니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에 무슨 욕심이 있고 교만이  자리 하겠습니까?  

불교계의 거목 성철스님을  생전에 만나려면  3천배를 해야 만나주었답니다.  욕심을 내려놓게하는 그분의 방법이지요.  그런데 어린아이들과는 장난을 치며 가까이 놀았습니다. 어느날은 눈에 멍이들었는데 아니가 때려서 그랬답니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분의 순수한 모습을 봅니다.

 겸손은 그리스도의  본질입니다. 겸손함으로 남을 섬길 있고 사랑할 있고 인정할 있는겁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대하듯이  하십시오. 없다고 무시하거나 약하다고 멸시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들과  함게 하십니다.

 

땅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가득하여  모두가 은혜롭운 삶을 누릴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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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는 생명의 빵 (요한 6:24-35)

 

오늘 말씀은 주님께서 빵으로 5천명을 먹이신 나눔의 기적일 일어난 후에 제자들과 만나서 하신 말씀을 적고 있습니다. 주님과 함께 빵을 나누어 먹은 군중들은 직접 그들이 체험한 놀라운 기적을 사람들에게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기적의 빵을 먹었다.” 소문은 꼬리를 물고 퍼졌습니다.

아마도 이 사건 이후로 예수님에 대한 평가가 더 현실적으로 좋와졌다고 생각됩니다. 사람들은 그가 왕이 되면 우리들의 먹는 문제는 걱정할 필요가 없겠다. 하는 마음들이 들었을 것입니다. 열악한 정치와 수탈의 경제상황에서 백성들의 소망은 예수에게 급속히 집중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경제적, 정치적으로 어려우니 한국이나 미국이다 선거를 앞두고 찾는 지도자는 먹는 문제를 해결해 줄 사람을 찾습니다. 누구든지 경제 문제만 해결하면 누구든지 좋다, 그것이 늘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리고 결국은 후회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역사는 전혀 다르게 일어납니다.   

여러분 신앙체험은 신비한 것입니다. 눈에 보이는 일을 하고 눈에 보이는 것을 먹었는데, 신비롭게도, 그것이 나의 마음을 뜨겁게 하고 나의 영혼을 새롭게 하는 일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빵 하나를 나누어 먹었을 뿐인데 그리스도 안에서 나누면 그것이 기적이 됩니다.  여러분은 이런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다만 잊고 살 뿐입니다.

 그런 것 없이 우리는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고백할 수 없습니다. 

 

오늘 다시 한번 예수 그리스도게서 여러분에게 주신 생명의 빵을 맛보시기를 바랍니다.

 

제가 수도원생활 할 때 일입니다. 형제들은 매주일 모여서 생활을 성찰하는 시간을 갖는데 어느날 결정하기를 매주 수요일 저녁은 빵과 스프만으로 먹고 남은 돈으로 홈리스를 돕자고 했습니다. 그후 매주 수요일은 남은 빵과 스프만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사실 수도원에서는 저녁 한끼만 제대로 먹는 것이었는데 그것을 희생하는 저녁을 먹으며 모두가 행복했습니다. 우리 식탁에는 우리 형제들 8명 정도가 식사를 했지만 기분은 오천명이 함께 하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나의 빵을 나눔으로 오는 행복을 느껴 본 시간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생활에서 이런 행복을 만들어 보시기를 바랍니다.

성서에서 빵이 나오면 우리는 두가지 이야기가 떠오릅니다.

1,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먹었던 만나입니다.

이집트를 탈출한 2백만이라는 사람이 광야에서 하느님이 내려 주시는 만나의 빵을 먹고 살았습니다. 여러분 어른들이 6,25나 고난의 시기에 하는 이야기의 중심은 그때 무엇을 먹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 먹을 것으로 나의 목숨을 이어갔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먹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수 천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조상이 광야 40년동안 오로지 하느님이 내려주신 빵으로 기적적인 삶을 살았던 그 사실을 통하여 오늘도 하느님 신앙을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민족을 먹이신 하느님, 그는 지금도 함께 하신다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믿음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이 어떤 사람들인데 무조건 믿지 않습니다.

아주 지독할 정도로 하느님을 확인해서 믿는 민족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똑 같은 빵을 먹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먹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갔고 어떤 사람들은 광야에서 죽고,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같은 은총을 받아 살았지만 누구는 그것을 통하여 하느님을 보았고 누구는 그저 한끼의 빵으로만 먹고 살았던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 하십니다.”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너희를 먹인 사람은 모세가 아니다.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신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여러분 빵을 먹으며 그것을 주신 하느님의 손길을 보시기 바랍니다.

빵 맛이 다르지 않겠습니까?

그래서 식사기도를 하는 습관이 중요합니다. 이 밥의 주인이 하느님이십니다.

 

여러분 세상을 살아도 마찬가지 입니다. 누구나 같은 환경에서 먹고 삽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돈을 더 많이 벌면서도 짜증을 내면서,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달에 만불은 번다 그러면서 흑인을 짐승이라고 하며 산다.차에는 묵주를 걸어 놓고 다닌다)

한 이디오피아 이민자는 gas ststion에서 일하는데 늘 보면 성서를 수시로 보면서 행복한 미소로 일하는 사람이 있다.

