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성일 (all saint,s day)

제성일은 본래 동방교회에서 시작된 일입니다. 이후 7세기부터 서방교회에서 제상일을 지키게 됩니다. 제성일은 모든 성인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그러나 특별히 성인의 날을 가지키 않은 성인들에 대한 기념을 하는 날입니다. 

성인이란 누구인가?

성인(聖人)이란 어떤 사람들일까요?

우리는 보통 성인이라고 말하면, 도무지 결점을 찾을 수 없고, 성직자나 수도자가 되어 교회 안에서 평생을 살며, 금욕적인 삶을 통하여 열심히 고통 받을 기회를 찾아다니는 사람을 떠올리게 됩니다. 피눈물을 흘리며 하느님께 매달리고, 황홀경을 경험하고, 손발에 오상(五傷)이 나타나며, 기적을 일으켰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몇 시간이고 며칠이고 기도하며, 세상과 사람들을 떠나 고독 속에서 하느님만 생각하는 사람일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우리가 그동안 읽었던 성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이 그러했고, 교회는 다른 성인을 애써 가르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일찍 성인이 되기를 포기합니다.

교인들은 이런 이유로 크리스챤이 되는 것도 일찍이 포기하기도 합니다. 나같은 사람이 어떻게 예수를 닮을 수 있어? 예수의 가르침은 관심이 없습니다. 예수가 말하는 축복에만 매달려 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거룩한 공간을 찾아 다닙니다. 성인은 공간에 예속되어 있는 존재가 아닙니다. 거룩한 공간에 있어야 사람이 거룩해지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사람이 그 공간을 축성(祝聖)합니다. 예수님은 회당에서 쫓겨나셨고, 성전을 뒤엎었으며, 유다의 사제들은 예수님을 십자가로 내몰았습니다. 그래서 성자들은 사막으로 나갔고, 그 사막에서 나타난 분이 세례자 요한이었지만, 오히려 예수님은 세상 한가운데로 들어오신 분입니다.

일상의 거룩함

 

 

 

고통으로 따지자면, 수도원은 오히려 안전지대인지도 모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뜻 모를 고난이 닥쳐오기 십상입니다. 오만 잡다한 사람들을 만나야 하고, 악취를 견뎌야 하고, 생계를 돌보기 위해 전쟁터 같은 거리로 나가야 합니다. 한 아이의 아빠가 되고 엄마가 되는 순간, 세상의 무게는 더욱 무거워집니다. 내 한 몸도 버거운데, 자녀가 생기면 내 사랑이 그 아이들의 운명을 감당하려고 애를 쓰게 됩니다. 우리는 사랑을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너무 힘겨워서 사랑하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그래도 그 어떤 사랑이 나를 휘어잡으면 우리는 벗어날 수 없는 연민으로 세상의 고통을 기꺼이 지고 가게 됩니다. 내 아이의 입을 위하여 내 몫의 빵을 떼어 놓을 때 우리는 금욕주의를 실천하고 있는 셈입니다. 삶의 고단한 현장에서 복음을 선포하고, 그 복음 때문에 박해 받는 것이 수행이 됩니다. 세상의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 헌신하고, 집 앞에 서 있는 걸인에게 밥 한 그릇을 나누어 줄 때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행복합니다.

참다운 성인은 세상에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평범한 농부이며 주부이며 의사이며 학자이며 노동자입니다. 그는 노숙자이며 교사이며 때로 버림받은 이의 모습입니다. 성인은 꼭 수도복이나 수단을 입어야 하는 게 아닙니다. 헐렁한 점퍼 차림과 낡은 구두 아래 숨어 있는 성인들이 있기 마련입니다. 그는 일상에서 만나는 사람들에게 환한 웃음을 선사하는 사람들이며, 주변을 따뜻하게 데우는 사람들입니다. 다시말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품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이 성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성인이란 “그들의 고행과 환시와 행적 때문이 아니라 사랑과 선함에 대한 탁월한 역량” 때문에 성인이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그를 길에서 만날 때마다 우리 자신이 하느님의 은총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를 만날 때마다 큰 기쁨이 솟고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됩니다. 그리고 생전에 이런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라 생각합니다. “주님, 저런 분과 한 하늘 아래 살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말입니다

 1, 가난한 이의 얼굴에서 하느님을 보는 것이 성인입니다.

