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s Hopkins University campus ministry




이 바나바스 신부는 매주 목요일이나 다른날 일주일에 한번씩 John's Hopkins


대학 캠퍼스에서 한인학생들을 위한 기도와 신앙의 도움을 주는 시간을 갖습니다. 


누구든지 원하는 학생들은 함게 이야기를 나누고 상담과 기도를 할수 있습니다. 


또한 성공회 교회와 연결하여 신앙생활을 할수 있도록 도와드립니다. 


주님의 평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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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말을 감사로 준비하라(마르코13:1-8)

 

오늘은 추수감사절을 앞두고 드리는 주일입니다. 1년 동안 나의 삶을 돌아보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고자 합니다. 때로 힘들고 어려웠지만, 그 때마다 손을 잡아주시고 일으켜주신 주님의 손길을 기억하고 감사하시기를 바랍니다.

에디슨이 메릴랜드 출생이다. 그의 말 가운데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성공했다는 말이 있는데, 그 말에는 큰 오해가 있었다.

1%의 하느님의 도우심이 사실은 모든 것을 결정하였다는 말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여도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모든 것이 헛된 것이다.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의 의로움을 구하여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다 이루어 주실 것이다.”

 복음말씀으로 돌아갑니다.    

과거부터 이스라엘에는 종말에 대한 사상이 뿌리 깊게 존재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모든 것이 없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날이 시작된다. 이 같은 믿음은 그들이 겪은 역사적 교훈으로부터 나옵니다. 여러번 나라를 잃고 수많은 세월을 살면서  그들은 하느님의 이끄심을 경험하고 그 결과가 어떠한지를 잘 알고 있습니다. 이것이 발전해서 묵시문학이라는 형태로 남아있습니다. 구약에서는 다니엘서가 대표적이고, 신약의 요한계시록이 있는데 오늘 복음마르코 13장은 소묵시록이라고 해서 중요한 묵시복음으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모든 것에는 심판이 있고, 그 끝은 새로운 시작을 알리는 희망이라는 멧세지가 신앙으로 전해지는 것입니다.

그 중심에 예루살렘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신앙과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입니다. 그러나 이슬람에서도 예루살렘은 아주 중요합니다.  예언자 마호멧이 예루살렘에서 승천하였기 때문입니다. 지금 예루살렘에는 이스라엘의 성전은 흔적도 없고 이슬람의 황금사원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성전 유적인 통곡의 벽에 서서 기도를 드리며 예루살렘 성전의 부활을 기원하고 있습니다. 성지순례를 가보면 의외로 기독교와 이슬람의 우산이 함께 공존하는 것이 곳곳에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만큼 서로의 뿌리가 같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웅장한 예루살렘 성전을 나오면서 제자가 감탄하며 이 성전이 영원할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성전의 돌들이 하나도 제자리에 없을 것이며 흔적도 없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이것은 충격적인 발언입니다. 아니 그 당시에 보면 반역죄에 걸릴 위험한 예언입니다. 결과적으로 이 예언은 주후 70년경 유다전쟁으로 성전이 피괴됨으로 이루어집니다.

 신앙과 역사의 중심인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는 것은 세상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사람들은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 사실은 매우 두려운 현실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나며, 그런 일이 일어나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사실 예루살렘이 무너지는 것과 같은 일은 지금도 매일 벌어집니다. 즉 사회적으로나 개인적으로 우리가 믿는 중심 축들이 허무하게 무너지는 것을 경험하지 않습니까?    

9.11 테러가 일어나던 2001 8월말에 저는 그 무역센터 빌딩을 올라가서 미국의 힘과 능력을 실감하면서 빌딩구경을 했습니다. 그리고 이 어마어마한 빌딩은 역사 속에 영원히 남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당시 이 건물이 무너지리라는 생각은 단 0.1%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후 보름이 지나 한국에서 저는 이 빌딩이 무너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일시에 생명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분명 무서운 재앙입니다. 그러면서 세상이 전쟁이나 다른 이유로 멸망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 거대한 빌딩은 일순간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세상은 그 때를 지나 새로운 역사를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종말의 역사입니다.

수없이 무너집니다. 영원할 것 같은 모든 환경들이 결국은 무너집니다. 결국 여러분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은 반드시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이 재앙으로나 전쟁으로나 항상 일어납니다. 주님은 그러한 일들이 반드시 일어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세상입니다.

 

세상에만 머무르면 희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후에 새로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것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합니다. 그 안에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보고 좌절하지 않고 감사하고 희망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여러분 지금도 우리에게는 온갖 일들이 벌어집니다. 때로는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감당해야 살수 있습니다. 성 바울로는 사역을 하면서 고난을 당하는 가운데 말합니다.”내가 맡은 일을 감당할 수 있도록 힘을 주신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께 나는 감사합니다.주께서 나를 성실한 사람으로 인정하셔서 당신을 섬기는 직분을 나에게 맡기셨습니다.”