어떤 사람은 먹고 죽을 빵을 먹고 살지만, 다른 사람은 생명의 빵을 먹으며 사는 사람입니다. 누가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사람입니까?

 

   

2, 오병이어의 빵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먹는 문제를 중요히 여기십니다. 우리의 배고픔을 위해서 축복을 하십니다. 광야에서 주님과 함게 빵을 나눈 사람들은 빵만 먹은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를 경험한 것입니다. 주님의 목적은 거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배를 채우려면 기적으로 빵만 만들어 먹이면 됩니다. 출애굽에서 이스라엘이 먹은 광야의 빵은 그런 빵이었습니다. 하늘에서 매일 같이 내리는 빵을 받아 먹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런 기적의 빵이 아니라 서로 나눔으로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어떻게 세워지는지를 직접 체험케 해 주셨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이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묻는 질문에 말씀하십니다.”하느님 나라는 이미 너희 가운데 와있다.”

이 나라를 확인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오천명의 사람들은 그 사실을 눈으로 입으로 확인하고 갔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우리 가운데 있음을 직접 체험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기적이 어떻게 발생하는지 그 원리를 보았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매일 똑같이 밥을 먹고 삽니다. 그런데 그 뜻이 전혀 다를 때가 있습니다.

예를들어 격주로 우리 교회에서 저녁기도를 하고 음식을 나눕니다.

저는 이날 저녁이 매우 특별합니다. 개인적으로 감동이 옵니다. 단순히 모여서 밥을 한끼 먹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가운데 그리스도의 생명을 나누는 특별한 만찬입니다. 호텔에서 먹는 것 보다도, 큰 부풰에 가는 것 보다도 더 훌륭하지 않습니까?

왜냐하면 우리와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특별한 만찬의 전통이 우리 공동체 가운데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이 자리에 우리들의 외롭고 힘든 이웃들이 함께 초대 되어 감동을 나누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하느님 나라를 사는 기쁨을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여러분 이런 주님을 믿으면 살만하지 않겠습니까?

어느 누가 생명의 빵이 되어 주겠습니까? 누가 우리를 걱정, 근심없는 인생으로 인도하겠습니까?

한끼를 먹으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을 내가 고생하여 얻었다는 것 보다, 하느님께서 생명의 양식으로 내게 베풀어 주셨다는 것을 믿고 먹으면, 그 인생의 가치는 더욱 빛날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하느님 나라의 삶을 누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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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 우리의 (루가23:35-43)

오늘은 추수감사 절기 맞이하여  한해의 감사를  찾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오늘은 그리스도의 주일입니다. 다음 주일 부터는  대림절로 들어가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의 평화의 왕으로  오시는 성탄절을 기다리는 준비를 시작하는 때입니다.  여러분은 어떤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고 사십니까?  맞이하는 예수님은 나에게  무슨 기대를 채워주실 것인가? 지금 시대만큼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가 필요한 때가 있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됩니다.  

 인생의 성패를 좌우하는 것이 무엇일까요?  선택입니다. {순간의 선택은 십년을 좌우합니다. 우리의 선택은 일생을 좌우합니다.}  우리가 무엇을 선택하느냐에 따라서 운명이 바뀔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선택을 하며 사셨습니까? 그리고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어떤 선택을 했으면 그것을 위해서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어떤 분이 내쉬빌에서 비즈니스를 하는데 결정이 어려운거예요. 불안하게  결정을 놓고 저에게 묻습니다. 어떻게 할까요? 사실 모든 것이 불활실한 어려운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돌아보지 말고 최선을 다하라고 했어요.)   우리는  예수를 나의 구세주로 영접하였습니다.주님이 나의  영적 인도자이십니다.  예수께서는  나의 왕이십니다. 예수의 말씀이  나에게  가장 소중합니다.   분의 말씀이 나의 삶을  인도합니다. 그렇게 결정하셨으면 최선을 다하십시오.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 여호와를 사랑하라이것보다 중요한 일이 우리 그리스도인 가운데는 없습니다. 아니 없어야 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인생의 삶이 그리스도 주님을 중심으로 계획되고 움직여져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왕이십니다.  저는 여러분이 부분에  대한 확실한 믿음이 있기를  원합니다.  여러분이 선택한  믿음에 대해서  절대로  흔들리지 말고 확신으로 살기를 바랍니다. 근본적인 선택이 흔들리면 인생이 불안해지고 문제가 발생합니다. 왜냐하면 주의 도우심을 얻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도우심이 없는 인생은 불안합니다. 나아가서 불행합니다. 그리서 인간은 하느님의 도우심이 없이 살수 없는 존재인 것입니다. 