토마스 머튼은 “행복이란 정확하게 ‘한 가지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에 있다. 우리의 삶 속에서 그것을 찾아내면 나머지 모든 것을 기꺼이 포기할 것이다. 그때에는 거룩한 역설에 따라 한 가지 필요한 것과 함께 다른 모든 것이 주어질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성인은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렇게 지복(至福)을 누린 성인들이 발견한 그 한 가지는 항상 같다고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우리 자신의 운명을 실현하는 것, 하느님이 원하시는 모습이 되는 것”입니다. 진주를 발견한 농부가 집과 재산을 다 팔아 진주가 묻힌 밭을 샀다는 성경의 이야기처럼,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성인은 그리스도와 길동무가 되는 사람이고, 동지요 제자가 된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와 운명을 나누어 갖는 사람입니다.

그리스도의 운명을 선택한다는 것이 곧 수도자가 되겠다고 작심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리를 옮길 필요도 없습니다. 주변 사람을 바꿀 필요도 없습니다. 환경은 물리적으로 아무 것도 변한 게 없지만, 그 사람의 혼이 새로워지고, 환경을 바라보고 대하는 그이의 안목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가로수를 만지면서도 수액을 따라 지금도 흐르고 있을 창조의 기운을 느끼고, 하늘의 별을 보다가 갑자기 속으로 흐르는 감사의 눈물을 깨닫게 되고, 가난한 이들에게서 하느님의 얼굴을 보게 됩니다. 부유하나 겸손하고 궁핍하나 당당해집니다. 손끝이 따뜻하고 섬세해지며, 입술이 부드럽고 친절해집니다. 힘써 일하며 즐거이 찬양합니다

2,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예전에 레오나르도 보프가 썼던 <세상 속에서 하느님을 증거하는 사람들>이란 책 제목이 떠오릅니다. 신비가들은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배회하거나 아예 세상을 등지고 떠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세상 한가운데서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입니다. 특별히 세상의 고난과 아픔에 주목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그들을 ‘신비가’라고 부른 이유는 ‘세상의 눈으로 볼 때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살아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눈으로 봐야, 성령의 빛이 비추어야 알아들을 수 있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성인으로 선택되어지고 부름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 자격을 하느님께서 주셨습니다.  하느님과 함께 사는것이 성인의 삶입니다. 우리가 주일에 모여서 예배를 드리고 성찬을 나누는 이유는 성인의 삶을 배우고 고백해서 하느님의 도우심으로 성인의 삶을 살려는 것입니다.

따라서 복음의 삶을 실천하여 삶으로 성인으로 하루 하루를 복되게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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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화의 가치 (요한 2:13-22)

사순절 셋째 주를 맞이하였습니다. 눈때문에 두주간 교회가 클로즈를 하여서 사순절 시작을 제대로 못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각자 기도하시면서 주님의 뜻을 지키고 삶을 살펴가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이라면 몸과 마음이 깨끗한 사람으로 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순절에 훈련을 통하여 나름대로 지켜야 것과 버려야 할것들을 찾아서 40일동안 한다면 그것이 몸에 익어서   신앙생활에 습관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거룩한 습관이 있어야 거룩한 생활이 만들어지고 거룩한 생활이 여러분의 삶을 하느님의 축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 아버지께서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여라거룩함은 하느님의 사랑의 성품을 닮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은  성결을 의미하고 깨끗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깨끗함은 좋은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깨끗함을 원합니다.  깨끗함이라는 것은 거룩함과 영적인 것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예를들어 주님을 만난 사람들 가운데는 악령들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특히 무덤에서 살던 사람은 아주 더러운 모습을 하고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주님게서 그안에 있던 악령을 쫓아내자 그는 깨끗하고 얌전하게 변하여 사람들이 그를 알아 보지 못하였다고 했습니다. 사람의 내면에 무엇이 살고 있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겉모습과 생활이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같은 모습은 우리 주위에도 많습니다. 몸에 지나치게 문신을 하고 피어싱을 하여  사람들에게 혐오감을 주는 사람들을 보통사람들은 이해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것을 개성이나 자유의 표현이라고 하지만 이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영적인 표현인 것입니다. 한번 우리들의 사진들을 들추어 보면 우리 인생에서 어떻게 살아왔는지 고스란히 겉모습에 나타납니다. 방황하고 혼란스러웠던 때와 정결하게 살던 때의 사진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겁니다.