비록 나에게는 어려움이지만 주님께서 나에게 그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힘을 주셨기에 감사합니다. 고난은 오히려 나에게 능력을 갖게 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감사합니다.

 감사는 절망과 좌절을 하면 나오지 않습니다. 그것을 넘어선 승리의 사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바울로 성인은 우리와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와 같은 연약함과 상처를 안고 살았습니다. 물질적으로도 곤핍하였습니다. 심지어 죽을 일도 여러번 당하였습니다. 그리 좋은 팔자를 타고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는 세상의 고난이나 어려움들을 원망하지는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에게 주님이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인생을 누구와 함께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만남이 중요한 것입니다. 어떤 만남은 불안하고, 고통을 주고,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해서 절망을 안겨 줍니다. 그런데 어떤 만남은 같은 상황에서도 기쁨을 줍니다. 희망을 줍니다. 어려움을 이길 능력을 줍니다. 사람을 만나서 얻을 수 있는 것은 한계가 있지만 우리 주님을 만나면 전혀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즉 종말적인 세상을 넘어 새하늘과 새땅을 보게 해 줍니다. 그래서 주님을 만나 사는 것이 가장 큰 행복입니다.

 

처음 미국으로 이민 온 사람들은 버지니아의 윌리엄스타운에 정착을 하게 됩니다.

그들 대부분은 오늘날 이민자처럼 사회에 대한 실망을 안고 떠나온 사람들입니다.     그때도 그들은 성공회사제를 모시고 와서 먼저 성당을 마을 가운데 세우고 정착을 시작합니다. 그 이유는 두려운 미지의 세계를 하느님과 함께 하지 않으면 살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간절함이 느껴지지 않습니까? 미지의 땅에 온 그들은 주의 도우심이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일찍이 깨달았습니다.

저는 처음 설교에서 우리는 광야에 초대되어 온 사람들이라고 했습니다. 광야에는 우리가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의 지식이나, 능력이 도움이 되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오로지 하느님만 의지하여 살수 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지혜입니다. 이것이 이 시대의 종말을 사는 사람들의 지혜입니다. 여러분은 이것을 깨달을 자리에 부름받은 선택된 하느님의 사람들입니다. 만약 우리들이 이것을 깨닫지 못하고 산다면 우리의 새로운 출발은 실패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여러분 성인 바우로가 가르치신 대로 항상 감사하십시오. 무조건 감사하십시오. 고생할 몸이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고민할 수 있는 정신이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때로는 다투며, 고생을 나누는 가족이 있음에 감사하십시오. 홈 리스에게 줄 수 있는 여유가 있음을 감사하십시오. 우리는 하느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아 살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인식하시고 감사의 끈을 놓지 마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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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가 되려면(루가 14:25-33)

오늘은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를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여러분은 주님의 제자 되기를 원하세요? 예수의 삶을 살기를 원하세요? 예수님 처럼 되기를 원하세요?  쉽지 않은 답이지요. 사실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면서도 실상은 내가 ? 무엇을 위해서 예수를 선택하였는지 확실한 목표가 없어요. 그러면  흔들립니다. 마음대로 믿고,  내가 믿고 싶고 것만 믿고 삽니다. 결국은 내가 신앙의 중심입니다. 그러면 하느님의  진리가 자리하지를 않습니다. 흔들리지 않는  진리가  변함없는 하느님이 안에 살아계셔서  함께해야  합니다. 이것이 자라서 믿음이 되어야 합니다.  구티에레즈 목사님은 사람들에게  5복음이 있다고 합니다. 사복음서외에 내가 복음이 있어서 오히려 그것을 믿는다고 했습니다. 예수의 가르침과 말씀보다는 내가 경험하고 내가 알고 내가 생각하는 것을 믿고 산다면 예수의 제자는 아닙니다.   

마더 데레사수녀님이 이번에 성인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 성인이 예는 일찍이 없었다고 합니다. 대개는 세기가 지나고 나서 그의 공덕과 전설적인  신앙의 기적을 통해서 성인으로 추대를 하는데 별세한지 오래지 않은 분을 성인으로  인정 한것입니다.   알바니아 출신의 여인이  일찍이  하느님의 부름을 받고  수녀가 되어 일생을 가난하고 병든 인도 캘커타의 빈민들을 위하여  살았습니다.  누구도 하지 않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의 고단한 삶을 따라서 함께 살겠다는 사람들이  줄을지어  몰려들었습니다. 데레사 수녀처럼  주님의  제자가 되어 한번 살겠다는 겁니다. 분은 인격적으로 완전한 사람이 아닙니다. 인간적인 비난과 관계의 어려움, 시기 질투 여러분과 똑같은  어려움을  안고 살았습니다.  지식으로 남들에게 가르침을 줄수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제자의 길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런   데레사 수녀를 보고  용기를 얻어  예수의 길을 가게 되는겁니다. 사람이 한다면 나도 할수 있다. 그들이 saint라면 우리도 saint 있는겁니다.   