하느님을 잃어버린 사람은 은혜를  알지를 못합니다. 가운데 감사가 없어요. 불평합니다. 있어도 불평 없어도 불평, 이것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작은 것에도 감사할 있는 마음은 내가 먹는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은혜로 하는 것입니다. 고난고 어려움을 이기고 감사하게 사는 것은 나의 의지가 아닙니다. 나를 도우시는 하느님이 함께 하셔서 가능한 일입니다.    나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존재를 대면하는 일은  소중한 일입니다.   예배를 통해서 주님을 만나고 소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유럽은 기독교국가가 아닙니다. 예를들어 과거의 기독교의 부흥국가들이  비참한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예배드리는 사람이 인구의  3% 넘지못합니다. 세속적인 것들에 빠져서 영적인 혼돈을 겪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음으로 오는 혼돈의 상태를 암흑시대라고 합니다.    400년을  하느님을 잃고 살아온 유대인들이 광야에 나타난 세례요한의 회개의 음성을 듣고  마음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밑바닥에서 절망과 고통을 뼈저리게 살던 백성들이 영적으로 , 삶에서 회개하기 시작한 겁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구하는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이 들리기 시작한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고 그의 말씀이 복음이 된것입니다. 주님이 살아있던 그때까지도 그들은 인정하지 않았는데, 십자가 부활을 통하여  그리스도가 왕으로 오신것을 깨닫게 것입니다.  분이 세상의 왕이셨구나. 그후 복음이 세상에  들불처럼 퍼져나가게 된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의 역사입니다.  

주님을 왕으로  삼아 사는 사람에게는 두가지를 실천하며 살아야 합니다.

1, 감사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는 감사입니다. 골로사이서 1:12에서도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먼저 이야기 합니다.” 내가 인생의 주인이 되어 살면 불만이 많아집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나의 주인이 되시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의 구세주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이 감사함으로 채워집니다. 왜냐하면 살아보니 지금 내가 사는 것이 모두가 하느님의 은혜와 축복이 아니면 설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이가 들면 들수록 그것을 많이 알게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아브라함은 75세라는 늙은 나이에도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하느님의 뜻에 순종을 하는겁니다. 지금까지 살아보니 모든 것이 하느님의 은혜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결론이 나는 겁니다. 이것이 빨리 깨달아 질수록 행복한 인생을 살게 되는 겁니다. 저는 여러분이 사실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2, 용서입니다.

주님의 가장 파워는 용서와 사랑입니다. 우리는 은혜 때문에 주님을 나의 왕으로 삼는겁니다. 그분이 나를 질책하고 심판하고, 판단한다면 힘들어서 그분과 함께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왕은 우리를 어떤 상황과 형편에서도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나를 죽이고 조롱하는 자들을 향해서 주남은 저들은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를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하느님께 간구하십니다. 그리스도의 왕권은 용서와 화해를 위한 권한입니다. 우리가 용서하고 화해할 있는 것도 그리스도의 왕권에 참여하는 일입니다.

여러분 감사를 품고 사십시오, 용서와 사랑과 평화의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주인으로 삼아 살아가는 우리들의  모습이어야 합니다. 이런 삶을 사는 자들이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구원의 자녀로 복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이것이 하느님 나라를 세우고 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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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을 이루어라 (빌립보2:10-18)

 

“처음 처럼”이라는 말이 있다. 처음같은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리들이 처음 주님과 만남, 처음 가졌던 순수함, 처음 경험한 감동 등 모든 좋은 것을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좋은 크리스챤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서 은혜공동체를 이루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오늘은 구원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는 말씀은 너무나도 유명합니다. 기독교에 있어서 구원은  최상의 가치이며 존재이유입니다. 이 구원을 얻기 위해서 우리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온 몸을 다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세상의 모든 종교에서는 우리가 말하는 구원이라는 말이 없습니다. 다른 종교에서는 구원을 말하지 않는데도, 많은 사람들이 세상에서 누리는 제한적인 복을 받기 위해서 정성을 다 합니다. (불교인의 정성과 봉헌은 기독교인이 못 따른다. 힌두교인들의 열정 가정마다 제단을 만들어 기도한다, 이슬람교인들의 생명을 바치는 순교 )

기독교인에게 구원에 대한 생각들이 제각기 많이 다릅니다. 한번 예수의 이름으로 구원받았으니 다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에서 사도 바울은 구원에 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위해서 힘쓰십시오.생명의 말씀을 지키라라고 합니다.

우리가 주님을 통해,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 받은 구원의 선물을 간직하고 완성 하는데 우리의 노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으면서도 한번의 체험과 은혜를 가지고 평생 거저먹으려고 합니다. 그래서 나는 구원받은 사람이라는 안일함에 빠져서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오만을 부립니다. 그러나 이것은 구원받은 모습이 아닙니다.

오늘날 교회가 너무나 쉽게 구원을 선언해 줍니다. 이것을 값싼 은혜라고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교회나 사람이 인정해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권한입니다. 그 권한을 교회가 지나치게 사용해서는 안됩니다.

그러면 어떻게 구원을 이루어 가야 하는 것입니까?

1, 하나님 앞에 겸손히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10)

세상은 창조주 하느님 앞에 겸손해야 한다. 구원받은 자는 먼저 하나님께 무릎을 꿇게 되어 있습니다. 나의 생명을 살려주셨습니다. 나의 비천함을 이기고 새로운 존귀함으로 나를 높여 주셔서 하느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허락해 주셨습니다. 그 주님의 사랑 앞에 무릎 꿇는 것입니다. 한 순간이 아니요, 그 분을 만나는 그날까지 무릎을 꿇고 살아가는 것입니다.그래서 구원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은 겸손할 수 밖에 없습니다.  

 탕자의 아들에서 보면 처음에는 기고만장하여 아버지에게 유산을 달라고 떼를 쓰고 나가더니 다 망하고 빈 손으로 돌아 왔는데 그 아들을 한 순간도 잊지 않고 기다리다가 당신의 아들로 다시 받아 주시고, 사랑으로 안아주신 분이 하느님입니다.