주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을 유월절에 가셨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께 제사를 드리는 거룩한 예배 장소요, 성지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기도하러 가보니 성전마당에는 제물을 파는 장삿꾼들과 짐승들, 그리고 환전상들과 장삿꾼들이 가득하였고, 기도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오늘날 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갔는데 입구에는 은행에서 나와서 각종 헌금을 접수하고 있고 교회에서는  바자회를 한다고 장터를 만들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이것을 주님께서 채찍을 만들어  둘러 엎으며 소리쳤습니다. “이것을 걷어치워라 아버지의 집을 장사하는 집으로 만들지 말아라이것이 예수께서 성전을 정화하신 사건이라고 합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집을 회복시키는 것입니다.  

하느님의 집을 깨끗게 하신겁니다. 세속에 오염되고 잘못되어진 하느님의 집을 본래의 목적으로 깨끗이 정화시키는 것입니다.  성전은  하느님께 기도하는 집입니다. 하느님게 나아와 제사드리고, 새로운 삶을 만드는 장소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편리에 따라서 하나하나 고치다 보니 어느덧 하느님은 사라지고 사람의 일만 가득한 곳이 되었습니다.  성전의 기능이 마비되고 사람들은 성전에서 선포되어지는 하느님의 말씀을 더이상 들을 없었습니다. 주님은 이런 성전은 허물어 버리라고하셨습니다. 하느님이 함게 하지 않는 성전은 시장일 뿐이라는 것이지요. 더이상 기도할 마음이나 말씀을 사모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성전은 의미가 없습니다. 

제가 있던 캔터키 교회는 밤이면 대부분 모르는 사람이 와서 잠을 잡니다. 겨울에는 난방이 되고 여름에는 냉방이 되니까 머물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아침기도를 가서 놀랜적이 여러번 있었습니다. 그렇다고해서 성당문을 걸어 잠근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열려 있습니다. 가끔은 노숙자가 주일미사에 참석하기도 합니다. 요즘 미국의 어느 교회도 건물을 열고 노숙자들이 밤이면 와서 쉴수 있도록 하고 그들을 위해 아침에는 식사를 준비해 주는 교회가 있다고 합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집이라면 누구든지, 언제나 들어갈 있어야 하는데 대부분의 교회는 들어 없습니다.   기능을 상실한 것이지요. 우리 교회는 그나마 채플이 열려 있는 것이 다행입니다. 그러나 아직도 많이 부족합니다. 많이 열려져야 합니다. 그것이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그것이 세속화된 성전을 정화하여  하느님의  집으로 되돌리는 일입니다. 이러한 사랑의 일이  일어나야 교회가 정화되고 본질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교회와 교인들은 분명히 기도하는 사람들입니다.  