1, “누구든지 자기 자신마저 부인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수 없다.”

여러분 나를 부인한다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나의 무엇을 부인한다는 것인가요?

 신앙의  출발은 내가 누구인가?에서 시작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누구인지 모르고 삽니다. 대부분 자기의 본질은 모릅니다. 껍데기만 압니다. 껌데기들은 수시로 떨어져 나가고 변화합니다. 이름도 바뀝니다. 모양도 바뀝니다. 성품이나, 습관과 상황도 빠뀌어버립니다. 그런데 그런나를 나라고 주장하고 믿고 사는것이 사람입니다. 나를 미워하고 부인하라는 말은 본질이 아닌 거짓된 자아를 부인하고 미워하라는 말입니다. 나의 본질이 아닌것 나의 본성 하느님께서 만들어 주신 하느님의 형상이 아닌것은  하느님에게 속한 진리의 내가 아니기에 그것을 휘둘리고 그것에 속상하고 살지말고 그것을 미워하고 버려서 ”(진아) 찾아서  평안하게 살아라 하는 말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거짓된 자아를 자기인줄 알고 삽니다. 거짓은 거짓을 낳고  이어서  또다른 거짓을 낳는겁니다. 그런 인생은  모두가 거짓으로 똘똘 뭉쳐서 나를 옭아매어버립니다. 주님께서 이것을 미워하고 부인하고  나를 가지고 따르라이말입니다. 여러분 나라는  존재는 대단하지 않아요 우주의 먼지일 뿐입니다. 그런데 먼지같은 존재가 하느님의 작품이라는 사실 알게되면  가치는  달라집니다. 데레사 수녀의 훌륭함은 그분은 참나 하느님의 작품으로 살았다는 것입니다. 성인과 범인의 차이는  종이 한장 차이일뿐입니다.

거짓을 사는 사람은 사람을 바꿉니다. 어느정도 알고 나면 자기가 드러나니까 불편합니다. 그러면 상대를 바꿉니다. 이런 인생을 계속살게 되는 것이지요.

2, “너희가운데 누구든지 나의 제자가 되려면 가진 것을 모두 버려야 한다.”

여러분 예수 믿는데 걸림돌이 무엇인가요? 버릴것을  버리기 때문이지요. 집착이라고 있습니다. 돈에 대한 집착, 자식에 대한 집착, 일에 대한 집착, 등등  무언가에 집착하면 주님을 따르기 어렵습니다. 신앙은 진리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것이다.” 하느님의 진리가 하느님의 말씀만이,  하느님만이, 어떠한 상황에서도  여러분을 살릴수 있어요. 하느님외의 모든것은  나와 일시적인 인연을 맺을 뿐입니다. 때가되면 사라집니다. 떠나갑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여러분이 지금 집착하고 잡고 있는 그것들 가운데 영원한 것이 하나라도 있나요? 그런데 그것에다 모든 것을 쏟는다면  그것은  후회하게 것입니다.  주님께서 가진것을 모두 버리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진리를 방해하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하느님 알기에 방해되는 모든것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구원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말합니다.

행복한 사람은 진리를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축복된 사람은 하느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입니다. 사람은 물가에 심기운 나무처럼 푸르고 싱싱하게 자란다고 시편에서는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진리를 사는 사람의 축복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이것을 원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축복입니다.

오늘 빌레몬서에서 소개하는 오네시모라는 바울의 제자가 있는데 그는 본래 노예였는데 바울이 감옥에 있을때 함께 하다가 예수님을  믿어 제자가 사람입니다.   노예는 사람에게 종속되어 주인이  시키는 대로  죽을 때까지  해야만 하는 존재입니다. 자기가 하기 싫어도 선택의 여지가 없습니다.  집착으로 사는 사람은 노예로 산다고 있습니다.  집착이라는 욕망이 이끄는대로 사는 것은 노예같이 사는 것입니다.  그런 오네시모가  이제는 사람이  시키는 일을 버리고 하느님이 시키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신분을 바꾸게 됩니다. 그런 오네시모를 바울은 나의 심장같은 사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하느님 보시기에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사람이기에 그렇게 표현했겠습니까?  모든 것을 버리고 하느님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   심장같이  소중한 사람입니다. 우리 공동체에는 이런 하느님의  심장을 가진  사람들로 채워지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먼저 하느님의 심장을 가진 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먼저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주님의 제자로 서의 삶을 분명하게 살기를 바랍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없는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때  여러분은  참된 진리의 축복을 살게 되고 축복이  다른 사람에게도  넘쳐서   것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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