 돌아 온 아들은 일생을 어떻게 살겠습니까?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는다는 것은 구원을 주신 주님께 순종하는 삶입니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구원을 이루어나가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항상 주님을 감동하는 마음으로 대 하십시오.

 

2, 하나님 앞에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입니다.(13)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사람이지만 우리들은 여전히 세상 사람들이 하는 걱정과 근심을 안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육신이 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 사람에게  희망이 없는 것은 하나님이 없고 구원의 소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도 분명 세상에서 사는 고된 생활이 있지만 다른 한가지 하나님과 그의 구원이 약속되어 있기에 우리에게는 결코 사라지지 않는 소망이라는 것이 항상 같이 합니다.

 고난을 당하면서도 그 안에 소망이 있습니다. 죽음을 앞에 놓고도 하나님 나라의 소망을 가지고 사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테반을 보십시오. 그는 돌에 맞아서 죽어가는 가운데에도 미소를 짓고, 자신에게 돌을 던지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하늘 문이 열리고 주님과 천사들을 바라보고 죽어가지 않았습니까? 불가능한 일입니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의 삶이요, 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소망의 모습입니다. 인간 역사 가운데 누가 이러한 위대한 희망의 죽음을 맞이하였습니까? (홍콩에서 황금부자가 갑자기 53세에 죽었다)

이후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 가운데서 희망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그리고 구원받은 자들은 이 소망으로 구원을 간직하며 살았습니다. 다른 것을 다 잃어도 심지어 목숨을 잃어도 구원의 소망이 있으면 죽어도 살리라.  

 

3, 기쁨으로 사는 것이 구원을 이루는 것입니다.(18)

여러분 그리스도인의 생활을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감사하라. 어떤 처지에도 감사하라.” 이것은 구원으로 인하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습니까? 어떤 처지에서 늘 감사할 수 있습니까?  구원 받은 자는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성령을 통해서 주어질 뿐 아니라 그렇게 함으로써 구원을 간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구원받은 자는 항상 그래야 합니다. 정성으로 노력해야 합니다. 내가 받은 구원의 은혜는 내가 온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서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냥 성령에게 맡기고 정신 줄을 놓고 있으면 안됩니다.

정신을 차려, 깨어서 기도하고, 성령의 이끄심에 예민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그래야 변함이 없습니다.(믿음 생활에 변화가 많고 변덕이 있는 사람은 구원은 받았을지 모르지만 그 구원은 간직하지는 못한 사람입니다. 따라서 구원을 잃어버린 것이지요. 이런 그리스도인이 너무나 많습니다. )

 

여러분 사도바울은 자신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간직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나는 매일 죽노라” “나의 마음은 원이로되 몸이 말을 듣지 않는구나” “나는 나의 갈 길을 열심히 달려왔습니다.”라는 등의 말로서 자신이 얼마나 구원의 믿음을 간직하기 위해서 노력하고 희생하고 애를 썼는지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고백이 우리에게도 절절히 있어야 합니다. 내가 구원받은 그 은혜와 축복을 간직하기 위하여 “나는 이렇게 하였다” 라고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모습들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간증입니다. 간증하라고 하면 다들 복 받은 자랑만 하는데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은혜로 받은 구원을 간직하기 위한 투쟁의 삶을 말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려면 수 많은 사탄의 유혹과 대적해야 합니다. 때로는 가까운 사람이 원수가 되어 달려듭니다. 심지어 같은 교회 안에서도, 하느님을 섬긴다는 사람이 사단같이 달려듭니다. 세상의 타락된 풍조들은 우리의 영적 순결을 위협합니다.

순간순간 주의 도우심으로 싸워서 이겨내지 않으면 우리는 구원을 지켜내기 어려운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깨어서 기도하고, 나의 영혼이 한 순간이라도 하나님의 손길을 벗어나지 않도록 정신을 차려야 합니다. 세례를 받을 때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악을 정욕을 버리고 죄로부터 돌아서겠습니까? 그러면 내가 주의 도우심으로 그리하겠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수 없는 자신을 고백하고 주님앞에 온전히 내어놓는 내가 될 때 비로서 구원의 능력으로 하루하루를 살면서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 우리 교회를 채워나갑시다. 믿음의 사람, 구원받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이 자리를 채워서 정말 하나님의 영이 살아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믿음 공동체의 교회를 이 땅에 세워 나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이것이 바로 바르게 구원을 증거하고 선포하는 참된 구원자들이 하여야 할 사명인줄 믿고 그 일에 우리 모두가 부름 받은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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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소리를 들어라(마태오3:1-12)