고린토 전서 3장에는 너희의 몸이 성전이라 그러므로 너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느님게서 멸하시니 거룩하게 지키라고말씀하고 있습니다. 몸의 성전이 깨끗치 못하면 결국 그들이 하느님의 성전을 더럽히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몸이 하느님의 전이 되어 성전에 들어가야 비로서 그곳이 성전이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성전에 들어가는 자는 먼저 자신을 준비하고 들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의문이 듭니다.  나는 거룩한 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나같은 사람은 성전에 들어가면 안되는 것인가? 아닙니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성전에 들어 가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자체가 정화의 시작입니다. 아무리 더럽고 오염된 영혼이라도 성령안에서 필터링을 하면 정화가 되는 것입니다. 이자리에 모인 여러분은 모두 정화를 위하여 준비된 영혼들입니다. 그런 깨끗한 마음들이 모여서 거룩한 성전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우리 작은 공동체는 소중한 옹달샘같습니다. 아직 맑습니다. 오염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소중한 사랑과 순결한 마음을 주님과 함게 만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그것을 위하여 오늘 구약말씀에서는 십계명이라는 귀한 율법을 하느님께서 우리들에게 주셨습니다. 이가운데 하느님의 날을 거룩하게 지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간을 하느님의 사랑과 보호하심과 은혜로 살아   사람만이 거룩한 주일을 지킬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자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를 소망하는 깨끗한 마음들이 주님과 함께 하기를 원하는 것이 주일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예배드리는 생활을 습관으로 하십시오. 그런 마음 가운데 세상을 이겨내는 깨끗한 마음이 자라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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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자의 사명 (마가 1:29-39)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복음을 전하는 일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느님을 위한 일인지,  사람을 위한 일인지를 구분하지 못하면  잘못된 결과를 만들수 있습니다. 롯데 앞에서 소리를 높여 전도하는 사람을 봅니다. 용기에 놀라면서도 한편    행동에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 합니다.  전도자의 입에서는 성경말씀을 말하지만  듣는 사람에게는  소음으로 들립니다. 이것도 소통을 못하는 결과입니다.  불통의  문제는  남을 배려할 모른다는데 있습니다.  교회가 전도를 가르치면서 때를 얻든지 못얻든지 전하라는 말을  독선적으로 이해해서 전도를 못한 것입니다.  사실 기독교가 흥성할 때가 있었습니다.  20세기 기독교는  거칠것 없이 부흥하였습니다.   십자가를 땅에 꽂기만 하면  교회가  세워졌다고 합니다.  기독교는  고속으로  성장을 하였습니다. 시기에는 길에서 누구나 소리를 내었고 사람들은  반응하였습니다.  시대에 기독교는 오만하였습니다.  그때의 습관을 가지고  21세기에 전도 하기에는 문제가 있습니다.  매우 다양한 시대입니다. 사회나 개인도 다양해졌고 정보도 많아졌습니다. 따라서     사람에 대한 배려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무례하다고 손가락질을 당합니다. 이제는  전도를 예의있고 품위있게 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하느님도  대접받습니다. 앞으로는 싸구려 복음교회는 사라질겁니다.  고품질의  교회만이  복음을 전할 자격이 주어질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전도에 대한 주님의 뜻을 생각해 봅시다.

성경에는 두가지의 전도가  나타납니다.

1, 예수님의  전도입니다.

주님께서는  현장에 계셨습니다.  주님의 전도방법은 함께  하는 것으로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아프고 힘들다고 주님을 원하시면  주님은 그곳으로 가셨습니다.  누구의 청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러한  전도를 제자들도 옆에서 배웠습니다.  예수께서 떠난후  복음은  제자들에 의해서  세상에 선포됩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3년반을 생활하면서 주님의 말씀과 삶을 직접 배웠습니다. 이것이 복음이 되어 세상에 전해졌습니다. 주님은 당신이 병을 고치고 더러운  영을 쫒아내는 자리에 제자들과 함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원인을 함께 발견하고 치유의 방법도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능력을 주면 나가서 나와 같이 하라고 둘씩 짝을 지어 전도를 보내십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는 항상 어렵고 고통받고 힘든자들과 함게 하면서 그들을 회복시키시는 것을 복음이라고 이해하였습니다. 이렇게 말씀은 행위와 함게 했습니다. 서로 다른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전통을 교회는 간직하고 세상의 문제와 고민들로 부터  함께하며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느님말씀으로 복음으로  해석하고 현실에 적용할 있는 응답인지를 진지하게  찾는 것입니다.