주님께서 여러분을 무엇하라고 부르셨다고 생각하세요? 빛이되어라

옛날 전기불이 없이 촛불이나 호롱불을 밝히면  어둠속의 공포가 한순간에 사라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작은 불꽃이지만 그것이 가진 효과는 대단했습니다. 마치 환상을 사는 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우리 세상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작은 촛불같은 사람이 세상을 밝힐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빛으로 부름받은 사람입니다. 어두운 세상에 하느님게서는 의인을 통해서 세상을 밝히는 빛으로 보내셨습니다.   가운데 사람이 요한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암흑기에 나타난 마지막 구약예언자라고도 합니다. 그는 예수보다 6개월정도 빠른 나이니까 예수님과 같은 또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의 아들로 제법 유복하고 교육을 받은 사람입니다. 그런 그가 모든 것을 버리고 광야로 나갑니다.  촛불처럼 암울한 이스라엘 역사에 등장합니다. 그리고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라고 세상을 향해 선포합니다. 여러분 새로운 세상을 만들려면 가장먼저 해야할 것은 뒤집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느님게서  사용하신 방법입니다. 하느님께는 적당한 타협이 없습니다.  노아의 홍수처럼 모든 것을 뒤집어서 새로운 창조를 하시는겁니다.  이것은 혁명입니다. 그래서 본래 그리스도인들은 혁명적인 사고를 가진 불순한 사람으로 위정자들의 위험대상이었습니다. “ 저들은 세상을 바꾸어 하느님나라를 세우려고 하느냐?” 하는 겁니다. 결국 요한은 헤로데왕의 불의에 대항하다가 죽음을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세상을 바꾸려면 먼저 자신을 혁명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내가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 세상은 바뀌지 않습니다. 나는 그자리에서 똑같은 삶을 살면서 말로만 세상이 깨끗해져야해, 바뀌어야해 라고 하는 말은 능력이 없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자신을 먼저 회개함으로 혁명적인 삶을 고백하였습니다.  자기가 가졌던 부유함을 던져버렸습니다. 집을 떠나 광야의 척박한 삶으로 스스로를 몰았습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말씀대로 단순한 삶을 살았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모세가 그랬고 모든 예언자들은 이렇게 자신의 삶을 바꾸었습니다. 이것이 회개의 모습입니다.   들에서 나는 것들을 먹고 입으며 생활했습니다. 지금으로 말하면 친환경적인 생활로 바뀐 것이지요. 세속적인 편안함을  떠나서 창조적인 생활을 한것이지요. 여기에서 하느님의 능력이 나옵니다.

이것을 보고 유대땅에서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사람은 누구나 변화를 원해요. 다만 그것을 용기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표본이 되어 용기를 가지고 나오면, 나도 할수 있습니다.

 요한이 하였으니 나도 할수 있어요. 예수께서 하셨으니 나도 있어요. 프란시스성인이 하셨으니 나도 있어요.  요한은 하느님나라를 기다리는 자들에게 두가지를 약속받습니다.

1, 고백하고 세례를 받으라

여러분은 자신을 진실하게 고백한 경험이 있어요? 마치 목욕탕에서 처럼 자신을 빨가벗고 드러낸 경험이 있습니까? 솔직하게 나의 잘못과 허물을 말해본 적이 있습니까? 이것이 없이 나의 변화를 기대할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이 없이 하느님나라를 맞이할 없습니다. 잘난것은 압니다. 못나고 상처난것이 드러나서 변화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새것으로 거듭날수 있는거예요. 고백의 과정을 가시기 바랍니다. 그래야 예수가 안에 들어 옵니다. 그리고 나서 하느님의 자녀로 살겠다는 약속의 세례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이것이 자기 혁명의 시작입니다. 완성이 아닙니다. 이렇게  출발하는 겁니다.

어떻게해야 고백을  잘할수 있을까요? 예수 성심이 있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님의 마음으로 가득채워져야 합니다.   하느님앞에서 어린아이가 되면 고백을 있습니다. 마치 어머니에게 나를 보여주듯이 되는겁니다.  하느님게서 이런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린아이 같이 되라고 말씀하시는겁니다. 나의 나약함과  허물이 있음을 부끄러워 마십시오. 그리고 고백하십시오. 그래야 하느님 나라를 누릴 있습니다.

2, 변화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너희는 회개했다는 증거를 행실로서 보여라요한은 적극적으로 회개의 삶을 강조합니다. 요한이 그렇게 사람이기에 감히 말합니다. 이렇게 살아보니 이것이 정말 좋고 귀하다는 사실을 깨달아 사람들에게 강하게 증거하는 것입니다.  어떤 분을 만나서 복음을 전하며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분이 고백합니다. 알지만 지금의 삶을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주변에는 모두가 그렇게 말은 하지만 실천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래서 포기하고 그냥삽니다. 여러분 진정한  깨달음을 가지면 그의 생활이 달라집니다. 그러나 어설프게 알면 아무것도 안합니다. 그냥 머리로만 알고 말아버리지요. 이것은 나의 삶에 전혀 영향을 끼치지 않습니다. 양다리를 걸치면 안됩니다. 세속을 살것인지, 하느님 나라를 살것인지 분명한 선택이 있어야 합니다. (미국을 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 한국에 가려고 합니다. 그래서 사회에 올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낭비입니다. 시간을 죽이는 일입니다. 반드시 확실한 선택을 해야 합니다.)

여러분 바울로는 우리들에게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라고 하셨습니다. 이말은 내가 하느님처럼 은혜를 산다는 말입니다. 하느님의 거룩함으로 세상을 지배하고 산다는 말입니다. 하느님나라를 산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지금 그날을 기다립니다. 오로지 하느님만을 바라보고 그분의 것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기를 기다립니다. 그러니 준비해야 합니다. 자신을 온전히 하느님 앞에 고백하십시오. 그리고 내가 주님 안에서 깨달은 말씀대로 행동하십시오. 세속과 하느님나라에 양다리를 걸치지 말고 오로지 하느님께 올인하십시오. 그것만이 하느님의 축복을 누리는 온전한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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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치는 자의 역할(1:6-8,19-28)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하느님에게서 낳다.”

요한은 어머니 엘리사벳에게서 나았지만 그의 인생은 하느님의 빛으로 살았습니다.우리는 빛을 보고 하느님을 인식하고 있는 것입니다.하느님의 사람은 빛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초기 수도원의 창시자인 안토니오는 251 이집트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부유하게 태어났지만 34세가 되어 주일 설교를 듣던 가진 것을 버리고 나를 따르라는성경말씀을 듣고 자리에서 성령의 감동을 받게됩니다.그리고 말씀을 그대로 따르기로 결심하고, 자신의 유산을 이웃들에게 나누어 주고, 신앙생활을 하다가, 스스로 사막으로 가서  그곳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찾으며 살았습니다. 그의 명성이 알려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만나려고 사막으로 찾아갔다고 합니다. 그는 광야생활을 하면서 하느님의 말씀을 깨달게 되면 그것을 사람들에게 알려주었습니다.그는 세례요한과 같은 삶을 그대로 살았습니다. 광야에서 복음을 외치고 복음의 빛을 증거하는데 나머지 생을 다하였습니다.

주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들은 변화된 생활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변화된 생활은 사람들에게 주님의 빛을 보여줍니다.이것은 당시에도 사람들에게는 신비하게 보여졌습니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하느님의 신비의 빛을 받아 사는 것이라고 있습니다. 우리의 가운데는 기적이 있고 놀라운 일들이 순간 순간 일어납니다. 그러나 신자들 가운데는 두려움을 가지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혹시 나도 주님의 부름을 받아서 저렇게 되지나 않을까? 그러면 나의 인생은 매우 힘들것이다 라는 상상으로 미리부터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혹시 자기가 하느님의 선택을 받으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으로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나 그릇의 모양이 다르고 쓰임새가 다르듯이 주님의 부르심이 있다고해서 모두가 세례요한이나 안토니오 성인같이 사는 것은 것은 아닙니다. 이들은 특별한 부름을 받은 사람들이고, 대부분은 일상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부름을 받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크기에 상관없이 하느님의 사람으로 세상에 빛을 드러내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많은 수도자들이 그와 같은 생활을 지금도 배우고 살고 있습니다. 이런 적극적인  모습들은 세레자 요한으로 부터 시작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품으면 이렇게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을 갖습니다. 좀더 세상적으로 고상하게 살면서 하느님을 따를 수는 없을까? 하느님게서 우리들을 부르셔서 살게 하신것에는 차별이 없습니다.그러나 사명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모두가 예언자가 될수 없고 모두가 수도자 같은 삶을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서로 다른 것은 아니고 서로에게 연관이 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우리가 각자에게 주어진 사명을 충성되게 사는 것이 요한이 말하는 빛을 드러내는 일이라는 겁니다. 우리는 누구도 빛이 수는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어두움이 함께 있기에 온전한 하느님의 빛을 드러낼 능력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빛이라고 빛을 우리가 보고 살아야 한다고 증언하는 일은 있습니다. 정도를 하기 위해서도 왠만큼의 영적인 힘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여러분을 만큼의 일을 하도록 부르시는 것입니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의 교회가 2차대전때 폭격을 맞고 크게 훼손 되었다. 그런데 다행히도 예수상은 손만 떨어져 나간채 보존되었다. 교회 신자들은 조각상을 발견한 것을 계기로 이전보다 아름다운 교회를 세웠다. 어느날 조각가가 손이 떨어져 나간 예수상을 보수하자고 건의 하였는데 교인들이 반대하였다. “우리는 없어진 손을 다시 만들지 않겠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바로 손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교회는 예수의 손이 되고 발이 되어야 합니다.그것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일입니다.   

요한은 자신에게 비쳐지는 스포트 라이트를 거부합니다. 세상사람들이 묻습니다.당신은 그리스도입니까? 당신은 예언자 입니까? 아니면 당신은 누구입니까? 이에 요한은 자신을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주님의 길을 예비하는 자라고 했습니다.여러분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 라고 했을때 , 자기를 설명할 있을까요? 이것이 영적인 능력입니다. 영적인 능력은 다른 사람을 치유하고, 가르치고, 변화시키고, 따르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적인 참된 능력은 자기의 존재 가치를 분명하게 고백할 있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자기가 살면서 행해야 일을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빛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사야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을 자기의 소명을 깨달았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상한 마음을 싸매어 주고, 포로에게 자유를 선포하고,슬퍼하는 사람들을 위로하게 하셨다.” 일을 통해서 하느님의 공의를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 자기의 사명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성인 프란시스는 기도합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주소서자기가 하느님의 평화로 부름받은 사실을 깨달은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은 자들의 모습인 것입니다. 

 대림절기는 하느님의 부르심을 묵상하는 시기입니다. 그리고 묵상을 통해서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있어야 합니다. 주님께서 오시는 땅에서 나는 주님의 사람으로 그와 더불어 무엇을 하며 살아갈 것인가? 일의 크기는 상관이 없습니다. 비록 작은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빛을 증언할 있는 것이라면 그것이 가치있는 일입니다.

저는 우리들 모두가 이것을 발견하여 우리 공동체가 함께 이루어 가기를 바랍니다.