2, 바울로의 전도입니다.

내가 복음을 전할 지라도 그것이 나의 자랑이 될수 없습니다.”

사실 바울로는 예수님과 함께 살았던 경험이 없습니다.  그는 극적으로 예수의 영을 만나 스스로 깨어지고 변화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의  전도는 제자들의 전도와는 차이가   있겠지요. 오늘날  개신교회는 사도 바울로의 전도를  많이 사용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사실 바울로의 전도로 인해서 세상으로 확대되었기 때문입니다.  소아시아의 교회들은 바울로가 원치는 않았지만   주님같은 예언자로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바울로도 믿음으로 주님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는 주님과 같은 삶으로  전도자의 사명을 이어갔습니다.  바울로는 복음이 자기의 자랑이 될수 없다고 했습니다. 복음은 하느님을 선언하는 것으로 이것은 말씀으로 변화되고  회복되어진 사람으로서  마땅히 행할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거짓 전도자들은 복음을 자기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주님을 언급하지만 이미 안에는 자기가 주님입니다.  그러면  교회를 타락시키는 것입니다. 복음이   하느님의 말씀이 나의 자랑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주권 안에 있는 것이고 나도 아래에 있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복음 전도자는 겸손해야 합니다. 말을 바구면 전도는 겸손히 하는 것입니다.   

바울로는 말합니다. “나는 어느 누구에게도 얽매이지 않는 자유로운 몸이지만 많은 사람을 얻으려고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로는 복음으로 소통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에게 자기를 맞추어 나가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소통하는 방법입니다. 원래 바울로는 고집이 전통적인 유대인입니다. 그런 사람이 남을 배려하고 섬길줄 알게 되었다는 것이지요. 이것이 복음전도자의 자세입니다. 

   하느님게서는 인간과 소통하시려고 땅으로 내려 오셨지요. 그것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하늘의 것이지만  세상속에서 누구나 나누고 가질 있는 하느님의  축복언어인것입니다. 

교회가 복음을 가지고  자기 잇속을 채우거나,  딴짓을 한다면  이것은 수치스러운 행위입니다.  것입니다.

나눔의 운동이 성공회에서  35년전에 시작이 되었다. 초창기에  빈민촌에 들어가 그들과 사는데 일용직 노동자들과 술을 나누며 이야기하는 것이 시작이었다.그당시 이것은 교회 선교방법이 아니었고 교회들로 부터 비난받을 일이었다. 그러나 그곳이 지금은 당당히 교회가 되어  주님들이 복음으로 살아가는 공동체가 되었다. 주님께서도 유대인들에게  당신은 죄인들과   먹고 마시기를  즐기는 자라는 비난을 받으셨습니다.  이것이 주님께서  하셨던  전도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생명이라도 구원할 있다면 나는 그들을  위해서 그들과 같이 하겠다는 바울로의 전도방법과도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저는 성공회는 21세기 교회라고 소개합니다. 21세기 사회의  많은 문제와 이슈를   교회에 담아서 이야기를 하고 실험하는 열린교회입니다.  서로가 다른 생각과 문화와 언어 들이 있어도 그것을 존중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는 다양함을 인정하는 정신이 있어서 누구도 누구를 심판하 않습니다. 안에서 저는  무언가를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이나 바울로 사도의 공통점은 2000년전 옛날에  21세기 살고 있는 교회나 사람들도  뛰어 넘지 못하는  장벽을  두려움 없이 허물고 의연히 전도하는 모습을  다시 조명해야  것입니다.  주님게서 하셨는데 우리가 못하겠습니까?  

여러분 전도는 사랑으로 부터 나오는 자연스러운 신앙행위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인에게 향기가 되어 실망하는 사람에게 희망을 주고  아픔이 있는 사람에게 치유가 되고, 분쟁과 미움이 있는 곳에 평화와 화해를 이루어 내는  것입니다.   것은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사람에게 주어진 특별한 능력입니다. 여러분에게  주어진  능력을 통해서  아름다운 세상을 이루어가시기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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