빛은 존재합니다. 그러나 빛을 활용해서 사람들은 많은 변화의 일들을 만들어 있습니다.그리스도는 빛으로 살아계십니다.우리는 그기스도를 통해서 무언가를 변화되도록 부름받은 주님의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알아서 살아갈때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 기대하십시오, 2015년에는 무슨 변화가 일어날지를 기대하십시오. 변화는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게서 이루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이것을 신비라고 할지 모르지만 하느님게서 이루시는 일은 놀라운 일상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신비에 여러분의 일상을 맡기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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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1:1-8  벧후 3:8-13

 

여러분은 하느님을 만난 느낌을 가지고 있나요? 있었다면 구체적으로 어떤 경험이었는가? 하느님을 만난 사람, 하느님을 만나며 사는 사람은 인생이 행복하다.하느님은 모든 것의 근본이시기 때문에 인생의 답이 그분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을 만난 사람은 곧 나를 아는 것이요. 나를 안다는 것은 인생의 고뇌로 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의 존재와 나 자신의 존재는 일치한다. 따라서 인생의 방황이나 의심이나 걱정이 사라지게 된다. 곧 번뇌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상황과 상관없이 행복할 수 밖에 없다. . 

     

사람들은 모든 삶의 목적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행복이라고 말합니다. (사는 목적은 행복이다. 돈버는 것 자식 키우는 것, 활동하는 것, 공부하는 것, 신앙생활하는 것.하느님이 존재하는 것, 예수가 오신것) 그런데 행복한가요?

왜 안 그럴까요 이유는 행복의 중심에 온전하지 못한 내가 중심이 되기 때문입니다. 신앙생활을 해도 내 중심으로 하니까, 은혜를 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행복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으면 모든 것이 행복하지 않다. 우리들이 지금 죽을 만큼 힘들고 어렵고 하다면 지금 내 안에 하느님이 함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누구나 행복을 찾아서 몸부림치는데 결국은 하느님을 만나 살지 않는 한 그 무엇으로 채운다해도 그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세례요한이 하느님을 만나며 사는 생활을 보여주고 있다요한은 제사장 즈가리아의 아들입니다. 그 시대에는 신분도 있고 잘사는 사람이었다. 요한은 그런 가정에서 어려서 부터 종교적인 교육을 충분히 받고 자랐다. 그런데 그는 자기의 편안한 길을 버리고, 스스로 광야를 찾아갑니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불행하고, 고통받는 생활이다. 그는 왜 광야생활을 선택했을까?

 여러분 기독교 역사를 보면 구약에서 부터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공통된 행동들이 있는데, 홀로 광야로 나가는 것이다. ? 우리들 생활은 복잡하고, 하느님을 생각할 겨를이 없다, 잊고산다. 이것으로부터 떠나지 않으면 하느님을 느끼기가 어렵다. 하느님 음성을 못듣는다.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은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피정, 묵상, 안식일, 기도 등의 행위는 바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구체적인 일이다.) 따라서 광야에 나가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다르게 말하면 하느님은 선택한 자들은 광야로 부르셔서 당신을 드러내셔서 말씀하시고 듣게 하는 것이다. 모세가 광야애서 하느님을 만난다. 사울도 다메섹 길 즉 광야에서 주님을 만나고 그의 음성을 듣게 된다.  

광야는 어떤 곳인가? 시나이반도의 광야를 보면 허허벌판이다. 아무것도 없다. 오직 하느님만 의지해야 한다.

 

여러분 여기는 광야입니다. 고향을 떠난 삶은 광야이다. 그런데 사람이 많다보니 하느님을 의지 하기 보다는 사람들 끼리 의지하고 믿다가 어려움을 당한다. 이렇게 하면 광야생활은 실패한다. 하느님게서 광야로 부르신 것은 특별한 은총이다. 당신을 만나도록 , 듣도록 특별히 선택하신 것이다. ? 하느님을 정확하게 알도록 하시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허울을 다 벗게 만드는 곳이다.그러니 스스로는 부끄럽지만, 본질의 모습을 알게 된다.알고 보니 자신이 그리 대단치 않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 머리숙여 겸손히 바라며 살게 되는 것이다. 광야에는 아무것도 없지만 하느님은 존재하십니다

 

광야는 세가지의 행복을 준다.

1, 회개

요한이 가장 먼저 광야에서 선포한 것은 회개인데 그가 먼저 광야에서 자신을 하느님께 벗어드린것이다. 그는 화려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세상의 것을 허울을 다 벗어버린 자의 모습은 부끄러울 수 밖에 없다. 별것도 아닌 사람이 광야에서는 다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회개이다. 여러분 죄를 볼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줄 아십니까? 죄가 보인다면 그는 거룩한 인생을 살수 있고 그것으로 인생의 고민을 안해도 됩니다. 회개는 죄가 보이는 것을 말합니다. 죄가 보여야 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때가 보여야 딲습니다.    

 

2, 세례

세례는 축복이다. 세례는 하느님께 나를 등록하여 보여드리는 것이다. 광야에서 나와 하느님이 함께 만나는 자리가 곧 세례의 자리인것이다. 그래서 광야는 축복의 장소이다. 그래서 은자들이 광야에서 나오지 않고 일생을 살았다. 사해공동체는 매일 하루에 두번 세례를 재현했다. 성당입구에는 대부분 성수가 있는데 사람들은 들어오고 나갈때 성수를 적시며 세례의 은총을 기억한다세례는 거듭남의 증거이다.   

3, 꿈을 꾼다.

광야에서 그들은 하느님나라를 경험하며, 그 나라를 기다리게 된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선포를 하게 되는 것이고 많은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 왔다.광야를 지나면 가나안이 있다. 출애굽의 여정은 고난의 길이 아니라 꿈을 꾸는 과정이었다.      

고도원의 아침 편지의 글이다.

생각이 깊어지면 꿈을 꿉니다. 몰입하면 꿈을 꿉니다. 꿈을 꾸면 언젠가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꿈이 이루어졌을 때 나와 너 그리고 우리 모두가 행복해야 꿈다운 꿈입니다.

여러분의 꿈을 꾸어서 모두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하느님의 일입니다

 

하느님은 누구인가를 베드로 후서에 기록하고 있다.

 

하느님은 한분이시고, 진리이다. 따라서 절대로 변함이 없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느님을 자기 멋대로 해석하고 만들어 버린다. 자기의 욕망을 채워주는 도깨비 방망이 같이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심지어 허황된 오해를 만들어 버린다. 이것이 세상에서 만들어진 허황된 하느님이다. 광야의 경험이 없는 자들은 이렇듯 하느님을 가지고 우상놀이를 한다.   

선지자는 말합니다. “이 백성이 하느님을 모르는도다.” 그들이 어리석은 우상에 빠져 있을 때 듣는 말이다.  

   

이렇게 하느님을 알고 만나고 나면 정확한 디렉션을 받아 인생을 살기에 행복한 것이다. 행복하지 않은 이유는 분명하다. 모르기 때문이다. 현재의 삶의 의미와 지금 가는 길의 방향, 내가 지금 왜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그리고 세상의 변화되는 감을 가지고 살면 불행할 이유가 하나도 없지 않은가. 인생의 답이 없고 불안하니까. 행복이 멀어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만나 살기를 간구해야 한다.

 

시대에 따라서 신학이 세워졌다. 민중신학, 복음신학, 성령신학 등 그런데 미국 이민사회 가운데 나온 신학이 광야신학이다.이민자들의 Identity를 신학자들이 성서에서 찾아보니 그 중심에 하느님의 의지가 있음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의 인구가 200만이 넘었다고 본다. 2011미국에 한인들이 방문자를 합해서 대략 2157천 이라니 거의 비슷하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떠나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광야로 나와 가나안 이라는 복된 땅을 목표로 가는 것이다. 이들의 출발은 이집트 탈출이었다. 2백만이 함께 떠났지만, 모세 만이 하느님의 음성을 듣고 나섰을 뿐 대부분은 그저 현실이 괴롭고 힘들고, 이집트 정세가 싫고,등등 여러가지 이유로 그냥 탈출해서 떠난 것이다. 어찌 시작되었든지 간에 모세와 한배를 타고 하느님의 손에 이끌려 항해를 시작한 것이다.

이들은 40년을 광야에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온갖 고생 가운데 하루 하루를 산다. 그 가운데 일부는 왜 떠나왔는냐며 불평하고, 일부는 다시 돌아가고, 일부는 타락하고, 그러다 죽었다. 그러나 끝까지 하느님을 의지하고 확신을 가진 자들은 가나안이라는 축복의 삶을 누리게 된다. 여러분 우리의 이민생활과  너무나 비슷하지 않은가?

이 광야에서 하느님을 따르는 것과 아닌 것의 결과는 이미 성경에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이것을 깨달아 사는 것이 지혜요 은총이다. 그러므로 광야는 사람을 변화시키는 장소이다. 하느님게서 이스라엘을 4개월이면 충분히 갈수 있는 가나안 길을 40년간 이끌고 다닌 이유는 과거의 그들의 종살이 하던 성품을 변화 시키기 위한 과정이었다. 그것이 변하지 않고는 가나안에 들어간들 이집트에서 살던 종의 성품이 그대로 있다면 이집트에 사나 가나안에 사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그런데 아직도 이 광야에서 살면서도 과거의 삶을 고집하고, 집착하고, 살아가는 것 자체가 참으로 불행한 일이다.그렇게 살면 광야에서는 죽게 된다. 하느님은 우리를 살리시려고 부르셨고, 가나안의 행복을 약속하셨고, 무언가 미래의 역사적인 소명으로 부르신 것이다.

이것을 알면 광야생활은 즐겁고 복된 것이다

 

여러분 우리들은 지금 광야에서 사는 겁니다. 이것에는 분명한 이유가 있고 하느님의 섭리가 있습니다. 이것을 깨달아 답을 얻고 사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하느님께서 밤에는 불기둥으로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나의 길을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내가 광야에서 살아날 방법이나 요령은 없습니다하느님의 진리에 전적으로 맡겨질 때 비로서 우리는 자유함을 얻어 살며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그 자유를 충만하게 누리시기를 바라고

하느님게 진지하게 나의 문제를 물으십시오. 그러면 주님은 반드시 답을 주십니다. 이곳이 광야이기 때문에 하느님의 응답을 듣는 기적같은 장소입니다.

우리는 모두 광야에 부름받은 은총의 사람들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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